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00년 전의 디아스포라에 투영된 100년 후의 사람들

『검은 꽃』속 국가의 상실과 인물들의 대응 방식을 중심으로

『검은 꽃』은 인물들의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는 서사구조다. 처음 등장인물들의 기대가 구현된 건, 4년이 지나 외화벌이로 부자가 되어 있을 그들의 미래를 향해서다. ‘묵서가’로 떠나는 ‘일포드호’ 안에서 그들은 멕시코에서 돈을 많이 벌어 언젠가 조선에서 땅을 사리라,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괴롭혀왔던 지주들로부터 해방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막상 그들이 그렸던 축복의 땅에 서린 암울한 미래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암울함이 현실로 실현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실망한다. 그들이 기대하고 꿈꿨던 미래는 깨끗하게 타버린 재의 형태나 다름이 없을 것임을 직감한다. 김영하 작가의 생각은 달랐으나, 내가 생각하는 검은 꽃은 모든 것이 타버린 잿더미로 만들어진 꽃이다.


 미래가 까맣게 타버린 그들의 기대가 향한 곳은 결국 ‘국가’였다. 멕시코 권력의 실체가 밝혀지는 시점에서 그들의 야심찬 도전의 한계가 드러났고, 철저한 식민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된 그들이 기댈 곳은 조선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희망이 없어 떠나왔던 그들이, 그들이 선택한 미래에 희망이 없어지자 다시금 자신들의 모국에 기대를 회귀시킨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모든 독자가 예상한 바와 같이, 그들의 기대는 참혹하게 무너진다. 멕시코 노예 계약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에 걸쳐 이뤄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은 일본에 편입됨으로써 천여 명의 사람들은 국민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서사 속에서 드러나는 국가의 기능은 약 두 가지로 추려진다. 첫째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지켜주는 ‘보호’의 기능이다. 멕시코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대한제국에서 노예 계약의 부당함을 알게 되면 그들을 싣고 돌아갈 배를 보내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미 존폐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은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국가의 기능을 수행할 힘마저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둘째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의 ‘존재 증명’의 기능이다. “국가는 개인을 국민으로 선택하고 소환하며, 국민으로 소환되는 개인은 정치적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개인은 한 개인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으로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윤애경, 「대한제국 디아스포라의 근대 체험과 국가 담론-김영하의 『검은 꽃』을 중심으로」, 『國際言語文學』, Vol.-No.38, 2017, 311쪽) 존재 증명이라는 기능이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지는 않으나, 이는 국가가 국민에게 있어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준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10년을 기점으로 첫째, 둘째 기능 모두 불능상태가 되어버리고, 이제는 상실된 국가의 이민노동자들은 국가에게조차 기댈 수 없는 국면을 맞이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국가’라는 거대한 상징체가 소멸해가는 과정이, 이종도가 일포드호에 탑선한 이후의 생애와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이종도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멕시코에 도착했으며, 대한제국에 무의미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근근이 연명한다. 아들인 이진우는 같은 한인을 착취하는 통역이 되고, 이연수는 제 한 몸 던져 살길을 모색한다. 그리고 끝내, 이종도는 부인에게조차 버려진다. ‘아버지’라는 개념이 가족 내에서나, 한국문학에서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비참한 결말은 이전에 역사를 중심적으로 구성했던 거대 담론의 퇴락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국가라는 중심체제가 무너진 가운데, 디아스포라들은 체념의 내리막길 속에서 각자의 선택을 실행으로 옮긴다. 그 선택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인물은 연수와 이정이다. 이정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신대한을 건국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탁했던 기존의 국가가 사라진 대신, 최소한의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들의 국가는 탈근대적이고 탈식민지적이라는 면에서 분명한 의의를 지니지만 이정이 예견했듯 신대한은 대한제국과 똑같이 파멸을 맞이한다. 이러한 결말에서 작가가 국가에 대해 취하는 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의 국가에 대한 사유는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국가도 허상에 불과하며, 이상적인 국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검은 꽃과 다름없다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윤애경, 앞의 책, 314쪽)

 그에 반해 연수는 ‘국가’라는 거대 담론과는 거리가 먼 여생을 보낸다. 박정훈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그녀는 유흥가의 거물로 성장해 어떤 자선사업도 벌이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의탁하지 않고, 오직 갈퀴처럼 돈을 긁어 들이는 일에만 전념했다.”(김영하, 『검은 꽃』, 문학동네, 2003, 366쪽. 앞으로 본 텍스트에 대한 서지사항은 인용 쪽수만 표시한다.) 그녀는 식민자본주의의 희생자에서 거대 자본을 지닌 큰손으로 변모한다. 연수는 생존한 다른 한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결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가 ‘보호’나 ‘존재 증명’의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족적을 남겼다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야만적 순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국가가 수행해야 할 기능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 이는 식민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구조 내에 어떠한 숭고한 이성의 논리도 들어설 여지가 부재함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윤애경, 앞의 책, 306쪽)


 결국 조선인 이민노동자들의 결말은 내게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국가의 상실을 마주하고 각자의 선택을 꾀했던 조선인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한 이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종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연수였다. 연수의 사례는 방어벽을 상실한 디아스포라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자본 시장에서의 비대한 실패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연수 역시 박정훈이 남긴 유산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 자산이 있는 상황에서 연수는 국가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도, 조선인들 간의 결속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것들이 더 이상은 그리 유의미하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책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00년대와 이 책이 쓰인 2000년대의 연관성이다. 신자유주의가 중심이 된 사회에서 이연수와 같은 인물은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양상인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2000년대에, 구성원들 각자는 연수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힘을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키고 나아가 폭력의 확대에 가담하는 태도를 취한다.(권혜령, 「신자유주의 시대 구조적 폭력의 한 양상 — 2000년대 이후 노동법제의 변화와 노동기본권의 위기를 중심으로 —」, 『社會法硏究(Studies of Socisl Security law)』, Vol.0 No.41, 2020, 74쪽) 그들은 기업의 경쟁논리를 수용하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생존의 목적)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경영한다(존재 증명의 방식)(권혜령, 앞의 책, 83쪽)는 점에서, 자신이 소속된 집단 혹은 사회에 보호와 존재 증명의 기능을 의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공동체 개념이 더 이상 80년대만큼 중심 담론으로 기능하지 않는 사회는 1900년대 국가가 상실된 이민노동자 사회와 유사성을 띤다. 1900년대와 2000년대의 사회 구성원들이 그러한 경향을 띠게 된 것은 각각 식민지화와 세계화로 다른 원인을 갖지만, 2000년대의 국가가 신자유주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조성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착취당하는 국민을 보호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은 국민이 기존에 기대했던 국가의 역할이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국민이 국가에 기대하는 역할이 어느 정도 변화했을 것이라는 점도 감안해야겠으나, 여기서는 <검은 꽃>의 등장인물들이 국가에게 기대했던 역할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하겠다.) 100년 전의 이민노동자 사회와 100년 후의 한국 사회의 이러한 유사성은 『검은 꽃』이 2003년에 쓰일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로 자리했을 것이다.


 생존과 부의 축적만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경제적 존재로 구성된 사회에서 정치적 시민권의 약화, 보편적 평등과 자유, 민주주의 원칙의 쇠퇴는 당연한 결과다.(권혜령, 앞의 책, 81쪽)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고, 이연수의 성공 모델을 재고해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폐해, 문제의식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토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것을 소화하는 데에 실패한 사회 구성원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의 노동 실태를 고발하는 논문들이 즐비하다는 사실, 「큰 늑대 파랑」(2006)를 비롯하여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 속 피해자의 입장을 고발한 작품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무엇보다 김영하가 『검은 꽃』을 썼다는 사실에도 신자유주의로부터의 노동 착취 구조에 관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는 어떠한 이상향도, 희망적 결말도 내놓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불식하자면, 연수의 결말은 자본주의의 당위성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의 사회 구성원들이 꿈꾸는 성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연수의 결말은 오히려 현대 사회를 자조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앞서 식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다양한 사건을 통해 고발한 그가, 결국 그로부터 탈피하는 방책이 자본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영하 작가가 끝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실패자인 김이정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속 국가 담론에 대하여 가장 깊은 사고를 보이는 주체인 동시에 작가의 인식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김이정은 국가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무정부주의자의 급진적 입장이나 국가가 개인을 선택한다는 국가의 위협적 담론 등 다양한 국가론을 접하면서 자신이 거쳐 온 그 어떤 나라도, 심지어 혁명군 비야의 진영마저도, 그가 바라는 궁극의 정체는 아니었음을 확인한다.”(윤애경, 앞의 책, 312쪽) 그는 결국 실패했던 국가론으로 돌아간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동시에,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신대한인’으로 살았다는 ‘존재 증명’을 하게끔 만드는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그의 선택에서 디아스포라들의 욕망, 나아가 2000년대에 착취당하는 국민들의 욕망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국민을 온전히 보호하거나 증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지하는 동시에 여전히 그러한 기능을 기대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개인은 결코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과 동등하게 대결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개인이 초개인적인 거대 담론과 맞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에 가까우므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집단인 국가에게 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국가란 ‘검은 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착취당하기를 거부하고픈 국민들의 욕망을 대변한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오혜진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1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현대소설의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여성의 욕망에 대한 무관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