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무더위 속, 8월

흙을 만지는 손에서 비로소 삶의 온기를 느낀다.

by 달빛라디오

1화


모내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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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들판에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논마다 물이 가득 차 햇살을 반사했고, 개구리 울음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한준은 모자를 눌러쓰고 아버지와 함께 밭두렁을 걸었다.

“이제 겨울 배추를 심어야겠다. 여긴 날이 금방 추워지니 8월이 적기야.” 아버지가 호미를 들며 말했다.

한준은 허리를 굽혀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물과 흙이 손에 묻자 낯선 감각이 스며들었다. 도시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이제 땅을 붙잡고 있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묘한 해방감도 따라왔다.

그러나 금세 허리가 뻐근해왔다. “하루 이틀은 버티겠지. 하지만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몸이 먼저 무너지는 건 아닐까?”

잠시 뒤, 마을 어르신들이 새참을 들고 왔다. 보리밥, 된장국, 오이무침.

“서울 아들, 손에 흙이 잘 어울리네.”

“아직 서툽니다. 그래도 배우고 있습니다.”

웃음이 오갔지만, 한 어르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올해도 갑자기 내리는 큰비가 걱정이네. 우리나라도 날씨가 완전 동남아 되었어, 몇 년 전 한탄강이 범람해서 이 일대 논밭이 다 잠겼거든."

다른 어르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씨네 콩농사 완전히 망했지. 둑이 터져서 물이 밀려들어 오더라고."

한준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나요?"

"봄여름가을, 농사철마다 걱정이야. 요즘 기후가 달라져서 더 심해졌어."

한준은 속으로 계산했다. "농사 실패 위험까지... 이런 건 서울에서 상상도 못 했는데.“




2화


여름 햇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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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창원과 지숙이 들렀다. 창원은 택배 일을 마치고 달려온 듯 땀에 젖어 있었다.

“형, 여긴 공기만 맡아도 살겠네. 허리 아픈 것도 잠깐 잊겠어.”

지숙도 고개를 끄덕였다.

“딸 혼례 치르느라 통장이 텅텅이지만, 여기 앉아 있으니 마음이 놓이고 좋네.”

한준은 물 한 잔을 내밀며 천천히 말했다.

“언제든 쉬러 와. 나도 매일 고민하지만… 이곳이 너희 마음까지 붙잡아줄지도 몰라.”

해가 지자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라보며 그는 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처음으로 밭을 갈아봤어.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네.”

휴대폰 너머에 세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흙 만지며 웃는 모습이 상상돼. 힘들어도 편하다니 나도 안심이 돼.”

그러나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해방감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금전은 턱없이 부족할 텐데.”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니, 아내에게서도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내 : 오늘도 야근. 회사 사람들 얼굴만 보다 하루가 갔네. 당신은 흙 냄새 맡고 웃고 있겠지? 부럽다. 하지만 나도 언젠간 그곳에서 숨 쉬고 싶어.

다음 날, 한준은 아지리 마을 이장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농기계 공동 임대 같은 건 어떨까요? 비용 절약도 되고..."

이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준 동생, 우리가 몇십 년 이렇게 살아온 줄 아나? 도시 사람이 와서 갑자기 바꾸자고 하니..."

그 순간 한준은 깨달았다. 선의도, 효율성도 때로는 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장집 마당을 나서며 그는 중얼거렸다.

"받아들여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구나.“




3화


들녘 위의 해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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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한탄강 옆 들녘은 뜨거운 햇살과 바람으로 가득했다. 메미 울음은 쉼 없이 쏟아졌고, 흙은 갈라질 듯 말라갔다.

논둑 위를 따라 잠자리가 떼 지어 날아다녔고, 벼 이삭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였다. 멀직이 이 곳에서 쉽게 듣기 어려운 아이들 웃음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자 흙냄새와 풀냄새가 한꺼번에 코끝을 스쳤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조차도 느릿하게 움직이며 여름날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말했다.

“농사는 결국 땀으로 짓는 거다. 힘들어도 버티면 웃을 날이 올 거야.”

“몸은 힘든데… 마음은 이상하게 편하네요. 시내 사무실에 서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낫네요.”

점심 무렵, 마을 사람들과 새참을 먹으며 한 어르신이 농담했다.

“자네, 이제 농사꾼이 다 되었네. 서울 사람 티가 안 나.”

한준은 땀을 훔치며 웃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도 배워야 할 것과 배우는 건 많습니다.”

8월 연휴 모처럼 친구들이 휴가차 함께 밭일을 도와주러 왔다.

그 때 창원이 물을 들이켜며 농담을 던졌다.

“형님, 택배보다 나은 거 아니야? 매일 진통제 먹는 것보다 밭 매는게 더 낫겠어.”

“이 일도 만만치 않아. 그래도 같이 하면 든든하지.”

지숙은 들판을 둘러보며 물었다.

“서울에선 늘 빌딩 숲만 보는데, 여기 오니 숨이 트인다. 마음도 넓어지는 것 같고, 하지만… 생활비는 얼마나 들까?”

그 말에 한준은 순간 멈칫했다.

“그래, 그게 문제지. 연금이랑 농사 짓는 것으로는 빠듯할 것 같아. 아내가 내려와도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붉은 노을이 들녘을 물들이고, 아이들이 논둑을 뛰어다녔다.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그의 가슴 한켠은 여전히 무거웠다.




4화


여름밤의 불빛과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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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포사격이 있었는지 동네 전체 땅이 하루 종일 울렸다가 조용해졌다. 연천의 여름밤은 낮과 달랐다. 강변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마을 광장에는 작은 잔치가 열렸다. 아이들은 불꽃놀이를 들고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긴 상에 둘러앉아 막걸리와 수박을 나눴다.

규수가 잔을 들고 소리쳤다.

“야, 우리가 이렇게 다시 모일 줄이야. 이 곳이 사람 붙잡는 힘이 있네.”

창원도 맞장구쳤다.

“도시에선 이 시간에 다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형님들아, 여긴 다르네. 같이 웃으니 살겠어.”

지숙은 수박을 나누며 말했다.

“딸 결혼 후 살 전세집 계약하고 나니 허무했었는데, 여기 와 있으니 위로가 된다.”

세빈은 아이들과 불꽃놀이를 보다가 한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이곳에 내려오길 잘했어. 웃는 얼굴 보니까 알겠다. 하지만 생활은 괜찮겠어? 도시 병원보다 여긴 의료 접근성도 많이 부족하잖아.”

그 말에 한준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잔을 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조금은 두려워. 수입도, 의료도, 다 부족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제 삶을 새로 짓고 싶어요. 실패하면 다시 쌍문동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후회는 안 하고 싶으니까.”

순간, 조용히 있던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네가 스스로 택한 길이라는 거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규수와 창원은 농담을 던지며 웃었지만, 모두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졌다. 불꽃놀이와 등이 뒤섞여 들판을 환히 밝혔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농사도, 이곳 생활도. 하지만 선택했으니 끝까지 버텨보자.”


무더위 속 여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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