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과 독선의 시대’
김한빈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다양한 논쟁거리의 심각성을 환기하는 개념이 ‘탈(脫)진실’이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 문제를 놓고 개최된 광화문과 서초 검찰청 앞 대규모 찬반 집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탈진실(포스트 트루스, Post-truth)은 진실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현상이다. 미국 희곡 작가 스티브 테쉬흐(1992)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 올해의 국제적 단어로 선정한 바 있고, 작가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가 ‘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올해 5월에 번역 출간되었다(2019).
이제 우리는 누구나 가짜 뉴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정보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가짜 뉴스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가짜 뉴스는 동일한 실체를 갖고 있을까? 왜 그것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다루는 것이 타당할까? 가짜 뉴스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짜 뉴스’는 ‘내게 불리한 뉴스’에 가까울 따름이고, 그에 대한 사회적 제재는 오로지 적에게 그 화살이 향할 때 정당화되기 일쑤이다. (위 책 정준희 교수의 <해제>에서)
실제 일어난 일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 ‘탈진실’ 현상은 확증편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확증편향은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 정보의 객관성과 상관없다. 이러한 확증편향이라는 편견을 가진 미디어 사용자는 선택적 노출이라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신념이나 믿는 체계에 어긋나는 정보를 거부하는 정보 기피 현상을 보인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들, 이를테면 제3 지대를 용인하지 않는 정치권의 여야 대립과 진영 논리, 남녀 성(性)갈등뿐 아니라, 세대 간의 갈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말다툼까지 이러한 확증편향에서 유발된 혐의가 짙다. 종교나 이념의 독단(獨斷, 도그마)에 치우친 담론은 필연적으로 독선(獨善)을 초래한다.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한다. 상대방의 주장은 듣지 않는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두 기관차가 마주 보고 달리는 형국이다.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상태에서 양보하지 않다가 극한으로 치닫는 치킨 게임이다.
여론은 민주주의의 초석이다. 그러나 국민의 일반적 의지를 담아낼 건전한 공론장이 해체될 위기를 맞고 있다. 정치적 공론장의 두 기관인 정당과 의회가 본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정당은 명사들 사이의 친밀한 정치적 대화와 토론의 장소가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거대 규모의 관료적 조직으로 변화했으며, 의회는 실질적 정치 토론의 무대가 아니라 거대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이익 실현을 위한 형식적 장소로 전락해 버린다. 여기에 대중매체와 여론 조사 기관들의 협력으로 정당들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여론을 활용한다. 여론은 정치 권력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비판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상실해 버린다.(하상복, 하버마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그래도 믿을 것은 이성뿐이니까 비판적 이성을 갖추고 진실과 가짜를 판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 경청하는 자세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타자와 공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성을 견고히 쌓아 올리고 그 속에서 안주할 수 없지 않은가.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다. 왜냐하면, 성찰은 반성을, 반성은 개선을, 개선은 진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밖으로 비판적 이성을 발휘해야 하지만, 안으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참여연대 내부의 자기비판과 여야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은 성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