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에게

by 지구 사는 까만별




이 밤은 너무 길어 너에게 가기까지

하얀 너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네

오 희야 보고픈 사람아

이 밤이 이 밤이 너무 길어...”

치직치직. 주파수를 돌리다 소녀는 손가락을 멈추어 음악의 세례를 받았다. 정지된 소녀 주변으로 흐르는 가사들은 소녀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 소녀는 누군가의 희야가 되는 상상도 해보며 잠 오지 않는 밤의 꿈을 좇았다.


토요일 아침, 오후에는 학교가 파한다는 생각에 학교는 웃음소리로 활기차기만 하다. 연예인 사진 가득한 전형적인 잡지들과 매점의 간식들로 여고의 학생들은 삼삼오오 학교의 생기를 채웠다. 분필가루처럼 건조하고 가벼운 웃음이 부유하는 교실. 그 창가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왁자지껄한 소음 안에 커튼소리를 포집하듯 꿍한 표정을 짓다, 친구가 부르는 소녀의 이름에 표정을 숨기고 친구를 바라보는 오전이었다.


4교시 수업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선생님의 종례를 주섬주섬 가방 안에 넣으며 소녀는 오후를 상상했다. 소녀는 빵빵한 가방을 둘러메고 집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친구가 준 약도가 멈추자 빵집이었다. 빵집 창문 안으로 미리 도착한 친구들의 얼굴이 말갛게 보인다. 그리고 친구들의 바로 맞은편에는 여고에서 보던 것보다 더 큰 실루엣들이 앉아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빵집 앞에 깔아놓은 돌멩이가 신발을 간지럽히며 현처럼 높은 소리를 냈다. 돌멩이를 차듯 빙빙 걷다, 소녀는 문을 연다.


띠링!


빵집에서 소녀는 그중 한 소년과 마음의 방향이 맞아떨어졌다. 선한 눈빛에 제법 듬직한 체격의 소년이었다. 소녀와 소년은 서로만을 보며 자주 웃었고, 반나절의 만남이 지난 후에는 여러 펜팔이 오갔다. 소녀는 밤을 줄여 편지지 위에서 유영하였다. 편지지 위로 모여들던 백열등의 탄내를 동봉하여 소년에게 띄우고 나면 소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외롭지 않은 것과 혼자이고 싶은 것은 다른 법. 어느 날 편지속 소년은 제안했다. 다음 주 주말 학교가 파하고, 처음 만났던 빵집에서 둘이 만나지 않겠냐고.


소녀는 답장 대신, 소년의 편지지를 만지작거렸다. 편지를 다시 읽는 밤들이 지나가면, 주말이 올 것이기에...

이번에도 소녀는 빵집의 문을 열었다. 조금 더 쑥스러운 얼굴로 마주 앉은 두 명은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밤 편지에 동봉했던 마음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에 장난도 섞이기 시작할 때 즈음, 두 사람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심장이 터질듯한 음악으로 자유로이 땅을 가르는 사람들. 두 사람도 어설프게나마 음반 위를 날았다. 당시의 유행가와 보편적인 남녀들 사이로, 소녀와 소년은 섞여들어 둘 만을 쳐다보았다. 조명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시간을 잊게 해 주었다. touch by touch, harlem desire, London nights, bambina, Dancing queen, you’re a woman... 많은 노래가 롤러 사이로 회전하고, 소녀와 소년의 맞잡은 수줍은 손은 롤러장을 떠나고도 온기로 소녀에게 오래 남아있었다.


소녀는 소년도 자신과 같은 수영을 하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소녀에게 도착한 다음의 봉투를 뜯자, 음표들이 왈칵 쏟아졌다. 소년은 수업 시간에 벌칙으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고 한다. 소년은 교탁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소년의 처음 같은 존재인 한 소녀를 생각하며.


“이 밤은 너무 길어 너에게 가기까지

하얀 너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네

오 희야 보고픈 사람아

이 밤이 이 밤이 너무 길어...”


소녀는 풀잎 향이 나는 소년의 노래를 상상하고서 웃었다. 소녀의 침대로 은하수 아래의 풀밭이 가득 펼쳐져 소녀는 밤새 발을 구르다, 새벽에야 잠에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자 다시 소년이 없는 새벽. 라디오의 끝난 노래는 다시 재생할 수 없는 법이다.

소녀는 편지지에 답장을 쓰는 대신, 같은 음악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며 같은 대사들을 떠올릴 뿐이었다. 회상 속에서 소녀는 누군가의 희야였다. 라디오가, 동네가, 그리고 그 소년이 사라져 가도 희야의 밤에는 그날의 노래가 반짝이며 은은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 이글은 자전적 소설입니다.





https://youtu.be/EovrS2VWwcs?si=BgbLZLwNpt6aam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