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서평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에 연루되지 않은 성인은 없다.
우리는 무감함으로, 방관으로 이 죽음에 가담했다." (최은영)
김동준 군은 2014년 CJ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부당 노동 및 직장 내 폭력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 한 문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가.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동준 군이 어머니와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친구들 사이에선 얼마나 잘 들어주는 존재였는지, 마이스터고에서 얼마나 보람차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 (재학기간) 제일 잘 보냈어. 마이스터고를 잘 선택했어."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은유 작가가 당사자와 주변인의 목소리를 지면에 실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다.
표지는 김동준 군이 사용하던 실제 노트이다.
CJ제일제당은 커다란 회사다. 기업 이미지 손상 없이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공식적인 사과도 인정도 없이 금전적 보상을 협의하는 데 급급했으리라. 회사가 단속한 탓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조장과 룸메이트 말고는) 조문 오지도 못했다. 불리한 증언을 철저하게 차단한 것이다. 회사는 시간을 끌었고, 관계자들이 지치기를 바랐다.
끈질긴 노력 끝에 동준 군의 죽음은 2015년 산재 인정을 받는다. 회사의 책임을 입증한 것은 기쁘지만, 못내 씁쓸하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다음 동준 군을 막기 위한 일이었음에도,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막기 위한 제도는 여전히 미비하다.
지금 막 덮쳐오고 있는 불행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준비된 것인가를 인식하는 순간 동시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한층 더 잘 알게 된다. (발터 벤야민)
일터의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2024년 3분기까지 이미 44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산재로 인정받는 수만 이 정도다.)
사회는 개별 사건에 분노하고 놀라다가, 이내 늘 있던 일로 치부하고 무감각해진다.
그런 사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 계정이 등장했고, 경향신문 1면에 1200명의 사망 노동자가 실렸다. (오른쪽)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동준 군의 죽음에 대해 '직장생활이 다 그렇다', '나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구조의 폭력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뱉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담당 노무사는 해당 사건이 사적 폭력이 아닌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누군가 그 상황을 버틸 때 누군가는 죽는다면, 어째서 살아서 버티는 사람을 기본값으로 두어야 하는가?
어머니가, '회사는 다 그러니까 가서 일하라고 했다'는, 그래서 아들을 죽게 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어머니가 누구보다도 산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 노동으로 인한 죽음이 어떻게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적 죽음을 제도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도,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담당 노무사님이 말씀하셨듯 '굿하고 비슷'한 것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사고가 아닌 재난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1) 안전 대책 미비와 부실 대응의 책임을 인정해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고, (2) 수많은 '왜 거기에 있었냐'는 부당한 모욕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은, 그 사람의 온전한 선택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며, 사회가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위험한 직장이었다. 기계 고장이 잦아 민호 군의 핸드폰 액정이 나가고, 떨어져 갈비뼈가 다쳐 집에서 쉬는데 회사가 또 기계 고장이 났다며 민호 군을 불렀다. 나갔더니 다른 직원은 기계가 멈춰 아무것도 못하고, 교육 기간 일주일이었던 민호 군이 기계를 고치러 들어갔다가 압사사고가 났다. 회사가 가져다 준 산재 신청서에는 사고가 민호 군 잘못으로 되어 있었다.
안전보건공단은 5년 동안 방문 안전점검을 하지 않았다. 기계 고장 원인도 명확히 밝히지 못한 채 '영세 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이렇게 사고가 난 원인을 제대로 찾지 않은 채 기계를 돌리는 사회는, 산재가 줄지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방치한다.
민호 아버지 이상영 씨는 그후로 진상규명과 나아가 다른 노동현장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실습 정상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세월호 때도 익히 본 군상이지만, 인터넷에는 유족을 향한 다채로운 모욕이 쏟아진다.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도 위로는 건네지 못할 망정 '그만 하라'고 말린다. 그런 반응에 이상영 씨가 "내 새끼 죽어서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차후에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싸우는 건데..."라고 씁쓸해하시던 문장이 아프게 남는다.
내가 나한테도 빈틈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우리에게 빈틈이 많은 거예요. ... 한 사람이 싸워서 사회의 어떤 부분을 바꿨어요. 그런데 이 사람도 불행히 (빈틈을) 모르는 거예요. 10년, 20년이 지나면 노동부도 조금 알고 교육부도 조금 알 수 있도록 하려면 이런 작업이 계속 있어야 해요.
특성화고 교사와 전국특성화졸업생노동조합 위원장의 목소리도 실렸다.
책을 읽다보면, '전형적'인(초-중-고-대학교 루트를 탄) 사람들이 얼마나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와 접점이 없는가 깨닫게 된다. 전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주류 매체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매월 110~120만 받는 회사, '무조건 아프기로 유명한' 회사, 독한 약품을 쓰는 반도체 회사... 이런 목소리는 관심을 갖고 찾아야만 겨우 들린다.
아니, 관심 이전에, 특성화고를 무시하는 시선이 한국사회에 너무도 뿌리깊다. "상고는 공부 못하는 곳", "노는 애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인식. '모든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건 아니'라며 만들어 놓고, 기술과 노동을 택한 사람에게 멸시의 시선을 보내는 한국 사회. 사회가 그들을 귀하게 대접하지 않는데 시민과 행정이 어찌 노동 실태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값싸고 어리숙한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자본의 요구와 제도가 맞아떨어진 사각지대가 바로 현장실습생 제도이다.
폭력적인 시선은 모르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나와 먼 존재라는 생각. 내 주변에 없으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 그러나 그것들은 책이나 기사를 통해 당사자들을 조금이라도 접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엷어진다. '나와 먼 존재'라는 인식은 사실 특성화고 재학생 사이에도 있다. 교사가 산재 소식을 전하면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있지만, '일하면 원래 그렇다'는, 기성세대 논리를 체득한 반응도 많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원래 그렇다' 며 넘어갈 수 있겠는가?
잃어서 고통받는 사람이, 타인은 잃지 않도록 싸우고 있다. 고통받은 사람이 다른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는 모순이 슬프다. 내가 아직 잃지 않은 까닭은 먼저 잃은 자들이 행동해주었기 때문이다. 무감하게 보낸 오늘도 그들에게 일부 빚지고 있다.
2023년 개봉한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감독님이 촬영 당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도서를 많이 참고하셨다고 한다.
영화에는 현장실습생 말고도 주변인과 실습업체 직원 그리고 교육청의 입장이 다 담겨있다. 물론 그들은 소희(실제 실습생 성함은 홍수연 양)의 죽음을 막지 못한 못난 어른들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방치했던 구조적 원인을 영화로나마 엿볼 수 있는 귀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연 씨가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교육청에서 직업계고별 취업률을 집계해 줄세우고, 그러다보니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일터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뒤늦게 방침을 바꾸었지만, 최근 뉴스에 검색을 해보면 여전히 특성화고 취업률이 낮으면 '비상'이라는 타이틀을 걸곤 한다. 기사를 클릭해보면 학생들이 공기업, 공공기관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학생들에게 원인을 돌린다. (진짜... 왜겠는가...)
취지는 좋다. 취지대로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안전하게 기술을 배우고, 현장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실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당장 현장에 투입되어 한 사람 몫을 하도록 닦달받는 게 아니라면 왜 기피할까. 애초에 이 제도를 벤치마킹한 독일의 직업교육훈련과 체계 자체가 많이 다르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훈련에 투자하기는커녕 학생들을 인력으로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관련 분석 기사) 당장 고칠 수도 없고 교육부가 기업에 강제할 힘도 없는 한국에서는, 적어도 지금 있는 학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처벌과 관리감독을 강화하자는 뻔한 주장밖에 펼칠 수가 없다. 많은 싸움 덕분에 그나마 지금까지 왔다.
김동준 군은 2014년 CJ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부당 노동 및 직장 내 폭력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이런 문장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관심이 한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그런 행동이 모여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어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