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심뻑 박정민씨,
전 'HERO'가 제일 좋았습니다
[신곡리뷰] 영화 <변산> OST '변산 모놀로그'
'랩알못'(랩을 알지 못함)들이 모여 래퍼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 참 답없는 발상이다. 래퍼 학수 역을 맡은 박정민은 래퍼 근처에만 가본 천상 배우고, 이준익은 메가폰만 잡아봤지 MIC는 잡아본 적 없는 천상 감독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여 부르르 칵칵 랩을 하는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변산>이다.
<변산>이 지난 4일 개봉하면서 영화 속 랩을 모은 사운드트랙 < Byunsan Monologue > 음원도 발매됐다. 여기엔 주인공 박정민이 직접 작사한 9곡이 담겼다. a.k.a 심뻑 학수가 <쇼미더머니>에 출사표를 던지며 부르는 허세로 점철된 곡 '심뻑', 'DONE',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담은 '식탁', 꿈을 향한 갈망과 현실의 생활고를 그린 '야야야', 고향에 대한 분노와 그리움의 이중적 마음을 담은 'Slow Driver', '에라이', '향수', 지난 삶에 대한 반성과 선미(김고은 분)를 향한 마음을 표현한 '노을' 등이다. 보시다시피 박정민이 아닌 학수가 화자가 되어 풀어간 곡들이다.
그런데 딱 한 곡만 결이 달랐다. 첫 번째 트랙 'HERO'다. 학수가 아닌 배우 박정민의 입장에서 그가 영화에 출연하게 된 배경을 가사로 옮긴 곡이다. 듣는 이를 킥킥대게 만드는 위트 넘치는 노랫말이 인상 깊다. 글 잘 쓰는 배우로 소문난 박정민은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의 저자이기도 한데, 'HERO'는 개봉 전 그가 브런치 플랫폼에 올린 출연 비하인드와 오버랩된다. 그가 브런치에 적은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갓준익갬독륌'이 화면에 떠있었다. "네, 감독님." "정민아 너 랩 잘하지?" "..." 많은 생각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좋아하죠." "바와이만큼 하지?" "..." 많은 사유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 분은 쇼미 1등인데요." "아 그러냐? 그럼 도끼만큼은 하지?" "..." 참아야 한다. "그 분은 심사를 하시는 분인데요." "아 그러냐? 너 노래방에서 랩 잘하던데." "..."
그렇게 시작된 <변산>이었다. 노래방에서 랩 한 번 부른 죄로 비와이와 도끼의 코를 동시에 납작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등에 업게 된 박정민. 그는 영화에서 <쇼미더머니> 6년 개근 래퍼 심뻑이 되어 상처로 얼룩진 고향과 잡히지 않는 꿈,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힙합 리듬에 녹여 분출하게 된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시작된 오랜 마음의 과제를 고향친구 선미의 도움으로 풀어나가는 성장의 여정은 중요한 물줄기다.
그럼 다시 'HERO'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노래에 담긴 <변산> 메이킹 스토리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와 청춘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 <변산> 영화 속 이야기보다 오히려 <변산>의 탄생 스토리 그 자체가 더 '청춘이야기' 같다. 이준익은 랩 잘 몰라도 랩 영화 만들고, 박정민은 랩 잘 못해도 래퍼 연기하고, 두 사람은 주변에서 '별 걸 다하네' 비웃어도 밀어붙여 영화를 완성했으니까. 이런 게 청춘이지 뭐.
"이런 거 본 적 없을걸 니네/ 제목이 변산이래니까 뭐 사극이녜/ 아냐 주인공이 랩하는 영화야 인마/ 하니까 하나같이 에미넴의 에잇마일/ 야 그랬으면 주인공으로 나 쓰겠니/ 더콰나 도끼 아님 맫씨나 던밀스겠지/ 몰라 59년생 준익이형 믿고 함/ 고(go)하지뭐 그가 다시 청춘들에게 고함"
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극아니고 주인공이 랩하는 영화인데 왜 나를 캐스팅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만 그래도 '59년생 준익이형 믿고 go' 하는 박정민의 객기에 일단 박수를 보낸다. '이준익 감독님'이 아닌 '준익이 형'이라 부르는 가사에서 느껴지는 건 건방짐이 아니라 이준익이란 사람을 자기 같은 청춘으로 인정하는 존중과 친근함이다.
"근데 잠깐 함정 이 양반 힙합 모른대/ 유아인더트랩 어이가 없네/ 지옥에서 돌아온 형인데 모르면 어때/ 은퇴번복 또 그러면 안 돼 고작 열세 번째/ 혈기 왕성한 육십살 준익이형 이야기/ 자, 형이 밀어붙여 우리가 퍼부을라니까/ 나 헐크 할라니까 니가 캡틴 아메리카/ 어벤저스 날라다니래 빡빡이 닉퓨리가"
알고 보니 빡빡이 (이준)닉퓨리 형이 힙합을 모른다는 사실이 많이 어이없지만 '형이 밀면 우리가 퍼부을' 각오로 박정민은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헐크, 너는 캡틴 아메리카 이러면서 사이좋게 포지션도 나눈다. 스스로 어벤저스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그때부터 그들은 어벤저스다. 이렇게 청춘은 'HERO'가 된다. 노래 제목이 납득되는 순간이다.
"Ready Action you already know/ we are stronger than super hero"
김고은이 부르는 위의 파트는 이 노래의 핵심이다. '너는 슈퍼히어로보다 더 강하다'는 한 마디는, 웃긴 가사 속에서 묵직한 한 방을 날린다. 모든 청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쟤가 랩을 해? 아주 그냥 별걸 다 하네/ 안 봐도 뻔해 요요 췍췍 거리겠지?/ 니들 짹짹거리겠네 안 봐도 뻔해/ 울 아빠도 멍해져서 췍췍 하는거녜/ 아부지 이거 힙합 영화 아니라고/ Brrrrr kak kak 붕붕 이런 거 못한다고"
니 따위가 무슨 랩을 하느냐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캡틴 아메리카 박정민에게 마음 쓸 거리도 아니다. 'Brrrrr kak kak 붕붕 이런 거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나서 그냥 내 길을 내 호흡에 맞게 걸어갈 뿐이다. 심지어 아부지도 췍췍 거리는 그런 거냐고 놀라 물으시지만 안 되면 짹짹거림부터 시작할 작정으로 MIC를 잡고 닉퓨리 형을 따른다.
"흑역사 된다고? 내 인생이 흑역사뿐이라 괜찮아/ 사뿐히 즈려밟힌 게 한 두 번이냐고/ 야 삽 푸면 좀 어때 한 번뿐인 인생/ 이야 눈 가리고 처들이대는 잣대가/ 막 재단해대는 그 개소리가 탁하니 악하고/ 어이랑 다를 거 없지 않냐?/ 시팔 고작 십오센치 자 대고 백칠십팔 내 키 재다가 걔네가 더 개 빡칠 걸/ 멋대로 삿대질 해들 해뜰날/ 니들 손가락은 정상을 가리킬 걸"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사뿐히 즈려밟히며 꽃같은 인생을 살아온 박정민에게 흑역사 따위는 두렵지 않다. 그 이유(인생이 이미 흑역사)가 조금 가엽긴 하지만 어쨌든 저 패기가 속시원하다. 삽질 좀 하면 어떠냐, 한 번뿐인 인생인데 까짓것 도전해보겠다고 그는 말한다. 더 속시원한 건, 자기들 멋대로 재단해대는 주위의 잣대를 부숴버리는 저 일침이다. 겨우 '십오센치 자 대고 백칠십팔 내 키를 재려한다'는 비유는 타인이 함부로 잴 수 없는 자기 내면의 거대한 영웅을 인지하고 자부하는 한 마디다. 그리고 마지막, 니들 손가락은 정상에 올라가 있는 나를 가리킬 것이라는 선포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란 확신이다.
청춘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변산> 메이킹 스토리 같은 것. 잘 몰라도, 잘 못해도, 흑역사 생겨도, 무시당해도 그냥 밀고나가는 그런 것. 삽질을 아주 예술적으로 하는 것. 폐항처럼 가난한 청춘은 그렇게 영웅이 된다.
▼ 박정민이 직접 연출한 'HERO' 뮤직비디오. B급 미학의 결정체다.
기사입력 18.07.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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