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재난, 세 가지 생존 법칙, 그에 따른 3가지 시각적 변주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콘크리트 유니버스(콘크리트 유토피아, 황야, 콘크리트 마켓)는 한국형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시각적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 세계관이다.
하나의 거대한 재난을 같은 뿌리로 두지만, 세 작품은 획일적으로 답습하지 않는다. 굳건히 버티고 선 폐허 속 유일한 건축물, 완전히 바스러져 약육강식의 룰만 남은 무법지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빚어낸 불안정한 임시 질서까지. 각 작품은 장르적 방향성과 서사에 맞춰 변주한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로고 디자인은 세계관의 이름처럼 콘크리트라는 물성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다. 육중한 무게감으로 장식이 배제된 두껍고 단단한 고딕 계열의 폰트를 사용해, 붕괴된 세상 속 살아남은 사람들의 억눌린 생존 본능과 폭력성을 표현한다. 또 균열과 마모의 텍스처를 더해, 문명 붕괴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매끈한 현대 디자인에 반하는 브루탈리즘 디자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타이포그래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처럼 디자인되었다. 획의 두께가 일정하고 꺾이는 모서리가 직각에 가깝게 떨어져, 무너진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황궁 아파트'의 견고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않고 거칠고 얼룩진 텍스처를 더해, 이곳이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재난 직후 참담한 현실임을 보여준다.
언어가 달라져도 오리지널 로고가 가진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한 것들만 찾아서 모아봤다. 영어, 우크라이나어, 태국어 모두 두껍고 묵직한 고딕 계열을 사용해 콘크리트의 물성을 살린다. 특히 한자 로고의 경우 글자의 복잡한 획을 부서진 파편처럼 조금 더 거칠게 덜어내어, 대지진으로 인한 붕괴라는 영화의 모티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굳건히 버티고 선 건축물이라면, '황야'는 바람에 깎이고 바스러지는 폐허다. 글자의 우측이 물리적 타격을 입은 듯 흩날리며 해체되는 효과가 적용되었다. 지진 이후 무법지대라는 공간적 배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거칠고 파괴적인 액션 장르를 타이포그래피를 붕괴시키며 시각화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콘크리트 마켓>이 육중하고 각진 '콘크리트 고딕'이라는 동일한 뼈대를 공유하고 있다면, <황야> 로고는 겉도는 느낌이 든다.. 그 의도를 짐작해 보면, ‘마동석표 액션 활극'이라는 완전히 달라진 장르적 온도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에 들다 보니 아쉬움이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글로벌 로고들 역시 풍화(Weathering)라는 키워드에 집중했다. 영문 로고를 포함한 모든 언어의 텍스트 표면에 심하게 긁히고 패인 자국들이 선명하다.
로고의 뼈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폰트 형태와 유사하다. 묵직하고 각진 획, 넓은 자간 등을 차용했다. 이는 대중들에게 이 작품이 앞선 영화들과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마켓이라는 공간이 겉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듯 보여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인간들의 불안정한 욕망과 이기심 위에 세워져 있음을 균열 질감(Crack)만으로 암시하는 듯하다.
러프한 판화 스타일의 추상적인 일러스트. 흑백의 강한 대비와 기하학적이고 투박한 형태로 무너진 세상과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를 표현했다. 아파트를 향해 손을 뻗거나 서성이는 기괴한 인간 형상들은, 재난 직후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부족 사회로 퇴행해 버린 인간 군상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6명의 인물을 동일한 구도의 클로즈업 샷으로 나열했다. 차갑고 건조한 색감, 흙먼지가 묻은 얼굴, 두꺼운 방한복이 생존의 팍팍함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배경을 가로지르는 거친 붉은색 페인트 선은 이들이 살고 있는 (혹은 갇힌) 황궁 아파트라는 ‘물리적 경계선’ 같다.
압도적 스케일과 짧은 카피로 세계관의 전제를 선언한다. 철저히 파괴된 도시의 전경을 딥 블루 톤의 차가운 잿빛으로 눌러 담았다. 화면 전체를 뒤덮은 잔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아파트 한 채에 눈길이 가는 구성.
인물들의 컷을 단순 분할했다기보다, 마치 두꺼운 시멘트 벽이 뜯겨 나간 것처럼 거칠게 찢어낸 콜라주. 이는 물리적 재난을 넘어, 극한 상황 속 서서히 갈라져가는 인간들의 도덕성과 이웃 간의 균열을 포스터 프레임 자체의 파괴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콘크리트 잔해 위 인물들이 위태롭게 서 있다. 구도 자체로 수직적 계급도를 연상시킨다.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영탁(이병헌)과 그 아래로 배치된 인물들. 잿빛 하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은 희망일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비추는 조명일까? 모호하게 처리되어 서늘한 긴장감을 준다.
클로즈업된 얼굴 위 거친 붓터치와 부서진 파편들. 시각적 마찰음이 들리는 듯한 혼란스러운 질감이다.
생존을 위해 밀고 들어오려는 외부인들과 이를 막아내려는 아파트 주민들 간의 처절한 육탄전을 꽉 찬 프레임으로 담아냈다. 아이맥스의 넓은 화면을 웅장한 풍경 대신 숨 막히는 압박감과 아비규환으로, 이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거대한 '황야' 타이포그래피 자체가 하나의 건축물처럼 메마른 땅에 박혀 있다. 그 앞에서 악어의 목을 벤 채 서 있는 마동석의 모습은,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만 남은 야만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장치 같다. 장르 특유의 키치함이 묻어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차가운 딥 블루 톤에서 벗어나, 흙먼지가 흩날리는 오렌지빛 웜톤으로 톤앤매너를 반전시켰다. 샷건을 겨눈 마동석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날아다니는 불티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액션 활극'이라는 장르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심리 스릴러에서 타격감 넘치는 액션 장르로 세계관의 분위기가 전환되었음을 알린다.
무너진 아파트 입구에 억척스럽게 들어선 시장 풍경. 뒷모습의 주인공이 짐을 메고 안쪽으로 걸어가는 ‘1인칭 시점’의 구도를 통해 새로운 서사 안으로 끌어들이는 걸 표현한 것 같다. 이전의 파괴적이고 차가운 톤에, 묘한 활기와 생활감이 거칠게 섞여 들어갔다.
인물들의 커다란 실루엣 안에 시장 풍경을 투영한 이중 노출 기법. '마켓'이라는 새로운 억압적 질서가 이들의 운명과 내면을 지배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시리즈 전작들이 보여준 차가운 잿빛이나 흙먼지 날리는 황야의 톤과 아예 다른 방향성으로 제작되었다. 강렬한 오렌지색 배경과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연상되는 색감이다. ‘물리적 재난’에서 ‘인간 내면’의 재난으로 포커스가 옮겨갔음을 표현한 것 같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시각적 여정은 하나의 거대한 재난이 어떻게 다양한 장르와 사람들의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단단하고 서늘하게 세워둔 브루탈리즘의 뼈대 위, <콘크리트 마켓>은 탁하고 불안정한 욕망의 색채를 덧입히며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았다. <황야>는 장르적 쾌감과 독립성을 위해 그 간 쌓아온 세계관의 스타일을 너무 쉽게 놓아버린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