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님을 두고 — 왕방연, 돌아서는 자의 노래

역사는 대개 이긴 자의 기록이다.


왕방연(王邦衍).

의금부 도사로서 단종에게 사약을 전해야 했던 사람. 세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단종을 영월로 호송한 인물로 기록된 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魚得海)였고, 왕방연은 정작 242년 뒤 숙종실록에 가서야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그가 남겼다는 시조 한 수는 5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 『청구영언(靑丘永言)』 수록


시조의 출전인 『청구영언』은 1728년(영조 4년) 김천택이 편찬한 가집이다. 왕방연 당대의 기록이 아니다. 이 시조가 정말 그의 작품인지조차 학계에서는 논쟁이 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단종의 비극과 결부되어 수백 년간 회자된 데는 이유가 있다. 권력 앞에 선 개인의 참담한 자기 고백이 시대를 넘어 공명하기 때문이다.


'천만리'는 한양에서 영월까지의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실제로는 400리 남짓. 그가 말한 천만리는 충성과 배반, 삶과 죽음 사이의 심리적 거리다.


1457년(세조 3년) 6월,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같은 해 9월, 숙부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세조는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다시 강등시킨다. 그리고 10월, 사약이 내려진다.


『세조실록』은 "노산군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매어 졸(卒)했다"라고 기록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야사총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전혀 다른 장면을 전한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단종을 모시던 자 하나가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사약을 들고 갔으나 차마 아무 말도 못 한 채 엎드려 있던 금부도사. 그리고 그 틈에 공을 세우겠다고 나선 자의 손에 교살당한 어린 임금.


『숙종실록』 역시 이 일화를 언급하며 "그 공생이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卽九孔出血而死)"고 덧붙인다.


단종을 죽인 자도 현장에서 급사했다는 것이다. 천벌인지 우연인지, 기록은 판단을 유보한다.


왕방연은 어명을 완수한 관리의 안도감이 아니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자의 수치심에 짓눌렸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그는 곡탄(曲灘) 언덕 — 굽이치는 여울가에 주저앉았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단종을 '고운 님'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신하가 군주를 부를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전하', '상감', '임금님'도 아닌 '고운 님'. 연인에게나 쓸 법한 말이다.


권력 서열을 넘어선 연민, 아니 어쩌면 정치적 정당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한때 만백성의 어버이였으나 이제는 죄인 취급을 받는 열여섯 소년. 그 소년을 적막한 유배지에 홀로 두고 돌아서는 길. 왕방연에게 단종은 '노산군'도 '역적'도 아니었다. 그저 '고운 님'이었다.


냇가에 앉았다. 대놓고 울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임금을 죽음으로 내몬 자가 어디서 통곡할 수 있겠는가. 입을 막고 소리 죽여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밤새 흐르는 물소리가 자신의 울음처럼 들렸다.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물에 자신의 마음을 빗댄다고 썼지만, 실은 스스로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감정이입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빌려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자기혐오의 변주에 가깝다. 나를 대신해 울어주는 저 물줄기만이 그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물은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왕방연의 죄책감도 그랬을 것이다. 멈출 수 없었다. 흘러가는 물처럼 평생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민간에는 그가 관직을 내던지고 중랑천변에 배나무를 심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이 승하한 날이면 자신이 농사지은 배를 광주리에 담아 영월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렸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뒷이야기를 붙여주고 싶어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왕방연이 돌아선 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에게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그때 목숨을 건 사람이 있었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 그는 밤중에 아들들을 데리고 몰래 시신을 수습했다. 관과 장례 기구를 혼자 마련해 인근 산으로 올랐다. 그날 밤 눈보라가 쳤다.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산속에 앉아 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달아났는데,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는 눈이 녹아 맨 땅이 드러나 있었다. 엄흥도는 그곳에 단종을 묻고 식솔을 거느린 채 자취를 감추었다.


59년이 지나서야 중종이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 명했다. 1516년, 묘를 찾아 봉분을 세웠다.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민간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1698년(숙종 24년), 단종은 마침내 복위되었다.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고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죽은 지 241년 만의 일이다. 엄흥도에게는 후에 공조판서가 추증되었고, 정조는 그를 사육신 바로 다음 서열로 놓았다.

생육신들보다도 위였다. 누구나 억울함을 알면서도 감히 장사 지낼 생각을 못 했던 시신을 목숨 걸고 수습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오늘날 영월 장릉에는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이 서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배식단(配食壇)도 함께다.

다른 조선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장릉은 무덤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사당이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왕방연이 지었다는 이 몇 줄 글귀가 사람의 가슴을 후비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역시 살면서 누군가를, 혹은 소중한 무언가를 '천만리 머나먼 길'에 내버려 두고 돌아와야 했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논리 앞에서, 생계의 압박 앞에서, 대세의 흐름 앞에서 —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운 님을 두고 돌아섰는가.


그날 밤 영월의 여울물 소리는 왕방연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이 두고 온 것이 진정 고운 님뿐이냐고. 어쩌면 그는 평생 그 질문의 답을 흐르는 물소리에서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돌아설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두고 오는가. 그 물음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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