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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Lee Nov 13. 2020

코로나 시대의 백수, 취직을 미루기로 결심하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황금기를 계획하기로 하다

퇴사 본가에서 추석 연휴를 보낸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추석 연휴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구직 사이트를 보다 보니 포지션도 마음에 들고, 회사도 마음에 드는 채용공고가 있었다. 공고가 내려갈세라 서둘러 이력서를 열심히 쓰고 있는데, 자꾸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 회사에 입사하면 정말 좋겠지, 나는 다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지. 나를 뽑아주려나? 뽑아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진짜 뽑히면 어떡하지? 바로 일을 시작하게 돼버리면 어떡하지?"


코로나 시대에 채용 공고를 올려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판에 나는 일을 시작하게 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직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코로나 시대의 실직자, 취직을 망설이다


나는 그날로 이력서 쓰는 것을 멈추었다.

물론 멋진 회사에 다시 보란 듯이 입사하면, 내 체면도 조금 살 것이다. "치욕스럽게 퇴사했지만, 기회 삼아 더 좋은 곳에 입사했다!" 얼마나 멋진 스토리인가.


하지만 그까짓 체면 때문에 이렇게 취직을 빨리 서둘러야 하는 건가?

지금 나는 당장의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4월까지는 실업급여가 나오기 때문이다. (Oh 권고사직 Oh)

지금 나는 주거지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3월까지는 전세 기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생활비와 주거가 해결되는 풍요로운 상황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다른 회사에 입사하여 일을 바로 시작하게 되면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리지도 못하고, 출근과 퇴근의 반복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출퇴근하기 더 가까운 거리로 집을 다시 구하고, 이사도 해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게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일까?


아니.

 그래서 나는 취업 준비는 잠깐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대신 다시 올지 모르는 황금기(생활비와 주거가 해결되고 있는 이 시기를 황금기라고 부르겠다.) 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당장 비행기표를 끊었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떠올랐고, 나는 내가 그것들을 내가 해야 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분류해 노션에 정리해 보았다.



취업 말고 진짜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먼저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블로그 리뉴얼
네이버 블로그에 간간히 글을 쓰고 있지만, 보다 조금 더 전문적이고 덜 상업적인 글을 쓰고 싶다. 네이버 블로그는 검색 노출이 잘 되어 방문자가 소소하게 있긴 하지만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으로 방문하거나, 간단한 정보 검색을 하다가 흘러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나은 플랫폼이 무엇이 있을까 하다 생각한 것이 브런치다. 브런치와 함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


    Localization Project
 그동안 눈여겨봐 왔던 앱 개발 회사들에 컨택하여 한국어 번역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다. 내가 이전 회사에서 해온 번역 업무와 UX 라이팅 스킬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황금기에 코로나 때문에 집콕을 해야만 하는 이 환장하는 상황은 나의 관심과 열정을 살려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돈도 노골적인 구직도 아닌, 오로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의 보람과 즐거움을 목표로 하고 싶다.  


    영어 공부
해외 취업은 나의 오랜 염원이었다. 이것이 그저 꿈으로만 남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는 정진의 자세가 필요하다. 영어 단어 공부, 영어 아티클 읽기, 영어 소설 읽기를 매일, 매주 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UX 강의 듣기
IT 회사에서 일하면서 IT 관련 전공 학위, 경력 없어 나는 곧잘 자격지심이 들곤 했다. 시간도 있고 돈도 있는 지금이 바로 퀄리티 좋은 온라인 강의를 찾아 들을 수 있는 적기이다.  


    포트폴리오 사이트 만들기
그동안 회사에서 작업해 온 UX writing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보자. 휘황찬란한 포트폴리오는 못되더라도 내가 했던 업무들을 보기 좋게 정리한다면 승산이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Microcopy Library 만들기
이전 회사에서부터 나는 비슷한 앱의 비슷한 기능의 UX 디자인과 앱 내 문구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모아 왔는데 그것은 잘 아카이빙하면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용한 자료가 되려면 방대한 양의 자료를 꾸준히 모으고, 그것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취업 준비
황금기를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해 줄 수 있는 task.. 취준..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취업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나와 잘 맞는 회사를 찾아서 천천히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채용 준비를 해보고 싶다.  


    실업급여 신청
꽤나 복잡한 실업 급여 프로세스. 타임라인에 맞춰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급여를 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심리 상담
예전부터 받아보고 싶었던 심리상담. 갑자기 밀려드는 자책감, 불안감, 막막함, 자기혐오, 외로움은 내가 나 자신을 나약하게 느끼게 하고,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무식하게 나 혼자 싸우지 말고 심리 상담을 받아보자.  


    서핑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합시다. 서핑.  


    목공
한번 즈음해보고 싶었지만,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일이라 망설이고 있던 목공. 작은 가구를 만들어보면 좋겠다.  


    디제잉 배우기
한번 즈음해보고 싶었던 거 되게 많은 편.. 20분짜리 믹스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배워보면 어떨까?  


    국내 여행 (진천, 목포)
해외여행을 하지 못한다면.. 국내 여행이라도! 계획 중인 여행지는 친한 대학 동기와 그녀의 작은 강아지가 살고 있는 충북 진천. 그리고, 아홉 가지 진미를 찾아서 전남 목포.  


    강아지 입양
아아.. 반려견 입양은 나의 얼마나 오랜 꿈이었나. 원대한 꿈인 만큼 그 무게감과 책임감도 무시할 수가 없어 쉽게 결정할 수 없다. 매일매일 고민만 하고 있다. 집 계약이 끝나고 난 이후의 주거 계획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단은 임시 보호 형태로 오갈 데 없는 강아지를 돌봐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고 싶다.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 동네 독립서점이나 소품샵에 판매를 위탁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  



내가 필요한 것은 나를 성장시킬 시간, 내가 나를 사랑할 시간


이렇게 내가 적어놓은 리스트들을 천천히 살펴보니, 내가 퇴사를 하고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나를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는 나를 성장시키기보다는 내가 속한 조직에 나 스스로를 최적화시켰다(물론 그 과정에서 성장한 부분도 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보다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급급해왔다.

나는 나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 나에 의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기술과 능력을 갈고닦아 전문가로서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익힐 시간.

그래서 나는 황금기 동안의 나의 목표를 조금 오글거리지만, <성공적인 취직을 위한 커리어 쌓기와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사람 되기>로 하기로 했다.




나를 위한 시간이 나에 의해 남용되지 않도록


목표를 세웠으면? 달성해야 한다. 달성과 함께 실천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체계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월간 계획과 주간 계획도 세웠다. 이번에도 역시 노션이다.

월간 계획은 일단은 크게 잡아 놓고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계획에 맞춰 실행하면서 추후 수정/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주간 계획의 목표는 조금 더 작게, 쪼개서.

이번 주의 목표, 이번 주 안에 꼭 해야 할 일들, 시간이 남으면 해도 되는 일들을 상단에 적었다.

요일별로는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작성하고, 하단에 매일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운동)과 읽은 것과 공부한 것(주로 영어 아티클 및 소설, 영어 단어 공부)을 링크와 함께 적었다.

내가 사용한 주간 계획 노션 템플릿은 여기에서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다.



완전무결한 성공보다는 끝까지 완주하기 위하여


나는 이상한 형태의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초반에 생각대로 계획이 잘 안 풀리면, 완전무결한 성공과 멀어졌다고 생각해 포기해 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 작가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계획들이 잘 풀리지 않고,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여느 때처럼 나를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집에서 잘 풀리지 않는 계획들을 붙잡고 있을 때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사람들이 멋진 회사에서 자기 역량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내 처지에 절망하는 시간도 분명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감탄과 절망이 반복되는 시간을 버티지 않고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황금기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한 것은 멋진 회사와 멋진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남의 감탄을 받고 싶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싶어 취업을 미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 김금희 작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번 우리의 한계를 넘는 일이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타인이 될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익히길 원한다. 한계에 부딪히고, 한계를 만져보며, 끝끝내 넘어서는 일은 분명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사랑스럽게 만들 것이다.

나는 완전무결한 성공 대신 끝까지 이 계획을 완주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의 황금기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겠다.


황금기가 끝나는 3월까지 얼마나 많은 계획들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때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그때의 나는 또 어떤 목표와 계획을 가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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