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을 재생(再生)하다

동백 아가씨

by 지구 사는 까만별




만인에게 꽃 같은 시절이 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개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꽃수를 잘 놓았지만 물감을 칠할 기회가 없었고, 고운 말만 하였지만 문장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노래할 기회가 없었다. 오늘의 글은 엄마의 잃어버린 노래에 대한 내용이다.


엄마는 음악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낮에는 카세트를 들고 다니며 허리를 숙였고, 저녁에는 티브이소리를 들으며 집안일을 했다.

늦은 밤이면, 갓 뽑은 명주실처럼 가늘고 고운 목소리를 작은 티브이 상자에서 뽑아내었다. 길쌈을 했을 엄마의 할머니들처럼, 엄마는 티브이의 목소리를 이어가며 잠에 들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가수는 엄마보다 손이 고운데도, 목소리에서 세월의 상흔이 수북이 떨어졌다. 그 고단함이 잠든 엄마와 닮아서인지, 다시 낮이 되면 엄마는 몸빼를 입고도 가수 같은 목소리로 기교를 퍼뜨렸다.


가장 태양이 높아 일을 할 수 없는 휴일 한낮이면, '전국노래자랑'을 보셨다. 사회자의 느긋한 진행에 맞춰 아버지는 웃다가 낮잠을 주무셨고, 엄마는 그 옆에서 느긋하게 웃었다. 뜨거운 햇살을 대신 받아내던 기와지붕은 자신이 무엇을 지키는지 몰랐을 것이다.

본분을 다하던 낡은 지붕 아래서 부모님은 여유로운 한낮과 수고를 다한 밤을 보내며 세월을 베어 무셨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걸어온 늙지 않는 음악들이 줄곧 제 길이만큼 들려오곤 했다.


유난히 재능이 많은 고운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너무도 고운 심성으로 인해 많은 것을 피워내지 못했다. 간드러진 기교가 인상 깊던 여인의 노동요는, 너무 많이 재생된 탓인지 가사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세월이 흘러 병상에 누운 엄마는 여태 해온 노동을 닮아있다. 손등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손마디는 밭고랑처럼 두터웠다. 그러나 엄마가 부르던 노동요는 늙지 않았다. 개화할 기회가 없더라도 마음에 꽃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눈 뜨기 힘들어하는 엄마 옆에 앉아,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나눠 끼고 볼륨을 높였다.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


엄마에게는 여태 꽃이 있었을까. 붉은 꽃잎 대신 어떤 피땀을 흘렸을까...

동백가지 같은 거친 손을 꼬옥 부여잡고 다음 가사를 함께 들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오래오래 재생되다 늘어난 테이프가, 피어나지 못한 엄마의 꽃들과 닮았다. 엄마의 긴 꿈 속에서 피는 동백들이 한없이 고와 붉게 어리었다.









https://youtu.be/smKAbJruR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