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 해 3월

선택의 문 앞에 서면, 봄바람도 무겁게 느껴진다.

by 달빛라디오

1화


회색 난간 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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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동 언덕의 낡은 난간에 손을 얹자, 쇠가 품은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봄볕은 언덕을 천천히 덮고 있었지만, 한준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30년 가까이 몸담아온 시설공단.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손가락으로 셀 만큼 줄었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머릿속에서 숫자를 굴렸다.

“연금이 나와야 월 120만 원 남짓… 서울에선 전세 이자나 관리비만으로도 빠듯한데.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의료보험료까지 늘 텐데, 농사로 벌 수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연간 이백만 원 남짓이라면… 생활은커녕 병원비도 감당 못 할 수도 있어.”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버스 정류장에는 규수가 먼저 와 있었다. 배관 공구가 담긴 낡은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땀을 훔치며 투덜거렸다.

“야, 또 일찍 나왔네. 넌 시계 맞춰 사는 사람 같다니까.”

“습관이지.” 한준은 짧게 대답했다.

규수는 담배를 꺼냈다 다시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어제도 돈 떼일 뻔했어. 계약서 쓰라는 소리 많이 듣는데, 20년 넘게 의리로 일해온 내가 이제 와서 뭘 바꾸겠냐. 그냥 굴러가는 대로 살지.”

한준은 눈길만 주었다. 규수의 주름진 얼굴엔 고단함이 배어 있었다.

잠시 후, 흰 셔츠 차림의 세빈이 나타났다. 병원 근무를 막 마친 듯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아침바람 맞으니까 정신이 좀 드네. 병원에선 늘 환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가 나오면, 내가 내 시간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한준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근데 너, 요즘 표정이 좀 달라.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한준은 잠시 목이 메었다. 연금, 농사 수익, 아내의 직장 문제, 아버지의 건강, 의료 접근성… 수많은 불안이 스쳤다.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아.”

규수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야, 넌 어디 가도 살아남을 놈이야. 괜히 겁먹지 말고 네 마음 편한 데로 가라.”

그러나 집에 돌아온 한준은 창밖 저무는 햇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실패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 아버지마저 쓰러지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부엌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솔직히 말해봐요. 내 직장은 어떡해야할까요? 서울에서 그만두면 연천에서는 일자리 구하기 힘들 텐데. 우리 나이에 새 출발이 쉬울까요?”

그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한준은 대답 대신 조용히 아내의 눈빛을 마주했다.

“우린 아직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다.”




2화


오래된 골목의 약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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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동 골목은 여전히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빨래가 걸린 베란다, 손때 묻은 철문, 담장을 타고 오른 담쟁이 넝쿨. 봄볕은 골목 안쪽까지 스며들며 벽돌 틈새를 밝혀주었다.

몇 해 전 TV 연속극 <응답하라, 1988>의 배경지로 방영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드라마 속 풍경이 만들어낸 향수와 실제 골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80년대에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대로 벽에 배어 있는 듯했고, 좁은 골목길을 가르며 달려오던 배달 오토바이의 소리조차도 오래된 시간 위에 겹쳐지는 것 같았다.

서울 도심이 고층 아파트와 번쩍이는 간판으로 변해가는 동안에도, 이 동네만큼은 마치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구멍가게 앞 평상에는 장씨가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앉아 있었다.

“야~~, 한준이 왔구먼. 일 마치고 골목 걷는 게 얼마 만인가.”

“요즘은 일이 많아서 자주 못 왔습니다.” 한준은 허리를 숙였다.

장씨는 막걸리잔을 건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이 들면 일보다 사람이 더 귀한 법이야. 그거 잊지 말게나.”

잠시 뒤, 창원이 달려왔다. 배달 상자를 든 그의 점퍼는 땀에 젖어 있었다.

“형님들, 잠깐만 쉬다 갑니다. 요즘은 하루가 48시간 같아요.”

그는 허리를 펴며 힘겹게 웃었다.

“택배 시작한 지 반 년 됐는데, 벌써 무릎에서 소리 나. 아침마다 진통제 챙겨 먹고 ‘오늘은 사고만 나지 말자’ 빌고 나간다. 그래도 집에 딸 사진 붙여놓고 보면 힘이 좀 나네.”

장씨가 혀를 찼다.

“허리 끊어지면 딸 대학졸업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

창원은 씁쓸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알지만, 그래도 버텨야죠. 빈손으로 딸 공부시키기는 싫으니까요.”

잠시 후, 지숙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얘들아, 오랜만이다. 딸 혼례 준비하느라 정신없다. 장 보러 다니다 허리 휘겠어.”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이 참 빠르네.” 한준이 놀라며 물었다.

지숙은 미소 지으며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였다.

“남편이 떠나기 전 남긴 말이 있었거든. 딸 혼례만큼은 전세집 한 칸은 꼭 해주라고. 그 약속 지키느라 허리 휘었지.”

순간, 골목은 잠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만 흘러왔다.

그때 세빈이 퇴근길에 합류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야, 이렇게 다 모였네. 너희 얼굴 보니까 하루 피로가 다 풀린다.”

뒤이어 규수가 나타나 농담을 던졌다.

“이 분위기면 포장마차라도 열어야겠다. 다들 고민 보따리 들고 왔으니 장사 대박 나겠네.”

평상 위에 둘러앉은 친구들은 각자 삶을 풀어놓았다. 택배의 고단함, 혼례 준비의 무게, 병원 근무의 긴장, 배관 수리의 위험. 웃음과 한숨이 뒤섞였지만,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며 버텼다.

한준은 그들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모두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이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는 듯했다.





3화


저녁 빛 속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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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동 저녁하늘은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여 있었다. 골목마다 저녁 반찬 냄새가 풍겼다.

한준은 하루를 정리하며 걸었다. 아침의 규수, 평상의 창원과 지숙, 퇴근길의 세빈. 모두 힘겹게 살면서도 서로 기대어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얼굴이 좀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 동네 사람들 만나서 마음은 좀 풀렸어.” 그는 웃으며 신발을 벗었다.

식탁 위엔 된장찌개가 놓여 있었다. 숟가락을 들던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금이 월 120만 원 남짓 나온다는데, 서울에서 살기엔 빠듯하지. 전셋값만 해도 감당이 안 돼. 연천이라면 아버지 농지가 있으니 숨통이 트일 수도 있지. 하지만 농사만으론 생활이 어려울 거야.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

아내는 젓가락을 멈췄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이 편안할 수 있다면 나도 괜찮아요. 다만, 내 직장 문제가 현실이에요. 서울에서 그만두면 다시 구하기 쉽지 않아요. 우리 둘 다 준비가 필요해요.”

그 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사실이었다.

한준은 창밖 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만약 농사에 실패하면? 아버지가 병원 신세를 지면? 도시는 버겁지만, 농촌은 또 다른 두려움이 기다리겠지.”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어디에 있든, 반드시 길을 찾아내겠다.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친구들 덕에 나는 아직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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