백일홍이 한창이다. 청렴과 충절의 꽃이다. 백일홍 나무, 즉 배롱나무는 껍질이 아주 얇아서 마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가지는 풍상을 견뎌온 백골처럼 매끈하다. 감히 사심이나 탐욕이 빌붙지 못할 터, 무욕의 상징처럼 보인다. 옛 선비들은 이 나무의 모습처럼 살 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서원의 정원수로 주로 심은 것은 아침저녁 나무를 바라보면서 삿된 길로 가지 않으리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을까. 여름날의 임고서원은 이렇듯 ‘백 일 붉은’ 백일홍이 먼저 반긴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명현을 제가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이다. 성균관이 국립대학의 성격이 강했다면 서원은 지방의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임고서원은 충절의 신하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때 부래산 아래 창건된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에 현 위치인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이건하여 재사액을 받았다.
포은 선생은 고려 말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충신이다. 약관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서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고 시와 글, 그림 솜씨도 탁월했다고 한다. 또 외교술도 뛰어나 여말 명나라와의 관계개선에 소임을 담당했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도 많은 공을 세운 분이다.
우리나라 서원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교육시설로써의 강학 공간과 제향을 위한 공간, 강학과 제향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부속 공간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강학 공간을 앞쪽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기본으로 한다. 임고서원도 그에 따르고 있다.
문루인 영광루 대여섯 계단을 마음을 숙여 겸허함으로 지나면 너비가 어른 걸음으로 스무 걸음은 족히 되는 앞마당을 만나게 된다. 학문을 연마하기 전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다스리라는 배려일 것이다. 무릇 학문의 소이는 지식의 연마에만 있지 않고 선예후학이 마음 바탕에 자리 잡아야 가능한 것이다.
앞마당을 지나 다섯 계단을 오르면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임고서원의 현판이 높이 걸린 강당 흥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청운의 꿈을 품은 유생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사물의 이치와 본성을 탐구하던 곳이다. 사당보다 낮으나 기품이 있고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수성재, 서재 함육재 거느려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다.
신발을 벗고 잠시 오래된 세월 위에 앉는다. 학문이 열리고 유풍(儒風)이 창성하던 곳이니 오백 년 세월을 건너온 뒤에도 밝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선현은 세상의 모든 이치가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성분과 직분의 소임을 다함과 다하지 못함에 따라 의와 불의가 달라지며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구별된다고 설파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 유명한 단심가 편액이 걸려있다. 목숨과 바꾼 신념은 시대이념을 정립하여 조선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주었다. 포은 선생의 숭고한 뜻이, 대쪽 같은 절개가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유구한 세월을 건너온 지금에 이르러 더욱 높임을 받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내친김에 제법 가파른 스무 개 남짓한 계단을 올라가 내삼문인 유정문 앞에 선다. 오른쪽으로 백일홍이 만발했다. 포은 선생과 지봉 황보인 선생을 배향한 문충사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제를 올릴 때마다 명리를 멀리하고 덕성을 높이며 듣고 본 바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후손들은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을 터이다.
지난겨울,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주위 사람들이 나와 소통의 어려움을 제기했지만 나는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런 알력들이 적잖이 마음에 부담으로 작용하여 기어이 건강까지 해친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느라 한 달에 한두 번 일터를 온전히 떠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어머니의 고향마을이었다. 내 유년의 추억이 서려있는 외갓집은 지은 지 팔십 년도 넘었지만 아직 건재해 있다. 외숙모가 사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후로 빈집으로 남아 있다. 내가 가끔 찾아가 마당의 풀도 뽑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 걸어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임고서원으로 향한다.
포은 선생의 어머니는 영천 이씨이고, 내 어머니 또한 같은 성씨이다. 당대 최고 대신이요 석학을 자식으로 둔 변한국부인은 백로가로 자식의 안위를 걱정했다. 내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선비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한평생 필부로 사신 분이다. 내게는 심짓불이었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으나 내 어머니도 아픔을 겪고 있는 딸에게 해 주실 말씀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외갓집을 찾고 임고서원에 머무르는 이유이다. 잠시 일상의 길에서 내려와서 성현의 가르침 앞에 서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앞서가는 욕망을 조절하고 싶은 까닭이다.
학문은 널리 이롭게 쓰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루한 논쟁거리가 되거나 사상의 틀 안에 갇혀 편협해지기 십상이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공자의 ‘유교’라고 하면 고루한 학문으로 치부해 버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원을 드나들면서 조금씩이나마 무지를 깨우쳐 나갔다. 공자는 일찍이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간파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지만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규칙이 필요하고 지도자에게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유교에서 말하고 있는 리더십에는 힘으로 구성원을 복종시키는 이력복인(以力服人)과 덕으로 이끌어내는 이덕복인(以德服人)이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충(忠)은 대상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진기지심(盡己之心)이라 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의 충이란 자연법적 이치에 따르는 것, 내면의 덕성에 바탕을 둔 덕(德)으로 세상 다스림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가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었다. 위기를 자초한 것은 바로 나였다. 맹목적인 충을 요구했으나 덕으로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열과 성을 다해 일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것이었다. 리더십의 중심에는 안과 밖, 위와 아래를 아우르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두 축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찬란한 문화유산이라도 그 정신을 되새겨 부단히 우리의 삶 안에 들여놓지 않으면 한낱 박제된 시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임고서원이 서원성역화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유물전시관과 생활체험관인 충효관을 건립한 것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 세대를 이어 선비정신을 함양하고 성현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자신의 삶의 자리를 정화하고 이웃에 유익을 끼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문화유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 될 터이다.
이제 임고서원은 그저 문화유적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접목을 시켜놓았으므로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오래된 것은 낡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 검증된 삶의 정수(精髓)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복잡다단하여서 실패와 좌절 같은 어려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삶의 잣대가 되고 지향해야 할 올곧은 정신을 체득하고 있다면 삶의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겁내거나 피할 일은 아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