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힘껏 애쓰는 나날
약국에 갔다가 엄청나게 목소리가 큰 중년 여성을 봤다. 병원과 약국 직원에게 어마어마한 분노와 억울함을 표출하고 있었고, 도무지 다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성량이었다. 그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직원끼리 하소연을 했다. 그 시각 그 공간에서 그는 명실상부 '빌런'이었다. 나 또한 놀라고 무서워 직원에게 같은 응대직으로서의 연민을 느꼈다.
그 모든 즉각적인 반응이 지나간 뒤에 이런 궁금증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
병원의 실수는 계산을 100원 덜 한 것이었고, 그분의 실수는 남의 처방전을 약국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약국 직원이 '남의 처방전을 가져온 것 같다'고 말하자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뭐가 그렇게 억울했을까. 어쩌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화산같은 분노를 쏟아내게 됐을까. 아마도 그분의 발화지점과 상황이 절묘한 시너지를 일으켰을 것이다. 원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말을 붙여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다른 분노를 촉발할까봐 그러지는 못했다.)
그날 밤 김선미 작가의 <비스킷>을 읽었다. 자기 전에 폈는데 너무 흥미진진해 한 시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비스킷>에 등장하는 위층 아주머니(조제 모친)를 보고 강력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 이 사람도 비슷한 사람이구나.
작은 일로도 쉽게 화를 내고, 방어적이고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 말꼬리를 잡아 상대방을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 난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날 귀하게 대해 달라고 부당한 방식으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빌런'은 어쩌다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 대다수는 의연한 상황에서 왜 그들은 '진상'이 되고 마는 걸까?
비스킷은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을 부르는 주인공만의 용어이다. 이 얼마나 쓸쓸한 단어인가. 그런데 여기서 '보이지 않는'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이 소설 세계관에서 비스킷은 유령처럼 몸이 투명해져서 타인에게 보이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존재감이 희박한 정도이다가, 나중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곤 한다. 주인공 제성은 청각 과민증이 있어(그래서 표지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있고, 목차는 '~의 시끄러움'으로 구성된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비스킷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그런 제성네 아파트 위층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온다. 그 집 아주머니는 이사 첫날부터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며 시끄러운 클락션을 울려대는 통에 제성의 청각을 괴롭게 한다. 그 집 식구들은 쿵쿵대며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한밤중에 성악 연습을 하는 목소리, 그리고 자정에 초인종을 누르고 따지는 적반하장을 선사함으로써 제성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분노와 복수하고픈 마음을 불어넣는다.
그런 제성은 아름답고 고요한 정원에서 한 소녀를 마주친다. 소녀는 비스킷이자, 새로 이사 온 윗집의 둘째딸(!)이었다. 입시로 바쁜 첫째와 천방지축 막내 사이에서 보호자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해 비스킷이 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이름을 '조제'라고 소개한다. 때로는 조제처럼 다른 곳(또래 등)에서 관심을 얻어도 소중한 가치를 두는 대상에게서 무시당하면 자신을 지킬 힘이 희미해지곤 한다.
조제는 본명이 아니다. 어떤 독자는 제승처럼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하반신 장애를 지닌 조제와 츠네오의 만남을 다룬 일본 소설이다. 조제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고 있지만 바깥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고, 고립된 동시에 독립적인 인물이다. 집안에서 존재가 곧잘 지워지지만 자신을 잃지는 않은 조제(지안)과 어울리는 가명이다.
조제는 존재만으로도 관심받는 첫째와 셋째처럼, 자신도 존재만으로 부모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봐 달라고 투쟁하지 않았으므로 비스킷이 되었다. 그런 조제에게 제성은 말한다.
“네 깊은 관심으로 (너의) 부모님은 비스킷이 되지 않았다”
즉, 조제의 부모님은 조제가 아니었다면 비스킷이 됐을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다. 조제 모친 같은 사람은 자신을 지키는 힘이 없어서 혹은 지키는 방법을 몰라서 비스킷이 되거나 모난 성게처럼 사방을 괴롭힌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비단 '빌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성 또한 복수라는 행동을 수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성의 복수 대상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비스킷을 괴롭히는 존재들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얼핏 '사이다'로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이지만, 비스킷을 구하는 것과 복수는 엄연히 별개의 일이다. 복수는 자기중심적인 정의에 의한 행동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제성은 (박 간호사를 위한 일인데도) 박 간호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제성이는 이름 뜻인 "크게 소리 내어 우는 소리"를 복수로 표출했다.
하지만 이제 제성은 복수 말고도 제 존재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제성이 비스킷을 민감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청각 과민증때문만이 아니다. 비스킷이 되어버릴 것 같았던 어린 제성이 [비스킷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여러 곳에 새긴 마음, 비스킷에게 자신을 겹쳐보면서 그들을 연민하고 공감하는 마음 때문이다. 일례로 불량배 '보노보'는 조제의 존재를 감지할 정도로 감각이 예민하지만, 제성처럼 비스킷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보노보 같은 사람들에게 비스킷은 무시해도 되는 대상, 그러므로 보이지 않게 되는 대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경구가 와닿는 소설이다.타인 때문에 괴롭지만,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썼다. 절대적 주체로서의 '나'가, 또다른 주체인 '타인'에 의해 관찰-물화될 때 '나'의 세계는 위협당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은 내가 나를 인식하게끔 하는 매개로써, 내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한다.
소설 <비스킷>의 메시지는 존재감이 희미한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는 것이다. 그들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로운 문장이다. 학대아동을 구하는 장면이 라이브 송출됨으로써 제성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까지 이슈화가 진행되는 결말까지 제법 고무적이다.
다시 처음의 '빌런'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그들은 우악스럽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타인에게 자신을 인식시킨다. 그들에게서 그럴 힘을 앗으면 유령과 진배없어진다는 점에서 그들도 예비 비스킷 위험군이다. 동시에 그 목소리로 타인의 존재를 억누르고 지운다는 점에서 다른 비스킷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회이다. 그들을 비스킷 위험군 혹은 비스킷 조제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복수가 아니다.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건강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일환이 마음건강 지원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필히 확대, 홍보되어야 한다.) 제성은 자신이 비스킷이 될 뻔한 아픔으로 다른 비스킷을 알아보았다. 약해졌다 단단해진 사람들은 분명 다른 약한 사람들에게 손내밀 수 있다.
비스킷은 분류상 청소년 문학이지만 어른에게도 많은 성찰을 요하는 작품이다. 에필로그에서 기어이 눈물을 쏟은 단락을 공유하며 이 글을 마친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지켜 내기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던 쓸쓸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모습이 희미하게 깜빡거린다. 그때 필요한 건 어디로 나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득함을 함께 바라보고 손잡아 줄 수 있는 누군가다.
누구나 비스킷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비스킷을 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