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내린 곳에서 다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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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리의 아침은 닭 울음으로 시작됐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과 흙냄새가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준은 마당을 쓸고, 아버지와 함께 밭으로 향했다. 밭고랑 사이에서 막 올라온 싹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싹이 크려면 물과 햇살도 필요하지만, 기다림도 필요하다.”
“저도 이제 기다림을 배우는 중이에요. 아버지. 도시에선 늘 서둘렀는데, 여긴 다르네요.”
점심 무렵, 마을 어르신들이 찾아와 보리밥과 된장찌개를 함께 나눴다.
“서울 사람이라 힘들지 않나?”
“아직은 서툽니다. 그래도 흙냄새가 좋아서 이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저녁,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집 앞에 서자마자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공기가 다르네요.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한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함께 와주니 든든합니다. 하지만… 생활이 빠듯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서 다시 시작해요.”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받아들였다.
"함께라면 괜찮아요. 다만 내 일자리 문제도 계속 고민해야 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좀 답답하기도 해요."
"뭐가?"
"서울에선 친구들이랑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고 했잖아요. 여긴 읍내까지 가려면 버스로 한 시간이에요. 당신 좋아하는 배드민턴장이나 당구장도 멀고... 우리 나이에 취미생활 없으면 더 외로워질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낮게 덧붙였다.
"사실… 나 그림 배우고 싶었어. 아이들 키우고 일하느라 늘 미뤄뒀는데, 나이 들어서라도 내 시간을 찾고 싶었거든. 근데 여기선 그런 기회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걸 포기해야 한다는 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천천히 적응해보자. 이곳만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밤, 그는 마당에 앉아 별빛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별들이 가득했다.
“아직 두렵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내가 곁에 있으니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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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연천 들판은 초록빛으로 물결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논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작은 승합차가 흙길을 달려 올라왔다. 차에서 내린 건 쌍문동 친구들이었다. 규수, 창원, 지숙, 세빈은 도시의 피곤한 얼굴은 잠시 내려놓고, 오랜만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야, 한준이. 농부 다 됐네!” 규수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창원이 물을 들이켜더니 낮게 말했다.
“형님, 솔직히 요즘은 하루하루가 전쟁 같아. 택배 상자에 몸을 다 갈아 넣는데도 통장에 남는 건 쥐꼬리야. 사고라도 나면 바로 파산이지. 딸이 졸업하고 취업까지 하고 나니 기쁨보다 허탈감이 먼저 오더라. 이렇게 죽어라 일해도 왜 늘 제자리일까, 그게 미치도록 화가 나.”
그는 씁쓸하게 잔을 들며 덧붙였다.
“그래도 니가 여기서 숨 쉬는 거 보니까… 잠시나마 나도 숨을 고를 수 있다.”
지숙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서울에서 반찬 좀 싸왔어. 밭일하다 지치면 먹어.”
세빈은 들판을 둘러보다 감탄했다.
“와… 공기부터 다르네. 네가 왜 이곳을 택했는지 알겠다. 하지만 병원가는 것은 괜찮겠어?”
그들은 마당에 둘러앉아 규수가 일본 여행 다녀오면서 사온 사케와 음식을 나눴다. 규수가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산다고 했을 땐 아쉽기도 했는데, 오늘 보니까 얼굴이 환하네.”
창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야 여전히 고생 중이지만, 너라도 숨 쉬는 거 보니 위로가 된다.”
지숙은 따뜻하게 말했다.
“넌 늘 조용했지만 우리한텐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어. 네 자리가 여긴가 보다.”
세빈은 잔을 들며 조용히 덧붙였다.
“넌 늘 우리 힘이 됐어. 어디 있든 그건 변하지 않아.”
아버지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벗들이 곁에 있다는 건 큰 복이다. 이 녀석이 여기 뿌리내릴 수 있는 것도 다 너희 덕분일 거다.”
해가 지며 들판 위에 노을이 물들었다. 한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이곳을 지켜내는 건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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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친구들이 돌아가고 연천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들녘의 푸른 물결과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저녁, 그는 아버지와 마당에 앉아 막걸리를 나눴다. 장작불이 은은히 타올라 마당을 따뜻하게 비췄다.
아버지가 잔을 비우고 나서 말했다.
“친구들이 다녀가니 집이 더 활기가 돌더라. 네가 잘 살아가는 걸 보니 나도 기쁘다.”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소음 대신, 여긴 바람과 흙이 제 친구가 되네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요. 수입도, 쉽게 병원가기도 어렵잖아요. 그래도… 결국 제가 버틸 수 있는 건 아버지, 아내, 그리고 친구들 덕분입니다.”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삶은 혼자 꾸려가는 게 아니다. 함께하는 이들이 길을 열어주는 거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쌍문동 단체 대화방.
규수 : “야, 밭 사진 좀 보내라.”
창원 : “형님, 된장찌개 먹으러 곧 갑니다..”
지숙 : “콩 잘 크고 있지? 기대 중이다.”
세빈 : “다음 휴가에 꼭 갈게.”
짧은 글이었지만, 웃음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한준은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눌렀다.
“언제든 와라. 내 집이 너네 집이다.”
밤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별빛이 손에 잡힐 듯 쏟아졌다. 아내가 마당으로 나와 그의 옆에 앉았다.
“별이 참 많네요. 당신 얼굴도 밝아 보여서 좋아요.”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함께 해보자고요. 실패할 수도 있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일단 해보는 거죠. 후회는 안 하고 싶으니까.”
아내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미소 지었다가, 잠시 후 낮게 속삭였다.
“그래요, 이제 당신 차례였으니 앞으로는 내 차례도 찾아야겠죠. 나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어요. 단순히 당신을 따라온 게 아니라, 나도 내 몫의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 한준은 아내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두려움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 번져왔다.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실패할 수도 있고, 병원비가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인연, 그것이 내가 버틸 힘이다.
별빛 아래서 그는 속삭였다.
“씨앗이 흙을 뚫고 나오듯, 두렵더라도 함께라면 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