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마저 설득하는 힘
#6. 집념과 열정, 그리고 설득
: 운명마저 설득하는 힘
<노인과 바다>를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 세계명작 이래서 읽었더니 할아버지가 바다에서 혼자 고기 잡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이게 뭔가 싶은데, 이틀 밤낮을 걸려 근근이 잡은 고기는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상어들에게 뜯어먹혀 결실 그마저도 없이 소설은 끝이 났다. 허무했다. 이게 무슨 세계명작이냐, 그랬더랬다. 그렇게 10년이 더 지났다. 뭘 모르는 초등생이었지만 '그래도 이 책에 뭔가가 있다' 싶었던지 <노인과 바다>만큼은 어디에도 팔아먹지 않고 먼지와 세월을 착실히 받아내게 하고 있었다.
먼지를 털고 다시 만난 <노인과 바다>는 그냥 노인이 고기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절대 굴하지 않는 인간정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해불가였던 할아버지의 똥고집은 10년이 지나서야 인간의 집념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에 대한 감동으로 바뀌었다. 노인은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굴하지 않는 집념.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숭고한 존재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빌리 엘리어트>를 좋아한다. 영화로 열 번은 더 봤지만 뮤지컬의 감동은 영화 이상, 상상 이상이었다. 뮤지컬에서 빌리 역을 맡아 믿기지 않는 춤과 연기를 선보인 10살 소년 엘리엇 한나는 이런 말을 했다. 빌리 역을 맡는 배우로서 꼭 지녀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집념'이라고. 실재하는 엘리엇 한나란 어린 소년의 집념이 이야기 속 빌리의 집념과 오버랩되면서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집념이라는 정신이 얼마만큼이나 인간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격상시키는지 <노인과 바다> 이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집념과 열정은 세상 모든 것을 설득시킨다. 빌리를 보며 든 생각이다. 아버지 재키는 빌리가 발레하는 것을 목숨 걸고 반대했지만 체육관에서 우연히 빌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아이의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단번에 결심한다. 아버지는 마치 접신을 하듯 무아지경 속에서 춤을 추는 아들의 모습에서 한 인간의 집념을 본 것이다. 빌리는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해냈다. 말로써는 한 번도 발레를 하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춤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꿈을, 집념을,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설득시키는 일은 결국 집념과 열정으로 이루어진다. 설득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왔고 그 책 속에는 심리학에 근거해 타인을 설득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돼 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떠한 논리적인 방법론을 들이밀지라도 인간의 집념과 열정만큼 강하고 진실한 설득의 방법은 없다고 믿는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설득당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상대방의 열정 하나에 감명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적이 많았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보여준 집념은 결국 하늘을 설득시킨 행위였다. 84일째 고기 한 마리를 못 잡던 노인에게 85일째가 됐을 때 믿을 수 없이 큰 청새치가 걸려든 것은 노인이 오직 집념 하나로 하늘을 설득시킨 일이 아니었을까? 비록 상어에게 청새치의 살점을 다 뜯겼을망정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를 갖고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 역시 노인의 집념이 상어떼를 설득시킨 것 아니었을까?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노인이 그럼에도 허무함을 느끼지 않은 그 마음, 그것은 스스로의 집념이 스스로의 마음을 설득시킨 것 아니었을까?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빌리는 자신의 꿈에 대한 집념으로 아버지를 설득시켰고, 탄광촌 마을 사람들을 설득시켰고, 망쳐버린 오디션 끝에서 심사위원들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결국은 가난하고 희망 없는 탄광촌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마저 설득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집념과 뜨거운 열정. 그것은 한낱 사람의 마음은 물론이요, 우리 앞을 가로막은 차가운 운명과 저 높은 곳의 신마저도 설득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