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끼, 해진 옷, 그리고 권위
정조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된다. 성군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그 말만 믿고 들어가면 오히려 핵심을 놓친다. 그는 처음부터 환영받는 왕이 아니었다. 조정에는 반대가 있었고, 왕실 안에도 눈이 있었다. 한 번 휘청하면 끝나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정조의 통치는 ‘큰 결심’보다 ‘작은 습관’으로 먼저 보인다. 신하들이 올린 글을 밀어두지 않고, 조회와 문답을 비워두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수성의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만이다.” 말이 멋있어서가 아니다. 저 문장은 정조가 자기 몸을 묶는 끈이었다.
생활은 더 노골적이다. 돈복이 아니면 비단을 입지 않았고, 여러 번 빨아 해진 옷도 그냥 입었다. 수라도 하루 두 끼였다. 반찬 가짓수도 늘리지 않았다. 침전은 화려한 장식 대신 낮고 좁았고, 비가 새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렇게까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게 의미였다. “나는 내 몫부터 덜어낸다.” 그 한 줄을, 말이 아니라 생활로 찍어 누른 셈이다.
정조가 더 어려웠던 대목은 정통성이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효장세자(훗날 진종)의 양자로 입적된 틀 안에서 왕위를 잇는다. 친부의 비극과 법적 계보의 계산이 한 몸에 겹쳐 있었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문제였다. 종묘사직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도 거기쯤 있다.
그다음부터는 상징이 움직인다. 정조는 이순신을 다시 세운다. “왜 아직 영의정으로 추증하지 못했는가”라며 1793년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관련 기록을 모아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한다. 충성, 공훈, 국난. 이순신은 정조에게 ‘왕권이 기대는 무(武)의 기준선’이 된다.
그런데 정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반대편 상징도 만진다. 송시열 비문을 직접 짓고(정조 3), 1787년에는 『송자대전』 간행을 명한다. ‘송자’라는 이름 자체가 주자(朱子)에 견줄 만한 위상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 조치는 조정에 분명한 신호가 된다. “나는 너희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대신 내 판 안으로 들어와라.” 정치란 결국 판을 굴리는 일이라서, 정조는 ‘옳음’만으로 버티지 않고 ‘가능함’까지 같이 챙겼다.
이 대목이 오늘 자꾸 남는다. 조직에서도 비슷하다. 말로는 공정과 원칙을 외치면서, 생활은 사치스럽고 일은 밀리고, 상징은 상대를 긁기만 하면 그건 오래 못 간다. 반대로, 일을 제때 처리하고, 자기 몫을 먼저 줄이고, 필요하면 반대편의 체면도 한 번은 세워준다. 그러면 판이 조용해진다. 정조가 보여준 건 완벽한 도덕이 아니라, 흔들리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기술이다. 결국 리더의 권위는 구호가 아니라 습관과 디테일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