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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상실, 공산주의 언어의 한계

보리스 그로이스의 이론으로 『일곱 해의 마지막』 읽기

시인 백석은 북한에서 시를 쓰지 못했다. 본인이 한 말대로, 시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를 쓰지 못했다는 말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것은 당신의 노쇠함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사회에서는 시라는 것이 쓰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곳(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7%. 이후 인용은 작가와 E-book 퍼센트만 표기)에서, 그는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자신의 시가 안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것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보내져야 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시의 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가 도달할 수 있는 물리적 장소조차 한계가 있었고, 끝내 모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석의 공책은 다름 아닌 북한의 문학인 병도의 손에 불태워졌다. 규범이 되는 세계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해서 배제되는 세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얼마나 비문학적인가.


작품 속 백석, 즉 기행은 예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아동시는 배격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무지한 기도를 아동시는 타기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김연수, 43%)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용되는 시란 어땠던가. 누구나 예상할 법한 어떤 이유로 뜨거웠을지는 몰라도 특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배격당하는 특성이었으리라. 북한에서 쓰인 수많은 시들은 오로지 한 길목에 놓인 가지런한 벽돌이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백석이 당면한 이러한 문제적 상황에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백석이 쓰는 언어는 왜 그렇게까지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는가. 나아가 예술적 언어란 무엇인가.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김연수, 77%) 이와 같은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백석을 비롯한 북한의 많은 문학가들은 언어를 세계 그 자체로 여겼다. 그리고 그 세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리얼함’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하는가를 의미한다. 문학가가 조립한 언어의 세계는 공산주의가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 사회의 모습을 구현하는가. 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토록 언어를 중시했는가? 이는 앞서 백석의 언어가 왜 위협받았는가에 대한 질문과도 이어지며, 나는 이 질문에 보리스 그로이스의 이론이 담긴 『코뮤니스트 후기』를 통해 대답하고자 했다. 


보리스 그로이스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언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보리스 그로이스, 김수환 옮김,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 지성사, 2017. 82쪽. 이후 인용은 작가와 쪽수만 표기) “언어는 사회 구성원들 모두를 위한 단일하고 일반적인 것이 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또 그를 위해 존재한다.”(보리스 그로이스, 78) 겉으로 보기에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고 사람들을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단합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었던 언어는 그렇게 공산주의 사회의 통제 질서가 되었다. 그러나 ‘통제’는 총체성에 부합하는가? 통제는 그 규범 외의 것들을 배제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공산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추구하는 총체의 논리는 어떠한 대안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을 급진적인 일면성으로 간주하고(보리스 그로이스, 62) 그것을 총체성의 대척점에 위치시켜 버리지 않았나? 백석이 시를 쓸 수 없었던 이유도, 그의 시가 통제당하고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총체의 논리에 근거하여 그의 시가 어떠한 급진적인 일면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애초에 급진적 일면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소련의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는 일면성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급진적인 일면성을 발휘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언어가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인 동시에 사회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언어가 갖는 초월적 지배력에 있었다. “이 지도부가 공식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그토록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투여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일탈에도 그토록 격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어 바깥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점, 그리고 만일 언어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면 모든 걸 잃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보리스 그로이스, 15) 그러니 언어의 통제력은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백석으로 돌아가, 백석의 내외적 갈등은 북한 사회가 보여주는 그러한 모순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인이 무서워 시인을 통제하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배격하는 비총체적 질서화의 현현인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 사회가 “사적 이해와 공적 이해가 근원적 동일성”을 가지는 사회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개인과 사회 간의 구분조차 그곳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제부터가 성립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해’란 돈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겠지만, 꼭 돈뿐만 아니라도 사적 욕망과 공적 욕망 간의 차이는 공공연하다. 개인은 고유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사회는 이상적 질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의 세계가 물질화된 언어를 통제하는 것은 근원적 차이를 강제적으로 제거하려는 폭력이다. 백석뿐만 아니라 많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예술적 자유를 억압받은 예술가들은 모두 폭력의 희생양이었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김연수, 77%) 『일곱 해의 마지막』 속 기행의 이 말은 언어의 기능이나 통제력, 효력 따위가 아니라 그 고유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언어는 분명 힘을 갖고 그 힘은 어떤 체제의 사회냐에 따라 달라진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언어가 곧 전부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언어는 상품화되어 그 고유의 힘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어떤 체제이든 간에, 언어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음으로써 미가공된 가치를 보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로부터 어떠한 가치를 생성하고, 부여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 아닐까. 백석은 그렇게 무한히 생성되는 다양성의 세계가 바로 예술적 언어, 문학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언어로 언어를 통제하는 바로 그 세상이 수많은 언어의 상실을 낳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원인으로 다름 아닌 공산주의 언어의 한계를 지목하고자 한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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