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스케일과 처절한 다크 판타지의 시각화
<진격의 거인>은 총 2.5번 정주행 했다. 첫 시도 때는 완결이 나기 전이었는데, 넷플릭스에서 화려한 전투 씬만 가볍게 즐기다 중도 하차했었다.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무지성 거인들의 비주얼, 흔해 보이는 중세 시대 설정 등을 보며 그저 그런 뻔한 작품일 거라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주변의 끊임없는 극찬에 결국 다시 각을 잡고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유튜브에서 치밀한 떡밥 회수와 서사 속 숨겨진 상징들을 분석한 영상들을 접하면서부터 이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고, 마침내 파이널 시즌이 방영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정주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나의 얄팍한 첫인상과 달리, 이 이야기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하고 깊은 무언가가 있다. 엔딩을 본 후 꽤 오랜 시간 악마의 아이라는 OST를 종종 찾아들을 정도로.
칼날의 형상화: 로고의 텍스트는 입체기동장치의 칼날(Blade)을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 질감으로 디자인되었다. 전투와 생존이라는 작품 속 테마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상흔과 핏자국: 매끄러운 폰트가 아닌 긁히고 낡은 질감에 붉은 핏자국이 흩뿌려진 디테일로, 진격거 세계관의 잔혹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시각화했다.
글로벌 브랜딩: 볼드한 한자 타이틀(進撃の巨人)과 아래 영문 타이틀(ATTACK ON TITAN)을 배치하여, 서구적 다크 판타지 느낌과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오리지널리티를 동시에 살리는 방향으로 제작되었다.
로고에 있어,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조형적 아쉬움, 즉 텍스처에 가려진 평범한 실루엣이다. 진격거 로고는 금속 질감, 긁힌 상처, 붉은 핏자국로 잔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모두 제거하고 순수한 타이포그래피의 '뼈대'만 남겨보면, 끝부분이 살짝 뾰족하게 다듬어진 것 외에는 비교적 평범한 폰트에 불과하다.
글자의 구조나 구성 자체에서 진격의 거인만의 고유 심볼이나 기믹이 숨어있었다면, 조형적인 재미와 형태적 특징이 더 살아났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벽의 형태적 구조화를 한다고 했을 때 답답함과 폐쇄성이 느껴지게 구성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글자의 외곽선이나 획을 볼드하게 처리하거나, 좀 더 빽빽하게 구성해 볼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또 크기의 압도적 대비 차원에서 거인이라는 글자만 크게 배치해 본다든지, 자간 사이에 입체기동장치의 와이어나 칼날을 상징하는 얇은 획을 추가해 본다든지. 형태적인 관점에서 세계관을 미니멀하게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은 더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왜 이런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 대중적 (상업적) 가시성 때문이지 않을까? 대중 만화 특성상 독자들이 서점 매대에서 1초 만에 제목을 읽고 인지해야 할 것이다. 글자의 형태를 과도하게 변형하거나 구조적 실험이 반영된 방향보다는 읽기 쉬운 직관적인 형태에 텍스처로 분위기를 보여주는 안전한 방식을 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아쉬운 점은 로컬라이징 된 로고의 형태적 변화다. 원작의 일본어나 한국어 로고가 주는 육중하고 묵직한 덩어리감이, 영문 알파벳으로 변경되면서 얇고 길쭉하게 변해 위압감이 크게 떨어져 보인다. 중세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채택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원작의 느낌을 더 충실히 표현하는 방향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동양권의 네모꼴 구조와 알파벳의 선형(Linear)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하게 재해석한 로컬라이징 사례들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고질라: 가장 대표적인 거대 괴수 장르로, 압도적인 스케일을 영문 폰트의 구조로 완벽히 번역했다.
아키라: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의 전설이자, 타이포그래피 로컬라이징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
세키로: 묵직한 붓글씨가 주는 동양적 칼날의 무게감을 서양의 알파벳 구조에 맞춰 세련되게 변환한 로고 사례
시선의 전복
진격의 거인 포스터를 관통하는 디자인 공식은 '거인 vs 작은 인간'의 구도다. 왼쪽 포스터처럼 거대한 벽 너머로 얼굴을 내민 거인과 그에 맞서는 작은 에렌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넘을 수 없는 절망감과 인간의 무력함, 그리고 그에 맞서는 투지를 단 한 장의 이미지로 완벽히 설명한다. 하지만 오른쪽 파이널 시즌 포스터를 보면 에렌이 점차 변모하면서 구도가 전환된다. 작품의 철학적 주제가 브랜딩에 시각적으로 완벽히 녹아든 결과물이다.
압도적인 스케일 대비
시즌을 거듭하며 만들어진 수많은 키 비주얼들 역시 이 압도적인 스케일 대비를 놓치지 않는다. 적들을 밑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를 일관되게 사용하여 시각적인 절망감을 극대화했다.
메타포를 활용한 서사와 톤의 변화 암시
작품이 진행되며 포스터의 톤도 다채로워진다. 입체기동장치라는 고유의 무기를 전시하듯 보여주거나, 주요 인물들이 전장 속 참호에 들어가 있는 듯한 거인 발자국 속 연출. 그리고 평화로운 풍경 위를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배치하여 전쟁의 참혹함과 닿을 수 없는 자유를 시각적으로 은유하기도 한다.
역시 떼샷이지
시즌 별로 서사가 담긴 단체 샷.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쪽 키 비주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성인데, 한데 모아보니 서사의 변화도 담아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34권에 달하는 단행본 표지야말로 서사의 변화와 시선의 전복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초반 표지들이 거인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벽 안의 폐쇄성에 집중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 대립을 묘사한다.
억압과 자유
시즌 별 오프닝 애니메이션에는 작품의 메인 테마를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장치가 숨어있다. 육중한 쇠사슬과 답답한 '벽'의 이미지는 벽 안에 갇힌 인류의 억압과 세상과의 단절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억압과 대비되는 상징으로 '새'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잔혹한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하얀 새는 인류가 갈망하는 궁극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입체기동장치의 시각화
애니메이션 초기 오프닝에서는 카메라가 캐릭터와 함께 공중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역동적인 3D 워크를 보여준다. 압도적인 스피드와 입체적인 시각화는 진격의 거인만의 고유한 액션 스타일을 각인시켰다. (이미지는 오프닝 장면은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 한지의 마지막 전투)
톤앤매너의 전환
하지만 후반부 오프닝은 톤이 아예 달라진다. 에렌의 어둡고 공허한 표정처럼, 소년만화적 영웅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전쟁의 비극과 파멸을 상징하는 사이키델릭하고 어두운 톤으로 아트워크를 탈바꿈하여, 작품의 무거운 결말을 암시했다.
처음엔 그저 기괴하고 자극적인 괴수물로 보였지만, 시대를 꿰뚫는 처절한 다크 판타지로 이 정도의 애니메이션이 또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자유와 억압', '선과 악의 모호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뚝심 있게 시각화해 낸 디테일들이 있었기에 이토록 깊은 몰입이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