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하반기(가을호와 겨울호) 발표시 다시 읽기
2019년 하반기(가을호와 겨울호) 발표시 다시 읽기
시인 · 문학평론가 김한빈
시는 유추(類推)에서 시작된다. 유추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대상의 속성을 관찰하였다가 이와 다른 범주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때 관찰한 대상과 적용한 범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심도 있는 유추가 성립한다. 또한 새로운 범주에 적용할 때, 그것이 추상적인 관념의 영역일수록 더 성숙한 유추가 된다.
가슴 시원하게 털어내고 싶은 기억
답답하게 엉켜 꼬일 대로 꼬인 사연
시원하게 풀 수 있을까
아무리 답답하게 꼬인 세상이지만
풀지 못할 사연 어디 있을까
-<중략>-
꼬들꼬들 배배 꼬이고 바짝 말라 엉켜있어도
팔팔 끓는 냄비에서
하나둘 부드럽게 풀리는 라면
저 환상적 현상
우리도 저렇게 풀 수 없을까
응어러진 아픔 참는 열망의 시간
스스로 내려놓고 낮추며
먼저 다가서는 용기로 풀어놓는다면
서로가 부드럽게 어울릴 수 있음을
저 라면이 보여주고 있다
- 「라면처럼」 권오상, 47호 겨울호
현대사회의 개인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의사소통 과정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 시는 ‘끓는 냄비에서 쉽게 풀리는 라면’을 보고 소통 가능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유추적 발상을 한다. 엉킨 밧줄을 칼로 내리치는 솔로몬식 해법은 폭력적인 요소가 내재하지만, 끓는 물에 풀리는 라면에는 평화로운 상호화해와 승화 작용이 가능하다.
시는 이처럼 유추적 사고를 통해 출발한다. 그러나 관찰 대상과 표현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이 잠복한다. 동시(童詩)는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한 순수한 눈을 통해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시적 언어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기성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관찰한 의미를 순진한 기교의 언어를 통해 시적 형상화를 한다. 사실 모든 시는 이러한 동시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다만 동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일 따름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숨어있는 진리를 발견하여 드러내는 시인의 본령을 지키고, 더 심도 있고 성숙한 유추적 사유를 위해선 시인 자신의 인식 지평을 부단히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해거름 한 쌍의 직박구리가 서로 한 마장쯤을 어림하여
떨어져서 한 마리가 저녁 하늘에 닿은 제 갈라진 손짓을 보내자
한 마리가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는 열 마장쯤을 더 날아가
수녀원 담장에 후회하듯 앉아서는
뀌이뀌이익 뀌익 뀌이익
저를 떼어 논 직박구리 한 마리들이 그 짜낸 울음의 빈 구멍을
틀어막듯 어둠이 온다 산 것들이 다
나도 너처럼 그립다고 마주 받지 못하는 칠월
개개의 주소가 따로 없는 수녀원 담벼락을 두드리는 저녁 장맛비
- 장마」 전문, 김길전, 46호 가을호
해 질 무렵 칠월 장맛비가 열 마장 깊은 산속 수도원에 내린다. 이 시는 탈속적 공간에서 고독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익명성에 덮인 수녀들이 때로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삶의 비애를 직박구리 새의 울음소리와 장맛비 소리, 이중 화음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물론 송수권의 시가 오버랩 되어 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되지만 말이다.
시는 개인적 상징을 구사할 때 비로소 시인 자신의 시가 된다. 이 시의 발상과 표현이 송수권의 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장맛비와 새 울음소리, 수녀원의 돌담 등의 시어들은 시인 자신의 개인적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지루한 칠월의 장마에 직박구리 새의 울음소리가 외부세계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견고한 수녀원 돌담과 어울려 비애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를 쓴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만의 상징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닐까. 이러한 개인적 상징을 만들지 못한 시는 창조적인 시가 아니다.
태초부터
마디마디 빈 가슴은 기억의 공간이었다
살아온 나날들의 추억이 가득 차면
매듭을 만들고
그 매듭 위로 한 계단 허공을 올라섰다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다
마디마다
번개와 천둥, 바람 소리,
새들의 인사, 꽃들의 웃음,
별들의 찬란함이 가득 들어앉아 있다
맨몸으로 견딘 엄동설한의 매서움과
흔들리며 보았던 하늘 하며
스쳐 간 계절의 색깔들
내 몸을 적셨던 소낙비의 눈물까지
둥글게 둥글게 말아서 기억하고 있다
가끔씩
이런 기억들을 세상에 풀어 놓기도 한다.
번개와 천둥 마디는 죽비로
흔들리며 보았던 하늘의 기억은 연으로
자연의 소리는 단소로
가을의 서늘함은 죽부인으로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날에는 초혼의 깃발이 되기도 한다
- 「대나무」 전문, 최성경, 46호 가을호
시 창작의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제기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다. 관찰의 시선이 대상의 발원부터 종말까지, 또는 전생부터 내생까지 윤회를 넘어서면 한 편의 대상에 대한 고고학이 될 수 있다. 미셸 푸고는 지식의 고고학을 말했지만, 우리는 시적 대상의 고고학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대상의 숨겨진 본질이 잘 드러날까? 관찰의 깊이는 시인 자신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다.
이 시는 대나무 마디에 저장된 기억들이 다시 세상에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재생되는 두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성공 여부는 메모리칩 같은 마디에 가득 차 있는 정보로서의 기억 혹은 추억들이 어떠한 콘텐츠인가에 달려 있다. 번개와 천둥, 바람 소리,/ 새들의 인사, 꽃들의 웃음,/ 별들의 찬란함// 그리고 맨몸으로 견딘 엄동설한의 매서움과/ 흔들리며 보았던 하늘 하며/ 스쳐 간 계절의 색깔들/ 내 몸을 적셨던 소낙비의 눈물// 게다가 이러한 기억과 추억들이 다시 재생된 이미지들(죽비, 연, 단소, 죽부인, 초혼의 깃발)로 승화되는 시적 구조가 주제의 단일성이나 간결성을 저해하는 요소인지, 내용의 풍부성을 담아내는 요소인지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기억과 그에 대응하는 재생된 이미지 하나를 짝을 지어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응집력이 있는 시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아닌 적 있죠
액체와 똑같은 적 있죠
저곳에서 이곳으로 유체이탈한 적 있죠
동그랗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풍선을 부풀리듯 나를 부풀린 적 있죠
엄마가 손바닥에 겨울 햇살을 말아 쥐고
배를 쓰다듬으면 그 감촉에 전율한 적 있죠
손으로 전해지는 교감과 일체감
그렇게 완별할 수 없었죠
그건 도착하지 않은 세상
내가 붙잡아야 할 깃발인 거였죠
엄마가 들려주는 노래에 심취해
내 영혼은 무한의 바다를 건너는
한 척의 배처럼
소리 없이 흔들리며 진화해 갔죠
열 달을 세 들어 살던 방
엄마와 내가 합체됐던
비장함마저 느껴지던 순간들
그 존엄의 미학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죠
난 난 영원히 잊지 못하죠
- 「엄마의 방」 전문, 김윤수, 47호 겨울호
이 시는 페미니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남성성이 공격적이고 투쟁적이고 배타적이고 자기 우월적 과시욕이라면, 반면에 여성성은 사랑과 평화, 희생과 봉사, 포용적이고 수평적 관계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남성성에 의해 발달한 것이라서 속도 중시, 직선적이고, 호전적이고, 환경 파괴적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여성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일리는 있다. 왜냐하면 문학과 예술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신화·원형적 상징에서도 그 차이를 인증하고 있고, 이전 시대의 특징을 남성성으로 규정짓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마의 방’에 열 달을 세 들어 살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 모든 인간은 인종과 젠더와 문화와 언어를 뛰어넘어 원초적인 모성(엄마)과 연결된 비장함과 존엄성을 함께 부여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할 수밖에 없다. 이제 엄마의 방은 현대 과학기술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 현대사회를 ‘신이 떠나버린 궁핍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궁핍한 시대를 건너는 대안으로 원초적 모성의 회복을 제시할 수 있다.
나무는 초록빛으로 변한 물
꽃은 꽃물이 든 물
초록빛 나무, 물의 그늘에서 아래서
하양, 노랑, 분홍 꽃물이 핀다
실뿌리 같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짙푸른 물
대지를 적시고 대양으로 나아간 물이
지구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뭇 생명을 번성하게 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작물이 자라고 사람이 생겨나는 일, 물이 하는 일
테라 로사
말라가는 사막 아래 은밀히 흐르는 물길,
사막을 걷는 낙타는 물의 냄새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간다
초록빛 무성한 나뭇잎에 갈색 물이 드는 때,
작고 알찬 열매로 맺혔던 물이
대지로 스며드는 시간에는
온 누리를 에워싸고 흐르던 물빛도 순해진다
만상이 잠드는 겨울,
지구를 둘러싼 물은 하얀 눈의 모습으로
대지를 포근하게 감싼다
겨울의 물이 하얀 육각형, 눈의 결정으로 빛나고 있다
- 「지구를 둘러싼 ∞의 물」 전문, 손애라, 47호 겨울호
생명의 근원이자 여성성의 상징인 물은 확실히 ‘노자’와 관련이 깊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단언하지 않았나.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물로 이뤄져 있고, 그 지구 또한 물이 대부분이다. 물은 겸손하여 아래로 흐르고,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잘 적응하고 조화를 이룬다. 이 시는 시상의 규모가 공간적으로는 전 지구적이고, 시간상으로는 사계절을 담고 있다. 스케일이 웅대하다. 물의 다양한 변모 과정이 바로 생명 활동과 직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시적 경향을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라고 부른다.
<문장21> 종합문예지 2020.3 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