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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다는 것은

by 원당

어느 한 남자의 하루는 강아지를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야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강아지를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그다음 날도, 또 하루가 지난 그 어떤 날도 이와 별다르지 않은 일상이 이어진다.

한 인간의 삶도 메마르고, 강아지 또한 불쌍하다.

하루하루의 변화 없는 삶을 사는 주인이나 그런 주인을 잘못 만난 강아지나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혼자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혼자나 홀로나 그게 그것이지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몰라도 엄연한 차이가 있다. 혼자 있으면 진짜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홀로 있으면 보고 즐길 것이 존재하며 누릴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혼자의 처지가 되면 외로움이 가득한 것이고 홀로 있으면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다. 고독 속에 있을지라도 외로움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외로우면 혼자 슬픔을 안고 가야 한다. 주변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당해 절망하게 된다. 이에 비해 고독은 홀로 있어도 즐거움이 있다. 무한한 공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이상을 확장해 더 넓은 세계로 나가게 한다. 고독 속에 있는 시간이면 끊임없는 상상은 당연하다. 지난날을 돌아보고, 다가올 시간의 중심에 있게 하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으로 가게 한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바로잡고, 벽돌 한 장 잘못 올렸으면 되돌리는 시간을 벌며, 거친 풍파가 몰아치더라도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


이와 반대로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각도 멈추고 행동도 멈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마저 잃게 한다.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어둠의 동굴로 몰아넣는다. 사회적 고립과 세상과의 단절로 숨구멍을 조이게 한다.


흔히들 많은 수의 노인이 바깥세상과의 단절로 '고독사'했다고 연일 떠들지만, 이는 적절한 용어 구사가 아니다. 고독해서 생명줄을 놓은 것이 아니라 외로워서, 외로움에 온몸이 절어 그리된 것이다.


소금물에 담근 배추가 절고 절어 본연의 형체를 지우듯 사람이 외로움에 절면 주저앉는다. 옆에 있던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그 상대방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줄을 놓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듣지 않았던가. 한겨울에 문고리를 만지면 손이 쩍쩍 달라붙듯 외로움은 숭고한 생명줄마저 얼어붙게 만든다. 외로움이 극에 달하면 그 존재마저 부정한다.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성공한다'의 저자 쓰다가즈미도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혼자만의 시간, 즉, 고독은 생각하는 힘이며, 창조의 원천이라 했다.


시카고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가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노년에 외로움을 느끼면 비만보다 두 배나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또한 영국 엑서터대와 미국 워싱턴 고래 연구소는 수컷 외톨이 범고래가 그렇지 않은 놈보다 일찍 죽는다고 했다. 북태평양에서 범고래 76마리를 40여 년간 관찰하였는데,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수컷은 다른 수컷에 비해 빨리 죽는 개체수가 더 많았다고 하면서.


얼마 전 나는 외로움에 떨던 남자와 헤어졌다.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 수습 기간을 간신히 채우고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또다시 외로움이 가득한 단칸방에 갇힐 게 분명하다. 본 부인과 이혼하고 자녀들마저 곁에 없는 그는 그 적적함을 술로 희석한다고 했다.


그가 회사에 들어와 한 달을 채운 날을 축하하려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그와 해장국집에서 외로움을 걷어내는 잔을 기울이지 않았던가. 어쩜 그는 오늘도 이른 새벽에 강아지와 산책하려고 집에서 나오고 있지나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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