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수확과 갈림길, 10월

벼가 고개 숙일 때 사람도 결심을 다진다.

by 달빛라디오

1화


가을 들녘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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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자 강너머 연천 아지리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벼 이삭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고, 새 떼가 논마다 내려앉아 곡식을 쪼아 먹었다.

마을 한 어르신 논에 벼를 아버지와 함께 베어드리기로 했다.. 한준은 낫을 들고 벼를 베며 땀을 훔쳤다. 옆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지. 사람도 그래야 한다.”

한준은 웃으며 내뱉었다.

“아직 덜 익은 모양입니다. 제 마음은.”

아버지는 등을 두드렸다.

“시간이 채워줄 거다. 조급해할 것 없다.”

들판은 평화로웠지만, 그의 가슴속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런 논이나 밭 수확으로 얼마를 벌 수 있을까? 연금과 합쳐도 생활은 빠듯할 텐데. 의료비라도 생기면… 버틸 수 있을까?”

저녁 무렵, 규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오늘도 들판에서 땀 흘렸냐? 목소리가 좀 달라졌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하다.”

규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씁쓸하게 말했다.

“부럽다. 난 오늘도 일한 것 또 외상이라네. 내일도 참 막막하다. 네가 버티고 있다는 게 나한텐 위로야.”

다음 날, 세빈이 연천을 찾았다. 병원에서 벗어난 그녀의 얼굴은 오랜만에 환했다.

“와, 공기부터 다르네. 네가 왜 이곳을 택하려는지 알겠다. 하지만 네 건강은 어때? 농사일이 쉽진 않잖아.”

“힘들지만… 마음은 여기 머문다.”

“네가 웃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러나 볏단을 쌓으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두 길 사이에 서 있다. 결국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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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혼례의 날, 서로의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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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이 선선한 토요일, 지숙의 딸 결혼식이 서울 예식장에서 열렸다.

한준과 친구들은 일찍 도착해 서로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활기를 느꼈다. 무대 앞에 선 지숙은 단아한 한복 차림. 눈가에는 긴장과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꿋꿋하게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세빈이 다가와 지숙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여기까지 해낸 게 대단하다. 혼자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지숙은 눈시울을 훔치며 한참을 생각하다 답했다.

“남편이 세상 떠나며 남긴 말이 있었어. 딸 결혼만큼은 전세집 한 칸은 꼭 해주라고. 그 약속 지키느라 허리 휘었지.”

규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네 딸, 오늘 얼굴 보니까 세상 제일 행복해 보이더라.”

창원도 그렇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우리 중에 제일 강한 사람이 너야.”

결혼식장은 축복으로 가득했지만, 한준의 마음속엔 다른 생각이 스쳤다.

“나는 지금 뭘 지키고 있지? 연천과 쌍문동, 두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잖아.”

결혼식장은 축복으로 가득했지만, 한준의 마음속엔 다른 생각이 스쳤다.

순간, 오래전 자신의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다. 좁은 예식장, 빌린 양복이 조금 헐렁했지만, 아내의 하얀 드레스와 웃음만큼은 누구보다도 빛나 보였다. 친구들이 서툰 악기로 축가를 불러주며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까 두서없이 이야기하며 설레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는 가진 것이 없었어도 서로의 손만 잡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지금도 아내는 그의 곁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는데, 정작 자신만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나는 지금 뭘 지키고 있지? 연천과 쌍문동, 두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잖아.”

피로연 자리에서 규수가 술잔을 들었다.

“자. 자, 우리 나이쯤 되면 경사보다 상복 입을 날이 더 많다잖아. 그래도 뭐 어때. 이렇게 모여서 술잔 돌릴 수 있으면 된 거지. 사는 게 원래 웃음 반, 눈물 반 아니냐.”

세빈이 덧붙였다.

“그게 우리가 이어지는 방식이지. 각자 길은 달라도 결국 함께 걷는 거잖아.”

한준은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3화


쌍문동 겨울의 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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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깊어지자 쌍문동 골목은 눈으로 덮였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송이가 거리를 물들였다.

한준은 퇴근길에 포장마차 천막을 밀치고 들어섰다. 안은 따끈한 김과 웃음으로 가득했다. 규수, 창원, 지숙, 장씨, 세빈이 이미 둥근 상에 앉아 있었다.

“왔구나!” 규수가 소리쳤다.

“밖은 영하인데, 여긴 봄 같네.”

창원이 막걸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형님, 난 요즘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그래도 딸 졸업작품전까지 준비 다 끝내고 나니 좀 낫다.”

지숙은 잔을 받으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도 딸 시집 보내고 나니 허전하더라. 그래도 약속은 지켰어.”

장씨가 크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다들 힘들어도 이렇게 모이면 사는 거지. 인생 별거 있냐.”

세빈은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나는 환자들 보느라 정신없지만, 너희 얼굴 보면 힘이 나. 결국 사람 덕에 버티는 거야.”

한준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 내가 연천에 내려가더라도 너희 얼굴은 못 잊을 거야.”

순간, 자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 쌓이는 소리만 들렸다. 규수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새해 다가오는데 각자 소원 하나씩 말해보자. 우울한 얘기는 이제 그만!”

사람들은 웃으며 잔을 채웠다. 밖은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천막 안은 따뜻했다.




4화


이별과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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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저물고 봄기운이 다가왔다.

포장마차 천막 아래에 규수, 창원, 지숙, 세빈, 장씨가 또 모였다. 뜨거운 국물에서 김이 피어올랐지만, 분위기 한켠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창원이 물었다.

“형님, 정말 내려가는 거예요?”

“응. 이번 봄부터 아버지랑 밭을 일구려고 해. 도시는 이제 너무 버겁다.”

지숙이 말했다.

“네 선택 존중해. 그래도 가끔은 올라와서 얼굴 보여줘. 네 자리 비면 허전할 거야.”

규수는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난 네가 흙 묻은 손으로 웃는 모습이 상상돼. 부럽다.”

세빈은 눈빛을 똑바로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숨 편히 쉴 수 있다니 다행이야. 하지만 우리와의 추억은 잊지 마.”

장씨가 일부러 크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좋아, 이제 동네 누님들하고 연천에 놀러 갈 핑계가 생겼네. 막걸리랑 옥수수 준비해놔라.”

웃음이 흘렀지만, 웃음 속엔 이별의 정이 묻어 있었다.

며칠 뒤, 연천 집 마당에 선 그는 무릎을 꿇어 손바닥을 흙 위에 얹었다.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서 퍼져나갔다.

아버지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부턴 네 손으로 길을 내야 한다.”

“네, 아버지. 제 삶을 제 손으로 지어볼게요.”

별빛이 쏟아진 하늘 아래, 그는 다짐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5화


봄의 새싹과 작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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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에 내려온 지 한 달 남짓. 한탄강변 들녘에는 초록빛이 번져갔다.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버지와 함께 밭고랑을 고르던 한준이 말했다.

“도시에선 늘 서둘렀는데, 여기선 기다림을 배우네요.”

“농사는 기다림이다. 오늘 심은 게 내일 크진 않는다.”

점심 무렵, 마을 어르신들이 삶은 감자와 보리차를 들고 찾아왔다.

“도시 사람이라 힘들지 않나?”

“아직은 서툽니다. 그래도 흙냄새가 좋아서 버티고 있어요.”

저녁 무렵, 쌍문동 친구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규수 : “야, 밭 사진 좀 보내라.”

창원 : “허리 고생은 내가 하고, 형님은 흙 고생이네.”

지숙 : “콩 잘 키워라. 된장 맛 기대한다.”

세빈 : “힘들면 언제든 말해.”

한준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언제든 놀러 와.”

다음 날 아침,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꼬리를 흔들며 그의 발치에 앉았다.

“너도 여기 살기로 했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저 녀석도 네가 오길 기다렸나 보다.”

“저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네요. 아버지.”

그날 저녁, 아버지와 작은 약속을 나눴다. 밭고랑 하나를 맡아 일구기로. 거창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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