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해”라는 문장
천년 사직의 마지막은, 『삼국사기』 경순왕 9년조 한 줄에서 시작된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四方土地盡爲他有. 사방의 땅이 거의 남의 차지가 되었다는 말부터 박는다. 國弱勢孤,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고립됐다. 不能自安, 스스로를 지킬 수 없게 됐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乃與群下謀, 신하들과 의논했고, 擧土降太祖,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했다고 적는다. 문장은 차갑고, 결론은 단정하다. 왕조 하나가 접히는 순간이 이 정도 문장으로 끝난다는 게 이상할 만큼 담담하다.
이어서 기록은 장면으로 바뀐다. 대화가 붙는다.
“王子曰:『國之存亡 必有天命… 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국가의 존망에는 천명이 있다는 말로 시작하면서도, 태자는 그 천명 뒤에 숨지 않는다. 버틸 만큼은 버텨야 한다고 한다. 충신과 의사와 민심을 모아 끝까지 지켜보자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찌른다. 一千年社稷, 천 년 사직을, 一旦輕以與人,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느냐고.
경순왕의 답은 더 반듯하다. 반듯해서 더 걸린다.
“王曰:『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強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孤危若此, 외롭고 위태한 형편이 이 지경이다. 勢不能全, 형세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 旣不能強 又不能弱,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을 윤리로 고정한다.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무고한 백성의 肝腦가 塗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텐데, 吾所不能忍也, 그것만은 차마 못 본다고.
말은 여기서 끝나고, 인물은 다음 줄로 넘어간다. 『삼국사기』는 태자의 퇴장을 이렇게 적는다.
“太子泣而退 入皆骨山 依巖而坐 麻衣草食以終其身。”
泣而退, 울며 물러나. 入皆骨山, 개골산으로 들어가. 依巖而坐, 바위에 기대앉고. 麻衣草食, 마의초식. 以終其身, 그렇게 생을 끝냈다고.
여기까지를 처음 읽으면 숙연해진다. 멸망의 순간이 기록으로 굳는 소리가 난다. 왕은 ‘백성’을 말하고, 태자는 ‘사직’을 말한다. 둘 다 옳은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순간에 나온 말이라고 믿기엔 온도가 다르다. 태자의 말은 삐걱거린다. 천명을 말하면서도 책임을 놓지 않는다. 그 모순이 사람 말처럼 들린다. 반대로 왕의 말은 너무 정리돼 있다. 울분도, 떨림도, 막막함도 문장 밖으로 밀려난 느낌이다.
나는 그 정리됨에서 자꾸 걸린다. 肝腦塗地. 백성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진다는 말은 끔찍한데, 표현은 이상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비명이라기보다 설득의 문장에 가깝다. ‘이 결정을 내리는 이유’를 한 번에 정돈해 주는 문장. 멸망 직전의 군주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생긴다. 생각이 아니라 문장으로.
여기서 흔히들 “그럼 가짜냐”로 바로 가는데, 사료의 위험은 거짓말보다 ‘필요’에 더 가깝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가만큼, 어떤 말이 남아야 했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왕조가 바뀌는 자리라면 더 그렇다. 대화는 녹취록이 아니다. 역사서가 골라 세운 장면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골라 세운 건 장면만이 아니다. 말의 모양도 골라진다.
경순왕의 말은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생각하면, 의심은 더 커진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라는 이유는 아름답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유는 대개 누군가를 편하게 만든다. 받아 든 쪽을 편하게 한다. 폭력을 덜 폭력처럼 보이게 한다. 정복을 계승으로 바꾸는 데 ‘백성’만큼 강한 단어가 없다. 패배를 패배라고 쓰는 대신, 결단이라고 쓰게 해 준다.
그래서 이 서사는 새 질서에게 너무 좋다. 신라가 찢겨 나간 게 아니라, 마지막 왕이 스스로 넘겨준 것처럼 보인다. “擧土降太祖”라는 네 글자가, 단지 항복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통합을 정당화하는 문장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승자는 설명을 덜 해도 된다. 패자가 이미 ‘이유’를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편 목소리는 완전히 지울 수도 없다. 지워 버리면 기록이 오히려 어색해진다. 그래서 태자의 말이 남는다. 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이 문장은 남아도 된다. 오히려 남아야 한다. 다만 중심이 되면 곤란하다. 중심은 경순왕의 말이다. 태자는 울며 산으로 들어가고(泣而退 入皆骨山), 역사의 정통은 흔들리지 않는다. 비극은 남지만, 새 질서는 깨끗해진다. 너무 맞아떨어져서 오히려 더 의심스럽다.
태자의 말이 ‘진짜’라고 단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내 귀에는 그쪽이 더 살아 있는 말처럼 들린다. 멸망 앞에서 사람의 말은 보통 더 거칠다. 더 궁색하거나, 더 분노하거나, 혹은 더 침묵에 가깝다. 그런데 왕의 말은 합리와 윤리로 이미 완성돼 있다. 孤危若此… 旣不能強 又不能弱…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너무 깔끔하다. 그래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저 말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저 말이 “남아야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시선을 조금 넓히면 이유가 보인다. 새 왕조는 이전 왕조를 어떻게 끝내느냐로 자기 얼굴을 만든다. 고려는 신라를 무너뜨린 나라로만 남을 수 없었다. ‘정복자’로 시작하면 저항이 남는다. ‘계승자’로 시작하면 반발이 줄어든다. 그러니 신라의 마지막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이양’처럼 보여야 한다. 마지막 왕이 자발적으로 넘겼고, 그 결정이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중심에 경순왕의 문장이 놓이는 건 너무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워서, 더 무섭다.
천 년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장면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내가 부족했다”로 시작하고, 형편의 불가피를 말하고, 백성을 보전하기 위해 더 큰 힘 아래로 들어간다는 방식. 시대도 다르고, 전쟁의 성격도 다르다. 그런데 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의 모양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패배를 결단으로 바꾸고, 굴복을 구원으로 번역하는 문장. 누군가에게 그 문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삼국사기』 경순왕 9년 10월의 회의를 사건으로만 읽지 않게 됐다. 그 장면은 ‘무슨 일이 있었나’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말이 필요했나’도 같이 말한다. 정복자의 논리가 피정복자의 입을 빌려 자리 잡는 방식. 그게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지, 이 짧은 대화가 보여 준다.
결국 질문은 단순해진다. 그날 마지막 회의에서 정말로 울린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나.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쪽이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건 목소리인가, 문장인가. 사료를 읽는다는 건, 사건을 아는 일이 아니라 문장을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