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메이킹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화신 Mar 14. 2016

무엇이 강모연을 삐뚤어지게 했나


[TV리뷰]
 직업소명 지키기 힘든 현실...
KBS2 <태양의 후예> 강모연의 상처와 성장





"나 이제 수술 안 해요. 수술 실력은 경력이 되지 못하더라고요. 금방 돌아갈 거고 돌아가면 다시 있던 자리로 올라가야 해서 아주 바빠요."


강모연(송혜교 분)이 난파선 해변에서 유시진(송중기 분)에게 한 말이다. 강모연의 마음은 확실히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수술 실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단지 빽이 없단 이유로 교수 임용에 세 번이나 탈락한 후부터였다. 집안 좋은 동기에게 교수 자리를 뺏기고, 병원 이사장의 성추행에 가까운 스폰서 제의를 거절한 '죄'로 우르크로 강제 파견됐으니, 천사나 바보가 아닌 이상 삐뚤어지지 않고는 못 배겼을 테다.


이렇듯 차갑고 더러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의사 강모연은 내적 혼란에 빠진다. 의사로서의 행보뿐 아니라 직업적 소명까지도 송두리째 흔들리는 지경에 이른 것. 우르크로 쫓겨나기 전 방송으로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대외적 성공이 강모연에게 진정한 보람을 준 것도 아니었다. '방송하는 의사'도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며 자기합리화를 할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쿨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눈엔 쓸쓸한 것이 어렸다. 결국 그것은 자조 섞인 한탄이었다. 그렇게 지옥(임용 탈락)에서 천국(인기 의사)으로, 다시 지옥(우르크 파견)으로 오가는 사이에 강모연의 마음은 상처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한 것. 우르크라는 '유배지'에서 비로소 강모연은 직업적 소명을 되찾는다. 지진이 계기였다. 파견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떠나는 날, 우르크에 규모 6.7의 강진이 덮쳤고, 선발대로 떠났던 그녀는 군의 강경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우르크 본진으로 되돌아온다. 강모연은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은 발전소 건설현장에 달려가 의료팀을 리드해 구조활동에 돌입한다. 죽어가는 환자 앞에 선 강모연. 구조 가능한 환자의 팔목에 묶는 노란띠를 사망자의 표식인 검은띠로 바꿔매면서, 강모연은 눈물을 흘렸다. 내내 공허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 순간, 다시 본래의 빛을 되찾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내레이션이 차분하게 흘렀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그녀의 초심, 순수했던 사명. 의사 가운을 처음 걸치며 이 선서를 읊었을 때, 그녀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누가 그녀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빛바래게 만들었는가. 그것이 파렴치한 개인이든 거대한 사회악이든, 강모연은 결국 자신 안의 정의로 그것과 싸우는 길을 택했다. 우르크의 재난 한가운데서, 죽음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순결함을 되찾음으로써 그녀는 진정한 승리를 거두었다.


강모연의 독백은, 의업에 종사하며 무수히 상처받고 흔들려야 했던 자신의 순수했던 소명을 다시금 확고히 하는 그녀의 '성장'이었다. 그렇게 강모연은 터널처럼 긴 혼돈을 지나 진짜 의사로 거듭났다. 자신이 진정 바랐던 건 방송을 통한 명성도, 개원을 통한 부의 축적도 아니었단 걸 구호현장에 던져진 그제야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강모연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직업적 소명과 현실 사이에 끼어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 기자는 진실규명과 복잡한 이해관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군인은 나라를 위한 희생과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방황한다. 군인의 소명 앞에서 언제나 굳건했던 유시진 또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이 강할수록 정작 사랑하는 여자 곁은 지켜주지 못하는 아이러니. 어느 날 강모연이 전우의 죽음에 대해 물어오자 유시진은 황급하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얄짤없고 짓궂은 삶의 아이러니. 그것들이 유시진과 강모연을 쓸쓸하게 만들 때, 그들의 마음을 지켜주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전쟁 속에 놓인 국민을, 죽음 속에 놓인 환자를 지키려는 마음. 형태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그들의 정의로운 가치관이, 그들로 하여금 남녀 간의 사랑을 뛰어넘어 인류를 향한 숭고한 사랑에 헌신하도록 만들었던 것 아니었을까?


군인 유시진과 의사 강모연을 응원한다. 또한 생업 전선에서 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 고뇌의 순간들을 응원한다.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정당한 권리마저 빼앗는 이 쓸쓸한 현실 속에서, 강모연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손화신 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종 업데이트 16.03.15 10:23





매거진의 이전글 "전 의사입니다"... 이토록 섹시한 이별이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