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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종규 Aug 23. 2016

내 새 꿈의 시작점, 프라이부르크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 그 계기가 된 시점을 되돌아본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설정한 꿈은 선생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교사 발령이 나는 시절 대학을 다녀서 쉽게 교사가 되었다. 교사 생활을 3년을 넘기고 있었을 때다. 대학교 선배인 윤성효 교수로부터 대학원 공부를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대학원 공부가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 과정까지 이르러버렸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참고 자료가 필요하였고, 부산대학교의 연구도서관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간절히 외국에 나가고자 하였더니 마침 독일에 '반년 간', '8주 간' 체류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반년 간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선발되었다. 휴직을 하고 독일 남부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 박사전 연구원 자격으로 반년 간 있었다.


프라이부르크 알테쉬타트(고도시) 거리


광물암석지화학연구소 소속으로 첫날 연구소의 마스터 열쇠를 받았다. 몇몇 고가 장비가 있는 방, 교수연구실을 제외하고는 그것으로 모두 열렸다. 연구소의 2층에는 교실 3개 크기의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에는 '지질학'에 관련된 책만 있었고 내가 참고하고자 하는 논문은 거의 다 소장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에 들러 논문을 찾아서는 복사를 하곤 바로 내 연구실에 틀어박혀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집에서 또 그것들을 읽었다. 연구소의 도서관, 연구실, 집으로만 왔다 갔다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과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읽고 싶은 논문을 실컷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의 개방형 서고


한번은 거기로 유학 온 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내가 있는 연구소 이층에는 '지질학' 도서관이 있는데 이와 같이 한 가지의 전문 영역으로 도서관을 꾸며 둔 것을 보니 너무 놀랍다고 했더니 자기가 연구하는 '화학' 영역의 도서관이 프라이부르크 시내에 일곱 개나 된다고 하였다. 인구가 겨우 20만 밖에 되지 않은 이 도시에 그런 식의 도서관이 무려 200개나 된다고 하였다.


프라이부르크 뮌스터 앞에서는 오전에 장이 열린다.

몇 달이 지나니 도시의 환경이 조금씩 익숙해져서 오후에는 도시의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살던 집에서 일 분도 걸리지 않은 곳에 작은 자연사박물관이 있었다. 관심이 가는 분야기 때문에 내가 자주 들른 곳이다. 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냥 죽 둘러보다보면 관람자는 있는데 박물관의 직원인 듯한 사람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관람료도 없었다. 문 입구에 작은 항아리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동전과 지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관람자가 자발적으로 관람료를 내는 것이었다.



프라이부르크에는 도서관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집 옆 자연사박물관과 같은 규모의 박물관, 전시관도 많았다. 독일의 아이들은 이런 훌륭한 시설들에서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와서 볼 수 있었다. 들어가고 싶은 대학이 있으면 줄만 서면 된다고 한다. 그들의 말로 '봐르테 리스트( warte list)'라고 하였다. 대학 입시라는 것이 없고 대부분 오전 수업이며, 사회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맘껏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아이들과 비교가 된다. 학교가 마치기 무섭게 학원차를 탄다. 늦게까지 학원에 있다 보면 다른 곳에는 들를 시간도 없이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오면 금방 지친 몸을 눕혀야 한다. 다음 날도 같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니 과제라도 있는 날에는 늘 잠이 부족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번은 내가 기거하던 방의 주인 아줌마가 함께 어디를 가자고 하였다. 어떤 단체가 프라이부르크 시청의 복도에 책상 하나를 놔두고는 프라이부르크 시내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강좌를 소개하고 접수를 받고 있었다. 시민 대학이라고 불렀다. 오후에는 거의 빈 곳이나 다름없는 학교 등의 공간을 이용하여 강좌를 개설하고 시민들에게 각종 강좌를 싼값에 제공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500개는 되는 듯한 강좌가 있었고, 거기에는 '한국 요리'도 있었다.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반년을 머물렀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새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박물관을 만들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만들 것이다. 나는 평생학습원을 만들 것이다. 이 세개의 꿈만 이루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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