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디자이너로서 색이 없다는 건, 마치 빈 잔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풀어내기 위해 시간을 쓰다 보니, 정작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이 없어진 지 너무도 오래된 것 같다. 어느샌가 나를 상대방을 투영시키는 수정체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속알맹이 찬 것처럼 구느라 진땀이 났다.
라는 글을 쓴 게 2023년. 그리고 지금은 2025년이다.
그때의 나는 오롯한 나만의 아이디어, 창작성이 없다는 것이 무언가 빈 것처럼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비어 있다'는 감각을 두려워했겠지. 이제는 그 빈 잔이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걸 안다. 색을 담아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면, 이제 나는 그저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유연하게 흘러가는 '도체'가 되고자 한다.
색이든, 생각이든, 이야기가 흐를 수 있도록. 그저 하나의 용기가 아니라, 연결하고 흘려보내는 존재로. 이제는 내 안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그러니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