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리움에서의 하루 - #까치호랑이 #흰빛의 여정 / #미술관데이트

by 이음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걸어온 선배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과의 하루는 시작부터 다르다.


리움 멤버십을 함께 등록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보러 가자"는 말 한마디로 우리는 이번 주 토요일 오전 11시, 한남동에서 만났다.


1. 브런치 한 끼로 시작하는 오후


가볍게 브런치를 마치고 리움 로비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내려오면서 전시를 감상하는 동선. 리움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이 공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품이다.


[ 흰빛의 여정 — 숨이 멎는 고요함 ]


4층 전시실의 주제는 《흰빛의 여정》.


15세기 분청사기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올수록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이었다.


조선의 백자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데 품위가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형태, 순백의 유색.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단아함이 오히려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려청자. 섬세한 학 문양, 꽃, 용. 선조들의 손에서 탄생한 그 섬세함 앞에서 나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왜 고려청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날 비로소 몸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원형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길도 작품이었다.

자연광이 스며들어 만들어낸 은은한 무지개 빛이 계단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전시실 안인지 밖인지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2. 까치 호랑이 — 430년을 건너온 유머


2층으로 내려오니 이번 상설기획전의 주인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치호랑이 虎鵲(호작)》, 11월 30일까지 열리는 전시다.


호랑이는 액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이었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백성의 새였다.

이 둘이 함께 등장하는 호작도는 조선 민화의 대표적인 소재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1592년에 그려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작도가 국내 최초로 공개되었다.


그리고 내 발걸음을 완전히 멈추게 만든 작품이 하나 있었다.


19세기 작자 미상의 호작도. 추상적인 선과 구성, 어딘가 익살스럽고 현대적인 표현.

사람들이 '피카소 호랑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작품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티브가 된 그림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니 그 닉네임이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범과 호랑이 무늬를 합쳐 표현한 독특한 형태, 노란 호피 문양, 어딘지 귀여운 표정까지. 조선시대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트렌디했다.


43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유머 감각이 오늘날 K-컬처의 DNA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변하지 않는 것들의 가치


요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크고 작은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기술은 빠르게 달라지고,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수백 년을 버텨온 도자기 앞에, 430년 전 그림 앞에 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훼손되고 변형된 흔적조차 예술이 되어버린 그 작품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본질이 단단한 것은 세월도 함부로 지우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도, 물건도, 우리가 매일 누리는 것들도..

저마다의 본질과 가치가 있을 텐데, 일상을 살다 보면 자꾸 그걸 놓치고 산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4. 맥심플랜트에서의 티타임


관람을 마치고 선배님과 함께 맥심플랜트로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한 주제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결이 맞는 사람과, 온전히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걱정도 일도 잠시 내려놓고,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그게 나에게는 최고의 리추얼이다.


가끔은 이렇게, 일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일상 안으로 다시 돌아갈 힘이 생기니까.


[이음의 한 줄]


​"로직(Logic)의 속도가 우리를 불안하게 할 때, 우리는 예술이 남긴 본질(Essence)에 머물러야 합니다.

430년을 건너온 호랑이의 유머가 오늘 우리의 위로가 되듯, 당신의 단단한 본질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깊은 향기를 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