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의 그림자는 길어지지만, 우정은 여전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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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 뒤, 쌍문동 골목에는 눅눅한 흙냄새가 배어 있었다. 벽돌 틈새엔 빗물이 스며들어 검은 얼룩을 남겼고, 웅덩이 위로 네온사인 불빛이 일렁였다. 한준은 짧은 우산을 들고 퇴근길을 걸었다.
오늘 낮, 회의실에서 인사팀장이 던진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형님. 이제 정년도 얼마 안 남으셨으니, 후배들에게 일 넘기는 법 좀 알려줘야 하지 않아요?”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지만, 그 말은 한준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30년 가까이 지켜온 자리가 어느새 그림자처럼 가벼워진 듯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우산을 받아주며 물었다.
“오늘은 얼굴이 더 어둡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회사에서 정년 얘기가 나왔어.”
그는 젓가락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연금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해. 월 120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틴다는 게… 병원비, 교통비, 관리비까지 합치면 적자야. 58살에 도시에서 무슨 일을 새로 구하겠어. 연천에 간다 해도 농사 수익은 불투명하고.”
아내는 조용히 밥을 덜어주며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직장 그만두는 문제는 고려했나요? 연천에 내려가면 나도 다시 일 구하기 쉽지 않아요. 우리도 나이가 점점 드는데 의료 같은 부분도 더 부족하고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그녀는 낮게 덧붙였다.
“나는 직장에서 일하는 게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오랜 동료들과 함께 웃고, 작은 성취라도 느끼는 그 시간이 내 삶의 일부였죠. 서울에서는 친구들과 수영도 하고, 가끔 영화도 보며 숨통을 틔웠는데… 연천에 가면 그 모든 걸 놓아야 하잖아요. 그게 겁나요.”
그 목소리에는 현실적인 무게와 함께, 잃어버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베란다에 서서 창문 너머로 흘러내린 빗물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정년은 끝이 아니라 다른 길로 이끄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연천을 향한다는 게 꼭 정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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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쌍문동 근처의 작은 카페. 창가로 벚꽃잎이 흩날리며 들어왔다.
세빈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중얼거렸다.
“요즘 병원은 전쟁터 같아. 환자는 넘치고, 사람은 부족하고… 그래도 웃어야지. 안 웃으면 다 무너져버리니까.”
단단한 미소. 고등학교 시절부터 변하지 않은 그녀의 힘이었다.
한준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과 세빈은 작은 음악 밴드를 만들어 연습실에 모여 밤늦도록 기타와 드럼 소리를 맞추곤 했다. 한 번은 다른 학교 축제에 초청을 받아 무대에 올랐는데, 예상치 못하게 큰 호응을 얻으며 ‘팬클럽’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던 적이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아래에서 손 흔들던 이름 모를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도 세빈은 무대 한가운데에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불렀다.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웃는 모습은 지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규수가 들어왔다. 작업복엔 땀이 배어 있었고, 얼굴엔 피곤이 깊게 묻어 있었다.
“야, 늦었다. 오늘은 돈은 받았는데… 대신 욕을 실컷 얻어먹었지 뭐. 벌써 20년 넘게 이런 식으로 버티다 보니, 바꾸자니 겁나고, 안 바꾸자니 답답하고.”
세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규수야, 이제는 가족 생각해서라도 냉정해져야지. 너 쓰러지면 누가 지켜주겠어”
규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면서도 잘 안 된다니까. 대출금에 애들 학원비까지… 매일 아침 눈 뜨면 겁난다. 이게 내가 꿈꾸던 삶이었을까 싶어.”
한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계속 버틸 수 있겠어?”
“버텨야지. 딸내미 대학은 보내야 하니까. 근데… 가끔은 그냥 다 놓고 싶다.”
세빈은 규슈의 팔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있잖아.”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세빈이 한준을 향해 확인했다.
“넌 요즘 계속 연천 얘기하던데. 마음이 많이 기울었어?”
한준은 창밖 벚꽃을 바라보다 낮게 응답했다.
“도시는 숨 막히고, 연천은 아직 멀게 느껴져. 그래도 아버지가 흙 만지며 웃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자꾸 그쪽으로 끌리네.”
규수가 씁쓸하게 잔을 들었다.
“부럽다. 넌 적어도 선택지가 있잖아. 난 오늘도 내일도 버티는 게 전부인데.”
세빈은 따뜻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생은 누구나 힘들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거잖아. 혼자면 못 버텨.”
창밖 벚꽃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흩날려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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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동 골목 어귀 작은 포장마차. 파전 굽는 냄새와 막걸리 향이 천막 안을 채웠다. 난로 불빛이 붉게 일렁였고, 바깥 바람과 달리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규수가 막걸리병을 들며 소리쳤다.
“야, 오늘은 내가 한잔 돌린다. 사기는 확실히 당한 것 같지만 뭐 어때. 이렇게 모인 게 얼마 만이야.”
창원이 잔을 받으며 털어놓았다.
“형님들 저는 택배 시작한 지 반 년… 아침마다 등 뒤 쪽 통증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요. 딸 결혼까지만 버티자고 기도는 하고 있는데...”
지숙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맞장구쳤다.
“난 딸 혼례 준비로 지갑이 텅텅이야. 그래도 전세집까지 해줬으니 남편 약속은 지켰지. 허리 휘었지만.”
세빈이 잔을 들어 쓸쓸히 웃었다.
“우린 하루하루 버티면서 사는 거야. 그래도 이렇게 모이면 다시 웃을 수 있잖아.”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규수가 한준을 향해 물었다.
“넌 요즘 무슨 생각 하냐? 연천 얘기 계속 꺼내더라.”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한준은 막걸리잔을 내려놓고 토로했다.
“…솔직히, 점점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 도시에서 버티는 게 너무 벅차. 연금으로는 빠듯하고, 농사라도 하면 숨통이 트일지도 몰라. 물론 실패하면 돌아갈 데가 없다는 게 두렵긴 하지만.”
창원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형님은 갈 데라도 있잖아. 난 내일도 보조기 차고 상자 들어야 해.”
지숙은 따뜻하게 말했다.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답이지. 우리가 응원할 거야.”
세빈도 그렇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늘 단단했잖아. 어디서든 버틸 수 있어.”
포장마차 천막 위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 소리가 대화 사이사이에 섞여 묘한 울림을 만들었다.
한준은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게 반드시 안심이라는 뜻은 아니다. 결국 선택은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