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밸브와 안전이라는 온도차

2025년 12월 31일

by 달빛라디오

창밖으로 2025년의 마지막 노을이 길게 늘어진다. 한 해를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세 가지 화두—겸손(謙), 지혜(知), 그리고 성실—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책상 위 다이어리 첫 장에 적어두었던, 그리고 카카오톡 프로필에 선명하게 썼던 그 정갈한 글씨들은 일 년이라는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제는 조금 더 묵직한 무게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올해 내가 머물렀던 삶, 공장 현장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변화는 단연 '안전'에 대한 태도였다. "안전하지 않으면 작업하지 마라." 예전 같으면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혹은 효율을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 했던 위험들이 이제는 멈춤의 이유가 된다. 세상은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더 귀한 가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씁쓸함이 교차한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은 이 물 공장은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곳이다. 십수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 오로지 생산과 공급만을 목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시설들은 오늘날의 섬세한 안전 기준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비좁은 배관 사이, 발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은 높은 곳의 낡은 밸브들. 안전을 위해 멈춰야 하지만, 그 시설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쉼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이 낡은 쇠붙이들이 품고 있는 위험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까.'


좁은 통로를 지나며 차가운 철제 난간을 쓸어본다. 이곳에서 내가 마주한 성실함은 단순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은 구식 시설'과 '안전해야만 하는 오늘날의 가치' 사이의 간극을 묵묵히 메워가는 인내였다. 위험을 외면하지 않는 겸손함, 그리고 멈춰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이곳엔 절실했다.


세상은 바뀌었고, 법은 엄격해졌지만, 현장의 낡은 기계들은 여전히 과거의 문법으로 작동한다. 그 간극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올해 내가 수행해야 했던 가장 고된 고행이자 성실함의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전화 바닥에 닿는 딱딱한 콘크리트의 질감을 느끼며 생각한다. 완벽한 안전이란 구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한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씩 고쳐 나가는 손길에 있다는 것을.


이제 2025년의 마지막 퇴근길을 준비한다. 낡은 시설들 사이로 스며드는 찬 바람이 뺨을 스친다. 올해의 화두였던 세 단어를 주머니 속에 소중히 찔러 넣는다. 내년에도 이 낡은 복도에서 나는 멈춤과 나아감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아직은 환한 대낮이지만 곧 어둠이 내릴 공장의 외벽 위로, 차갑지만 초롱한 별빛들이 하나둘 내려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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