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요한 Jul 14. 2021

완성과 유한함

 삶을 살다 보면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시험을 볼 때면,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할 걸,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지 말고 집중할걸.’처럼 말이다. 목표는 높고 욕심은 많은데 몸은 침대에 누워 있다. 상상 속의 나는 관중이 가득한 단상에 올라서서, 자신이 경험한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몸은 침대에 누워있다. 자신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기는커녕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쾌락에 자신을 맡긴다. 


 공무원 시험을 포기한 후, 나는 약 2달간을 위의 글처럼 살았다. 하루에 하는 일들은 정해져 있었고 어려움이 없었다. 점심이 다된 오후에 일어나,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본다. 그러다 졸리면 다시 잔다. 일어나니 허기가 진다. 밥을 다시 먹는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본다. 시간은 새벽을 지나 아침 7시가 된다. 어머니는 출근을 위해 씻으시지만, 나는 졸리기도 하고 어머니와 마주칠 자신이 없기에 잠을 청한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 그렇게 악순환을 지속했다. 그러다 문뜩 생각이 들었다. ‘실패도, 고통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세상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의 어머니, 친구들도 항상 행복할 테니 말이다. 때로는 무슨 신바람이 불었는지 내가 정치계에 입문해 슈퍼루키 정치인으로 주목받아 대통령이 된 뒤, 세상을 바꾸는 상상을 밤새 내내 한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러 날 동안. 


 유튜브는 정보가 흘러넘치다 못해, 범람할 정도다. 한 영상을 보면 영상 밑에는 연관 동영상들이 제시된다. 유튜브를 튼 이유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심심하기 때문이므로 무슨 영상을 볼 것인지 특정한 목표와 기준은 없다. 그렇기에 제시된 연관 동영상 목록을 보고 자극적인 제목이나 섬네일이 있는 영상을 본다. 


 인간에게 해가될 될 수 있는 빅데이터는 내가 여태 동안 봤던 영상을 분석해 새로운 영상들을 추천한다. 새로운 영상을 하나씩 눌러보다 보면 또다시 나의 유튜브는 새로운 영상으로 업데이트된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관련 동영상만 찾아 본다면 유튜브는 우리의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물을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범람하는 유튜브 물결에 잠식되고 만다. 운이 좋게도 잠식되기 직전에 나는 조던 피터슨(Jodern. B. person)교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우리의 삶과 의미에 대해서 강연하는 교수인데, 미국을 비롯한 유럽사회에 굉장히 영향력이 있다. 나는 조던 피터슨 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내 삶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내 글을 읽다 보면 조던 피터슨 교수와 <<축의 시대>> 영향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적 존재가 바랬든, 우리가 진화를 이루면서 프로세스가 입력됐든, 우리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지 지옥으로 만들지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우리 세상에서 천국을 볼 때도 지옥을 볼 때도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무한한 세상을 완성하려 한다. 그 과정 속에 우리의 삶은 고통과 슬픔, 질병, 후회, 아쉬움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완성이 꼭 좋은 걸까.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 총 12년 동안 수학능력시험을 위해 학교에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수능을 보고 나면 마음이 허무하고 허탈하다. 수천, 수만에 다다르는 퍼즐을 완성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내심 뿌듯하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하다. 완성은 끝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유토피아가 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유토피아이므로 이런 허무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유한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유한함은 우리에게 가르침과 교훈을 준다. 유한하기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자신에 대해 더 고뇌하게 한다. 만족과 감사함을 알게 하는 게 유한함 아닐까. 물론 영원하고 불변한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근데 나는 영원과 불변이 꼭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런 삶은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그런 삶은 자유가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유한함이 없는 곳을 상상할 때 행복함과 웃음이 넘치는 세상이고, 동물이 뛰어다니는 삶이 떠오른다. 수많은 스포츠카, 대저택이 있고, 경제적 문제에 대해 걱정 없는 삶이 떠오른다. 


 그렇게 천국과 유토피아를 동일 시 한다. 일시적으로는 유토피아가 좋을 수 있다.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본능적인 충동과 쾌락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지 않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신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려면 상대방에게 양보와 절제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재할 절대자도 필요하다. 천국에서 가능하다는 의견에는 답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가능하다는 의견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겠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통해 이러한 헛된 이상에 대한 결과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발전과 미래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더욱더 발전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다. 사회에 대해 예측이 쉽지 않으므로 불가변성에 대해 반대한다. 다만 유토피아에 대한 급진적 이상, 탐미주의는 우리를 폭력과 압제 속에 빠지게 하므로 이를 우려한다. 


 나도 이 세상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몸으로 느낀다. 어린 시절 나는 분노와 불만의 집합체였다. 많은 게 억울했고, 모든 사람과 상황은 마치 나를 괴롭히고 파괴하기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감사하고 있지 않은지,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지 보지 않았다. 감사한 것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분노 때문에 살아갔었다. 그래서 더 큰 권력, 명예, 돈을 원했다. 행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내 삶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항상 배고파했을 뿐이다. 위로 보면 부족하지만 아래를 보면 남는다는 것을 몰랐다.


 무한하고 아름다워야만 하는 유토피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과연 유한함은 불행과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내 욕망이 좇는 것을 만족해하지 않는 것일까. 본인만 아리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선(善)과 악(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