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하’라는 굉장한 영화가 있다.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지속적해서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존재에 대해서 항상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어릴 때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 내 이름이 ‘요한’임을 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나는 유아 세례를 받았고, 어머니와 함께 주말마다 교회도 갔으며, 집안 곳곳에는 성화와 같은 기독교 물품이 즐비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태교로 성경책을 암기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중학교 때부터 기독교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삼촌뻘 되는 아저씨들이 음료수와 빵을 줄 테니니 자신들도 같이 껴서 하자고 했다. 우리는 인원도 적었고, 나쁠 게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결정적으로 음료수와 빵인데 누가 거절하겠나. 공짜인데 말이다.
재밌게 차던 중 사달이 났다. 나는 당시에 승리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과 공놀이를 할 때면, 항상 친구에게 나무랐다. 내 잘못은 관대하게 대하고, 친구에게는 엄격하게 대하는 정말 나쁜 태도를 보였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삼촌 중 한 분이 경기휴식 시간에 나를 따로 불러 질타했고, 나는 상관 말라고 했다. 나의 잘못된 태도였다. 공손하게 얘기했어야 했었다. 그분은 나를 팼다. 일방적으로 맞았기에 팼다는 표현을 썼다. 경찰이 왔고 사건은 일단 ‘락’됐다.
이후 무슨 고집이었는지 폭행에 대한 합의를 엄마가 아닌 내 스스로 진행했다고 선언하였다. 당시에 나의 잘못이 배경이 되었기에 진정성 있는 사과가 있다면 합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신생 개척 교회의 전도사였는데, 모든 잘못에 대해 사탄을 탓했다. 자신이 폭행을 가한 것은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이다.’라는 변론이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탄은 사탄이고 인간은 인간이지 않던가. 유혹을 받았다 해서 인간의 행동이 온전히 용서받고, 면죄 받을 수 있던가. 그때부터 나는 기독교 그리고 교리에 대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경은 전 세계의 베스트 셀러’라는 길거리 전도사의 말에 반응했다. 성경책을 사서 두께를 보니 다 읽을 자신은 없었다. 그대신 유튜브를 틀어 영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목사들이 말하는 사역(事役) 영상을 보고, 간증 영상을 찾아보았다. 수많은 성경 속 이야기 중에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나는 두 이야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 인간에 대해서 사유(思惟)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야훼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뒤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다. 신은 모든 걸 허용했지만 단 하나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인 무화과는 먹으면 안 된다는 금기였다. 사탄이자 뱀은 하와를 유혹해 무화과를 먹게 했고, 그 결과 야훼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했다.
신(神)이라 하면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예측 가능할 터인데 왜 지켜보았을까 궁금했다. ‘그날은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놓친 것일까, 선택의 실수일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인간에게 고통, 노동, 죽음의 시작이었지만, 자유와 행복의 시작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 살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산속의 토끼마냥 먹고, 자는 동물이었을 뿐이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포식자의 사냥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자유가 어디 있겠는가. 잡아먹힐 운명만 존재할 뿐이다.
성경 속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써 이를 구분해야 하는 숙명에 놓이게 됐다. 구분하지 못하면 벌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되고, 현명하게 구분하면 상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된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운명을 부여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제도, 시스템으로 견책하기 위해 사후세계 개념을 통해 인간에게 현세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악으로부터 나오는 행복함을 느낄 수도 있고, 선으로부터 나오는 행복함 또한 느낄 수 있다.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교리를 상황에 따라 해석을 할 수 있다. 해석은 우리에게 지침이 된다. 우리가 법(法)을 통해 어느 정도의 선(線)을 긋고 난 뒤, 해석과 판단을 하고, 그 선(線)을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선악에 대해 알게 하는 열매는 우리가 토끼처럼 연약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살게 하지 않는다. 사자와 같은 강한 포식자가 되어 토끼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토끼와 공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줌으로써 우리가 변화하며 더 옳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즉,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을 입맛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신의 개입과 사후세계가 존재하지만, 지금 우리의 세상은 우리가 구성하고 만들어 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노예제도, 파시즘-공산주의의 학살 등과 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사바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줬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태어날 때 다리 한쪽을 절게 되어 고통 속에 살게 된다. 주인공의 쌍둥이 동생은 겉모습이 악마와 같기에 집 밖 창고에 평생 갇혀 살게 된다. 영생을 꿈꾸는 미륵과 그의 수하의 맹목적 충성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선천적 장애와 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게 되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는 불멸의 꿈 꾸는 미륵 때문에 수하는 살인을 마다치 않는다. 수하는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는 소년수인데, 미륵 덕에 삶의 목표를 갖게 되지만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 영화 속에서 미륵은 천의 모습을 가진 악이다. 악이 선인 척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살인과 폭력적인 행동, 언행은 온전히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자신이 영생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호언장담한다. 그가 왜정시대 때 행한 애국적인 행동, 해방 후에 행한 이타적인 행동이 뒷받침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살인들은 이를 반증하기도 한다. 그의 손가락은 6개이다. 보통 사람의 모습과 다르기에 그는 다른 존재로 여겨진다. 시각적이고 실존적인 증거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기에 호기심을 해결 해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그래서 그를 본 이들은 그를 숭배하고, 이 시대의 미륵으로 여긴다. 그는 신(神)이 되고, 선(善)이 된다.
돈을 밝히는 종교인으로 상징되는 무당이 주인공이 사는 동네에서 일어난 구제역 해결을 위해 굿을 치른다. 무당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기운이 발산되는 동생이 갇혀 있는 창고로 간다. 악으로 상징되는 뱀이 무당을 문다. 뱀이 무당을 무니, 쌍둥이 동생의 존재는 더욱더 악하게 나타나 진다. 쌍둥이 동생은 악으로 여겨진다. 동생의 존재 때문에 주인공이 장애를 갖고 태어나듯이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피해를 본다. 영화 장면을 설명하며 글을 더 쓰면 좋겠지만 줄거리는 여기서 멈추고, 설명하려 한다.
우리의 모습도 다리 한쪽을 절게 되어 고통 속에서 사는 주인공과 같지 않을까. 세상은 고통, 죽음, 슬픔, 비극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면 회의주의, 비관주의, 허무주의에 갇혀 무의미하고 우울한 삶만이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지 못한 채 고통과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악은 악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선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선이라는 존재는 형태와 모습을 알 수 없기에, 나타나도 선인지 모르기도 하고, 악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법(法)을 통해 선과 악이라는 관점을 볼 때 도덕적,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의 지침인 마냥 행동할 때가 많다. 법은 넘지 말아야 할 선과 규칙을 강제력과 합해 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 세종은 부민 고소금지법을 제정했다. 노예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게 만든 법이다. 과연 이 법이 옳은 행동의 지침일까. 잘못된 제도 속에서 합리화된 법이다.
교리에 대한 교조주의는 양날의 검이다. 되돌아봤을 때 교리에 따라 행한 일이 악이었고, 악이었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선인 삶 속에서 살아 왔다. 구분이 쉽지 않다. 교조주의적 행동이 사회의 자양분을 제공하고, 사회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교조주의 때문에 잘못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대체로 비판에 민감한 교조주의 성격 때문이다.
미륵의 수하는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왔고, 삶의 이유를 미륵의 말과 경전으로부터 찾는다. 그가 행하는 살인과 매일 밤 찾아오는 어린아이들의 망령에 대한 죄책감, 고통을 자신 삶의 목표를 정하고 이룸으로써 극복하고 나아간다. 이렇듯 신앙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교조주의는 양날의 검이다.
영화 속 쌍둥이 동생의 주위에 뱀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교조주의 그리고 선과 악 양쪽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야 한다. 뱀에 대해서 알고, 상황에 맞게 행할 수 있다면 악은 선이 된다. 만약 산속의 토끼와 같았다면 당신은 선할 수 없다. 악에 당하는 일만 존재할 뿐이다. 선과 악을 구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선을 행할 수 있다. 동생이 선한 존재이지만 악이라는 뱀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선과 악을 성경에서 찾기도 하고, 불교 경전에서 찾기도 한다. 어디서 찾든 자신의 자유이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점은 자신이 옳다며 남을 탄압하는 데 있다. 건전한 토론과 발언의 자유는 자신의 종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타인의 종교와 경합할 때도 보장되어야 한다. 신의 뜻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경전 속 많은 이야기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다. 이야기라는 예시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가정, 헤쳐 나온 환경, 상황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개괄적인 내용은 스스로 깨닫고 자신에게 맞게 적용해야 한다.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게 복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같지만 속에서 이루어지는 각각의 행동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은 칠흑같이 어두운 삶 속에서, 온전하지 못하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를 먹음으로써 우리의 자유는 시작됐다. 우리는 쌍둥이 동생이 되기 위해, 사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 경전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기도 하고, 표현의 자유이기도 하다. 수많은 자유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그에 대해 책임지고 다시 나아가는 ‘자유-책임’ 구조는 우리에게 불행일 수도 있지만, 축복이기도 하다.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 있다. 악을 생각하면 선을 알 수 있다. 악을 피하고자, 더 나은 삶을 위해 선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나아간다. 악이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선은 악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니 선과 악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하자.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해 인정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고 행하자. 어쩌면 세상의 유한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