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유독 발목이 잡히는 기억이 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내 무력함이 뼈아프게 드러났던 그날의 공기 같은 것들.
남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데,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미 식어버린 발자국을 자꾸 만져본다.
르상티망(Ressentiment)은 그렇게 시작된다.
어원 그대로, 아픈 감정을 '다시(Re)' '느끼는(Sentir)' 행위의 처절한 반복이다.
이건 추억이 아니다.
스스로를 기억의 벽 안에 가두는, 자발적인 '시간의 감옥'이다.
니체는 이 감정을 아주 냉정하게 해부했다.
그는 "도덕에 있어서 노예 반란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을 때 시작된다"라고 썼다.
복수할 힘조차 없는 약자가 자신의 무능을 '선(善)'으로 포장하고, 강자의 능력을 '악(惡)'이라 몰아세우는 뒤틀린 심리.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깎아내려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비겁한 자기 방어라는 거다.
"Die Sklavenrebellion in der Moral beginnt damit, dass das Ressentiment selbst schöpferisch wird und Werte gebiert." _[ Friedrich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 I-10] _"도덕에 있어서 노예 반란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을 때 시작된다."
하지만 그의 통찰은 때로 너무 가혹하다.
우리가 과거를 곱씹는 속마음이 정말 그토록 추악하기만 할까.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가치, 끝내 가 닿지 못한 나의 모습에 대한 처절한 미련 같은 것들.
정말 증오했다면 진작에 잊었을 테다.
잊지 못하고 자꾸 되새김질하는 건, 사실 그 모습이 되고 싶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과거의 통증을 다시 꺼내 보는 대신, 그 뒤틀린 감정 속에 숨어있던 나의 진짜 욕망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그 그리움의 정체를 인정하는 순간, 감옥의 문은 안에서 열린다.
그리고 그 문밖에는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나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준엄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Meine Formel für die Größe am Menschen ist amor fati: daß man Nichts anders haben will, vorwärts nicht, rückwärts nicht, in alle Ewigkeit nicht." _ [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1888), 10] _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아모르파티다. 앞을 보든 뒤를 보든, 영원히, 지금 이 모습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모르파티는 단순히 주어진 고난을 견디는 체념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그 비극과 상처까지도 내 삶을 완성하는 필수적인 조각으로 껴안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ᾧ τὰ πράγματα συνέζευξέ σε, τούτοις οἰκείου σεαυτόν, καὶ οὓς ἡ εἱμαρμένη συνεκλήρωσεν ἀνθρώπους, τούτους φίλει, ἀλλ᾽ ἀληθινῶς." _ [ Marcus Aurelius, Meditations, 6.39] _ "운명이 너를 묶어 놓은 것들에 너 자신을 적응시켜라. 그리고 운명이 너를 함께 살게 한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을 다해 사랑하라."
르상티망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포기하지 못한 열망의 흔적이다.
그 열망을 과거를 원망하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오늘을 사랑하는 동력으로 쓸 것인가.
선택은 늘 우리 손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