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신의학자 '후베르투스 텔렌바흐(Hubertus Tellenbach)'는 유독 우울증의 늪에 자주 빠지는 이들을 ‘멜랑콜리 유형(Typus Melancholicus)’이라 정의했다. 이들은 겉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스스로 부여한 업무의 양과 질에 타협이 없고, 아무리 버거워도 기준을 낮추려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라 칭송하지만, 사실 그 내면은 위태롭다. 이 치열한 성실함의 뿌리가 '자신감'이 아닌 '불안'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선이 어디인지, 나에게 정말 필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판단할 기준이 통째로 빠져 있다. 소위 '자기 부재' 상태다. 이들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그 지독하게 의존적인 욕구 때문이다.
공부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성적표로 인정받고 싶어 책상 앞을 지키는 아이처럼, 이들에게 업무는 자아실현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병이 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나는 병원에 입원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고통의 전시가 자신의 존재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운 책을 읽고 '대단하다'는 찬사를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첫날의 10쪽은 칭찬의 동력이 되지만, 다음 날 읽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억지로 채우는 10쪽은 고역이다. 만약 진정으로 그 책이 궁금했다면 어땠을까. 단 두 쪽을 읽었어도 충분했을 것이고, 남이 뭐라 하든 나만의 즐거움에 취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결국 남의 약을 억지로 삼키는 것과 같다.
남들이 다 먹으니 나도 먹어야 할 것 같고, 먹다 보니 중단하는 것이 두려워 쓰디쓴 약을 끝내 토할 때까지 집어삼킨다.
현대 사회의 성과주의는 이러한 멜랑콜리 유형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넣는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타자의 추방》에서 타인의 시선에 예속된 현대인의 우울을 이렇게 진단한다.
"Die Depression ist ein narzisstischer Zustand. Sie wird durch eine übersteigerte, grenzenlose, auf sich 스스로 고립된 성과 중심적 자아의 병리적 결과이다." _"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상태이다. 그것은 과도하고 한계가 없으며,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자아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_ 한병철,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Des Anderen)》 (2016)
텔렌바흐는 이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 멜랑콜리 유형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세 가지 '심리적 지지대'를 제시했다.
첫째, 질서의 유연화다. 자신이 정한 엄격한 규칙이 스스로를 옥죄는 감옥이 되지 않도록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
둘째, 타인과의 경계 설정이다. 모든 이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실망을 견뎌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셋째, 목적의 내면화다. 행위의 보상을 외부의 찬사가 아닌,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서 찾는 훈련이다.
결국 행복은 내가 내 위치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박수 소리에 귀를 닫는 순간, 비로소 고통스러운 연극은 끝난다.
남들의 기대를 채우려 스스로를 소진하는 성실함은 결국 정교하게 설계된 자해에 불과하다. 이제는 타인이 매겨주는 점수표를 찢고, 나만 아는 나의 한계선 안으로 조용히 돌아와야 할 때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인생을 사는가,
아니면 관객들의 취향을 수집하는 중인가.
박수 소리에 취해 삼켰던 쓰디쓴 약을 이제 그만 뱉어내자.
칭찬이 없어도 충분히 평온한 '나만의 두 쪽'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비로소 당신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