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여름이 성큼 온, 7월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갈 길을 찾는 마음은 서늘하다

by 달빛라디오

1화


여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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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햇살이 쌍문동 아파트 창문을 두드렸다. 선풍기 날개가 느릿하게 돌며 뜨거운 공기를 밀어냈다. 한준은 식탁 위에 놓인 팜플렛을 읽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글씨 ― 정년 후 재취업 설명회 안내.

부엌에서 나온 아내가 물컵을 건네며 궁금해했다.

“회사에서 또 뭐래요?”

“정년 준비하라네. 아직 몇 년은 남았는데도 벌써 퇴직 후 일자리부터 알아보래. 연금만으론 안 되니까.”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눈을 마주쳤다.

“당신, 연천 얘기만 하면서 내 직장은 어떻게 할 건데요? 거기 내려가면 난 다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아요. 우리 둘 다 감당해야 할 문제예요.”

그 말에 한준은 대꾸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와 꽉 막힌 도로,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주말에 만난 규수는 낡은 공구통을 들고 나타났다.

“한준아, 왜 그렇게 풀이 죽었냐?”

“정년 얘기가 계속 나오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 퇴직 후 뭐 먹고 살지 걱정돼.”

규수는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 정년이 어딨어. 평생 몸으로 버텨야지. 그래도 넌 아버지 땅 있잖아. 그게 얼마나 큰 힘인데. 난 그런 것 조차 하나 없는데.”

며칠 뒤 늦은 밤, 세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규수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어.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네?”

“정년 얘기가 자꾸 나오니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어. 연금은 빠듯하고, 농사도 자신 없고.”

세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네가 편해야 한다는 거야. 어디에 있든 숨 쉴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지. 도시가 아니면 시골 어디라도 괜찮잖아.”

그날 밤, 아내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왔다.

― 나도 오늘 회사에서 하루 종일 답답했어요. 당신 생각이 자꾸 나네요.

한준은 휴대폰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화면을 닫았다.





2화


연천 들판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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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한준은 기차에 올랐다. 창밖 풍경은 점점 변했다. 빽빽한 아파트 단지는 사라지고 논밭과 낮은 산이 이어졌다. 군부대 철책과 경계 표지판은 이곳이 접경 지역임을 알렸다.

역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낡은 모자를 눌러쓰고 서 있었다.

“왔구나. 요즘 안 좋은 일 있나보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일이 많아서 그렇죠.”

“일이 아니라 마음이 지친 거 같구나.”

한탄강 옆 들판으로 향하는 길, 바람이 이랑 사이를 스치며 푸른 물결을 만들었다. 한준의 어깨가 조금은 풀렸다.

밭둑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도시는 번잡하고 숨 돌릴 틈이 없지. 여긴 느리지만, 제때 자라. 얼굴 아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

한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버지, 농사로는 얼마나 벌 수 있어요?”

아버지는 흙을 집어 손에 문지르며 대답했다.

“이 나이에 큰돈은 바라지 마라. 먹고살 정도면 다행이다. 대신 마음은 편할 거다.”

그 말에 한준의 가슴은 무거워졌다. “도시에서의 불안은 벗어날 수 있겠지만, 경제적 현실은 더 팍팍할지도 몰라…”

해질녘, 마을 어르신들이 지나가다 반겼다.

“아이고, 서울 산다는 아들이 왔구먼.”

“서울 사람 맞아? 흙 만지는 손이 제법이네.”

농담 섞인 말에 웃음이 터졌지만, 동시에 부끄러움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곧 마을의 미묘한 시선도 느껴졌다.

“서울 사람이 와서 농사 제대로 할까?” 하는 속삭임.

굴삭기 면허증까지 준비한 한준이었지만, 정작 콩밭 갈고 돌 치우는 데는 면허보다 손발이 익숙해야 했다.

그날 밤, 연천 마당에서 별빛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별이 쏟아졌다. 바람은 고요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여기서 숨은 쉴 수 있겠다. 하지만… 생활은 어떻게 감당하지?”




3화


결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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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에서 보낸 며칠은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흙냄새, 별빛, 아버지의 말. 그러나 기차 창밖 풍경이 다시 아파트 단지와 도로로 바뀌자 답답함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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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규수가 물었다.

“연천 갔다 왔다며? 어땠어?”

한준은 잠시 망설이다 답을 했다.

“마음은 편했어. 하지만 농사로 큰돈 벌 수는 없대. 먹고살 정도면 다행이라는데… 연금이랑 합쳐도 생활은 빠듯할 거야.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고.”

창원이 술잔을 기울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형님은 선택지가 있잖아. 난 내일도 디스크 안 터지도록 조심해서 상자 날라야 해.”

지숙은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네가 편안할 수 있다면 그게 답이지. 우리가 응원할 거야.”

세빈도 어깨를 으쓱하며 인정했다.

“넌 늘 단단했잖아. 어디에 있든 버틸 수 있어.”

집에 돌아온 뒤, 아내와 늦은 차를 마셨다.

“여보, 얼굴이 달라졌어요. 무슨 결심을 한 건가요?”

“아직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연천에 뿌리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요. 다만 실패가 두려워요.”

아내는 그의 손을 감싸며 조용히 속삭였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다시 시작하면 되죠. 중요한 건 당신이 선택한 길이라는 거예요.”

그 말에 한준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망설였다.

“후회 없는 선택… 정말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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