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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 월경越境이라는 내면화된 충동

『리나』속 월경 과정에서 드러나는 리나의 학습과 모방, 체화를 중심으

 “리나는 갑자기 뱃속 저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둥둥둥 북소리를 들었다.…(중략)…리나는 북소리를 들을 때마다 낯선 나라의 도시 한가운데로, 뜨거운 사막으로, 심지어 다시 국경으로 나가 서 있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달싹거렸다.”(강영숙, 『리나』, 문학동네, 2011, 149-150쪽. 이후 본문 인용 시 쪽수만 표기.) 리나는 봉제공장 언니와 창녀촌에서 탈출에 관해 논쟁하다가 북소리로 형상화된 충동을 느낀다. 국경으로 가고 싶은 충동, 그것에 반드시 그 국경을 넘어가고 싶은 충동까지 포함되어 있는지를 이 몇 문장만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국경’은 반드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는 아닌 듯하다. 리나가 반복해서 북소리로 느끼는 충동은 ‘현재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충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 전반에서 리나는 떠날 수 있는 타이밍이 찾아왔을 때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넘어 다른 곳을 향해 이주했다. 설령 그곳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심심하고 지저분한’(313) 곳일지라도.


 리나의 뱃속 소리가 아니더라도 ‘북소리’ 자체는 앞서 여러 번 등장했었다. 아직 가족과 헤어지지 않았을 당시 단체로 설사병이 났을 때, 리나는 절제할 수 없는 배의 신호를 두고 ‘북소리’라고 표현했으며(37), 화공약품 공장의 네모반듯한 남자가 데려간 축일 행사에서 누군가 친 ‘북소리’는 남자들을 흥분시키기도(64) 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맥락상 관련이 없는 듯하고, 유의미한 ‘북소리’는 천막의 여가수 공연에서 발견된다. 북소리는 여가수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데에 쓰였는데, 그 공연을 모방한 리나는 가수로 변장한 채 돈을 끌어모은다. 리나의 공연은 매번 자신의 탈출기를 다르게 변주한 새로운 거짓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전개에서 알 수 있듯, 리나의 삶은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공연이 열리듯 거짓과 위장으로 존속된다. 그러니 리나 뱃속의 북소리가 곧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라면, 그것은 삶의 이동과 새 시작을 원하는 충동의 발현인 것이다.


 여가수를 모방한 공연, 북소리를 모방한 북소리. 이러한 모방의 형식은 여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리나의 삶 전반에 나타난다. 리나는 이주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생존의 방식을 학습한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교환 논리에 종속된다는 사실과, 여성의 신체가 판매되는 방식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해 자신의 생존에 적용한다. 리나는 이주 여성으로서 자신이 이동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그것이 자신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을 배웠다. 리나는 네모반듯한 남자와의 일, 창녀촌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타의적 성애화를 체험했으며, 이후 살아남기 위해 봉제공장 언니와 함께 자의적 성애화를 시도한다. 그렇게 여성의 이주 방식은 성적 대상화를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일원화된다.


 리나의 체험은 리나가 남녀 간의 성애를 모두 자본적 논리 하에 귀속하도록 만들었다. 역으로 말하면 자본이 개입되지 않은 남녀 관계는 리나가 성애적 관계로 정의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리나에게 있어 자본과 무관한 이성 관계는 ‘삐’와 도시에서 만난 ‘남자애들’과의 관계인데, 리나가 그들과 관계하여 선택한(하게 된) 역할은 성애 대신 ‘모성’이다.(물론 ‘삐’를 두고 누구냐는 물음에 ‘아들’이라고 대답한 것은 위장에 가깝기는 하나 나는 그럼에도 그것을 리나의 내면적 혼란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했다.) 왜 하필 모성이었냐 묻는다면, 리나가 모성적 사랑을 ‘자본적 대가가 없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고, 모자 관계야말로 해체 불가능한 관계라는 인식에서 기인했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반면에 남녀 간에 성립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계인 ‘부부’는 얼마든지 해체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리나가 목격하고 학습한 바에 따르면, 화공약품 공장에서 유부녀들은 본인의 기혼 여부를 얼마든지 무시당했다. 물론 모자 관계 역시 강제적인 힘에 의해 물리적으로 떨어질 수는 있겠으나 관계의 존립 자체는 무력화될 수 없고 변하지도 않는다. 이는 제도화되지도, 자본화되지도 않은 원초적인 관계 맺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엄마라는 역할을 자처한 행동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에서 출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리나가 가족과 만났을 때 그들의 품에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리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너무 많았다.”(86) 리나가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가족의 품’이었지 ‘가부장적인 제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나는 일관된 태도로 소설 내내 어떠한 제도나 규율에 잠깐의 정거는 해도 온전히 정주하지는 않는다. 리나와 삐가 경제자유구역에서 ‘부부’로 행세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부 놀이’에 그치는 까닭도 제도 안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태도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리나가 계속해서 동행하기를 바라는 ‘삐’와의 관계를 ‘모자 관계’로 설정한다면 어떠한 제도적 뒷받침 없이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분명 리나의 내면화된 학습에 기인한 한정적 사고방식이지만, 한편으로는 ‘혈연’에 기반한 모성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기도 한다.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출 후, 리나는 행동을 통해 많은 이분법들을 무화시켜 나간다. 가장 눈에 띄는 몇 가지는 주체와 객체 간의 탈경계다. 리나가 항상 ‘팔려가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같은 고향 사람을 ‘사는’ 입장에 서보기도 하고, 스스로 ‘팔리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자의적 성애화와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한편, ‘성 구매자’였던 네모반듯한 남자와 퍼즐 오빠, 뚱보를 살인하는 행위를 통해서는 기존의 주객 관계를 아예 전복시켜 버리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살인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비극적 연대가 관찰된다는 점이다. 항상 ‘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여자 셋이서 남자들을 살해한다는 점이 공통적인데, 여기에는 같은 고향 사람인 ‘할아버지’와 같은 여자인 ‘미쌰’를 살해해야지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식 경쟁적 생존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극단적이고 잔혹한 해결 방법은 리나가 학습하고, 반복함으로써 체득한 것이다. 정당한 방식으로는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비정함. 그게 리나로 하여금 반복해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살인은 탈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퍼즐 오빠와 뚱보(동생이긴 했으나)의 재등장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심지어 미쌰는 재등장에서 배제되기까지 한다. 그들의 등장에도 리나와 여자들은 잘 적응해 클럽을 꾸려나가지만, 비극은 언제나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그렇게 탈출은 또 다른 탈출로 이어지고, 리나의 탈출은 유랑의 형식이 된다. 학습된 탈출은 반복되고, 모방이라는 심화된 학습이 되며, 리나는 탈출을, 나아가 유랑을 체화한다. 그러한 까닭에 리나 내면의 북소리는 가장 뿌리 깊은 충동이자, 체화의 결과물이다. 탈출은 리나가 학습하고 체득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하여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리나도 알고 있지만,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이제는 돈만 벌면 돼. 돈을 벌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다 잊을 수 있어.’”(271) 리나는 돈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클럽에서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은 리나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공중 분해된다. 열기에 의해 ‘흰 재’가 되다니. 리나의 자본은 언제나 이렇게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다.


 “그들의 운명은 인솔자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리나는 얼굴색이 검고 윤곽이 뚜렷한 인솔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운명적으로 사랑할 남자를 만나게 됐다고 기뻐했다.”(13) 이후의 행보를 보면, 리나가 사랑하게 된 것은 ‘영원히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갈 운명인 것 같은’ 인솔자보다는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갈 운명’ 그 자체인 듯하다. 그러나 리나가 유랑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운명은 만들어진 것이다. 리나가 살던 나라로부터의 탈출에서 시작하여 이주 과정에서 겪었던 신자유주의에 관한 학습, 모방, 반복을 통한 체화. 그렇게 신자유주의가 몸에 새겨짐으로써 리나의 운명이 일부 결정지어진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예전의 흉터 없던 말로는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77) 이 대목에서 드러나듯 이미 사회적 유랑을 체득한 리나는 돌이킬 수 없다. 북한으로 추정되는 자국으로 돌아가 자유를 상실하거나, 계속해서 유랑하는 것이 이주 여성 리나에게 주어진 선택지였고,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리나는 후자를 택하여 운명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비극적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리나의 탈출기를 살펴보면, 첫째는 국가적 구속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두 번째 탈출은 화공약품 공장으로부터의 탈출, 즉 성 착취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가부장제로부터 탈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리나가 선택한 진짜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에는 P국의 환상적 이미지의 현실로의 강등이 있었으며 리나의 의식은 더 이상 P국에서 정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게 되었다. “난 꼭 P국으로 가고 싶지도 않아. 그냥 아무 데서나 살아도 돼.”(182)라고 하며 오로지 북쪽 나라로 돌아가는 것만을 거부하는 리나의 태도는 그저 이주만을 목적 그 자체로 삼는 듯하다. 특기할 점은 거기에는 어떠한 환상적 기대도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냥 지평선에 지나지 않는’(354) 국경을 넘나들며, ‘우리가 알아서’(182) 살기를 원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이주에 있어 리나가 언제나 욕구하는 조건은 ‘우리’, 즉 ‘동행’이다. 리나는 소설 내내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연대의 필요 이상으로 공동체 그 자체를 욕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설마 너 저 사람들을 다 P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겠지?”(149) 하고 묻는 봉제공장 언니가 일견 보통 사람이다. 이주에 방해가 될지언정 동행을 포기하지는 못하는 리나는,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환 가치’가 중시되는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논리 역시 횡단하고 있다. 여기서 리나의 사회적 유랑이 단지 신자유주의의 비극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가 발견된다. 게다가 리나가 꾸린 공동체는 처음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가장 오랜 기간 함께 한 ‘삐’와는 특히 그랬다. 그러나 둘은 언어 대신 ‘몸’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국적이 가장 쉽게 드러나는 부분이 발화를 통한 ‘언어’라면, 둘의 관계는 국적을 탈경계화했다는 점에서 더욱 유의미해진다.


 그러나 동행은 시대의 흐름 속에 끝까지 유지될 수 없었다. 리나는 할머니도, 봉제공장 언니도, 마침내 삐도 잃고 또 다른 국경선 앞에 홀로 선다. “리나는 운동화 끈을 풀고 신발을 벗은 채 초원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면서 옷을 벗었다.” 국경을 넘고, 운명을 지탱해야 하는 것은 리나의 ‘몸’뿐이다. 사회적 유랑을 체화한 몸, 둥둥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충동을 간직한 몸. 리나는 다시 ‘국경을 향해 달리며’ 유랑을 운명으로 삼고 지속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리나는 지금껏 여정을 동행해온 사람들 역시 체화한 채 만들어진 운명을 홀로 지탱해나갈 것이다. 주체적이면서도 객체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면서도 신자유주의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그 방식에 시대를 초월한 월경은 없다는 점은 씁쓸함으로 남지만, 리나는 그저 주어진 시대를 허벅지에 새기며 계속해서 월경할 것이다. 그 시대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리나의 삶이란 분명 비극적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리나의 예측불허한 삶이 비극적인 인생의 표상마저 월경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 바람은 독자인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오혜진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1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현대소설의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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