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도와줘
늘 보던 창이 없고 창에 비치던 낯익은 얼굴이 없다
산과 집, 나무와 꽃이 눈에 설고 스치는 얼굴이 하나같이 멀다.
신경림 시인의 시 ‘사막’ 도입부다. 지금 그녀의 처지도 별다르지 않다. 언덕에서 불어오던 바람과 사과나무 그늘서 땀 훔치며 바라보는 하늘도 이제는 없다. 수건을 둘러쓰고 호미질하는 그녀의 봄은 당분간 오지 않을 듯하다.
“서울로 데려간다기에 큰 병원에 입원시키는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녀. 병원은커녕 방안에 처박아 넣는 겨. 치료비와 간병비도 큰딸이 내줬어.”
그녀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내가 무슨 죄가 크다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자식 있으면 뭐 하고 돈 있으면 뭐 해. 복숭아 뼈가 으스러지고 뭉그러져 인공 뼈를 갖다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뼈를 지지하라고 철심을 박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보름 만에 퇴원을 시켜. 사람 노릇 못할 거면 차라리 죽게 내버려나 두지…….”
그녀는 구정을 앞둔 전날 저녁 무렵 이웃집에 놀러 가는 중에 사고를 당했다. 길이 얼어붙어 조심한다 했지만, 왼쪽 다리가 접힌 상태에서 양쪽 다리가 일자로 찢어지며 미끄러지고 말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몰려드는 통증으로 그녀는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그런 데다가 집이 외지고 과수원으로 에둘러 있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 동네 병원마저 명절 밑이라 열지 않아 응급조치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둘째 딸과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런 중증 환자가 치료는커녕 방 안에 갇혀 가족들의 눈치를 살핀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평생 다리를 못 쓰게 될지 모르는데도 지금 그녀의 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말을 하던 중에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오는지 그녀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아침에 다들 집을 나가면 그녀는 방안에 혼자 남는다. 햇살이 눈 부셔도 꽃과 나비가 춤추는 향연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부러진 다리를 움켜쥐고 창밖 하늘을 내다보는 일이 전부다. 관객 없는 텅 빈 무대 위에서 독백하며 혼자 일어서는 연습을 한다. 화장실 가는 게 겁나 물도 마시지 않고 먹는 것도 줄인다고 했다. 그런 몸으로 택시를 부르고 혼자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는다.
그녀에게 삶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 일이다. 억지로 물어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게 할 우를 범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바다 구경 가자고 꼬드길 일도 아니다. 모래사막을 걷는 그녀를 상상하는 것조차 무섭다.
원무과 의자에 대기하고 있던 60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도 내 얘기를 듣고는 혀를 끌끌 찬다.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지 허울 좋다고 데려왔다가는 떠받들고 살지도 모른다며. 오죽하면 아들이 일류 대학 나오면 국가에 받치는 거고, 그보다 좀 못나면 장모만 호강시키는 일이라는 말이 떠돌까. 하긴, 보험금을 타내려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나, 자식이 부모를 내다 버리기까지 하는 세상이다. 시어머니가 연금을 타는지 알아보고 시집을 간다고 버젓이 말하는 요즈음이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보릿고개를 넘는 시절에도 그녀는 남부러울 게 없이 쌀밥을 먹었다. 그런데 남자 얼굴 하나 보고 시집을 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남자는 얼굴만 반반했지 가정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다. 난봉꾼을 만나고 노름에 빠지고 술만 퍼 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방을 들락거리다 결국 있는 돈 없는 돈 다 빼서 밤중에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뒤틀렸다. 부역을 나가고 트럭에 실려 땅콩을 심고 고추를 따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녀는 조개껍데기 안에 있는 물컹거리는 조갯살처럼 자식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 창고에 처박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나 다름없다. 눈에 띄지 말았으면 하는 경멸하고 싶은 한 마리 벌레 같은 존재. 산다지만 진정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닌 껍데기를 깨고 나오지 못하는 삶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길은 존재 인식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를 탓하지 않고 못 배우고 없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주는 가족이 옆에 있어야 한다. ‘너’로 인해 내가 있고 ‘너’를 인정해 줄 때 ‘내’가 존재한다. ‘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 ‘우리’는 없다.
지상의 모든 존재는 외롭다.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둥지로 돌아온다. 명예와 권세가 아무리 드높아도 옆에 누가 있어줘야 그 이름은 빛난다.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진정한 꽃이 된다. 꽃을 피운다.
병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내리나 했는데 봄비가 부슬부슬. 어둠이 찾아드는 도로엔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자동차 경적소리로 요란하다. 다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녀는 집에서 나오고 싶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