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는가

고통 너머의 기쁨, 존재의 양가성에 관하여

19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다. 젊은 배우 박신양은 모스크바의 슈킨 연극대학에서 연기를 배우고 있었다.


학비가 모자라 귀국해야 할 처지가 되자 동기들이 탄원서를 제출했고, 유리 미하일로비치 알사로프 교수가 그를 배려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시절 그는 스승에게 물었다.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든가요?"


교수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그럼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해 봤느냐?"


이 질문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다.

우리는 흔히 고통 없는 삶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전제 자체를 뒤집는다.


삶이 본래 고통을 품고 있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힘들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힘듦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5) 2권 13장에서 하프 연주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노래했다.


"Wer nie sein Brot mit Tränen aß,

Wer nie die kummervollen Nächte

Auf seinem Bette weinend saß,

Der kennt euch nicht, ihr himmlischen Mächte."_"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없는 자,

근심에 찬 밤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 없는 자,

그는 당신들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이 시는 슈베르트, 슈만, 볼프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을 만큼 깊은 울림을 지닌다.


괴테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하다. 고통 없이는 존재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 어둠을 견뎌본 자만이 빛의 두께를 안다.


박신양은 이 경험을 통해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삶의 어둠을 외면하면 빛도 온전히 품을 수 없다. 양가적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이 서로를 규정하며 공존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현대인들은 왜 이토록 불행할까.


에리히 프롬은 1976년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현대 문명의 병리를 진단했다. 그는 '기쁨'(joy)과 '쾌락'(pleasure)을 엄밀히 구분한다.


"Joy is the concomitant of productive activity. It is not a 'peak experience, ' which culminates and ends suddenly, but rather a plateau, a feeling state that accompanies the productive expression of one's essential human faculties."_ "기쁨은 생산적 활동의 동반자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 갑자기 끝나는 '정점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능력을 생산적으로 표현할 때 함께하는 지속적인 감정 상태다."— <To Have or to Be?, p.117>


프롬에 따르면, 쾌락은 일시적이고 소모적이다. 정점에 도달하면 곧 공허가 찾아온다. 반면 기쁨은 존재 양식에서 비롯되며, 성장과 함께 지속된다.


그는 현대인을 이렇게 표현했다.

"We are a society of notoriously unhappy people: lonely, anxious, depressed, destructive, dependent — people who are glad when we have killed the time we are trying so hard to save."_"우리는 악명 높게 불행한 사회다. 외롭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파괴적이며, 의존적인 사람들—애써 아끼려는 시간을 죽이게 되면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들."

<To Have or to Be?, p.15>


가진 자도 기쁘지 않고, 못 가진 자도 기쁘지 않다. 물질적 풍요는 쾌락을 늘렸지만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프롬이 말하는 '기쁨 없는 쾌락의 시대'다.

소유 양식(having mode)과 존재 양식(being mode)의 구분은 여기서 핵심이 된다.


소유 양식은 외부의 것을 획득하고 축적하는 데 집중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돈, 지위, 명예, 심지어 지식까지도 소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양식은 근본적인 불안을 동반한다. 가진 것을 잃으면 나는 누구인가?


프롬은 단호히 말한다.

"If I am what I have and if what I have is lost, who then am I? Nobody but a defeated, deflated, pathetic testimony to a wrong way of living."_"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면, 그것을 잃었을 때 나는 누구인가? 잘못된 삶의 방식에 대한 패배하고 쪼그라든 초라한 증인일 뿐이다."


반면 존재 양식은 내면의 성장과 관계에 집중한다. 사랑하고, 배우고, 창조하는 행위 자체에서 충족감을 얻는다. 외부의 것을 잃어도 존재는 흔들리지 않는다.


2025년 2월, 박신양은 성시경의 유튜브 채널 '만날 텐데'에 출연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지, 실제로 나를 아는 사람들이 생긴 건 아니었다."


인기 배우로서 바빠지고 유명해졌지만, 그것이 곧 존재의 충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고백이다. 소유 양식의 허상을 꿰뚫는 말이다.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c.1260–1328)는 이러한 존재의 문제를 더 깊이 탐구했다.


그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이자 당대 최고의 신학 박사로, 스콜라 철학과 신비 신학을 통해 인간 실존의 의미를 성찰했다.


에크하르트의 핵심 통찰 중 하나는 이것이다.

"One must not always think so much about what one should do, but rather what one should be. Our works do not ennoble us; but we must ennoble our works."_"사람은 항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일이 우리를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일을 고귀하게 만들어야 한다."


행동보다 존재가 선행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가 내 행동의 질을 결정한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 계발 논리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먼저 성찰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공허할 뿐이라는 뜻이다.


에크하르트는 또한 말했다.

"Truly, it is in the darkness that one finds the light, so when we are in sorrow, then this light is nearest of all to us."_"진정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 빛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


고통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직면할 때, 역설적으로 빛에 가까워진다. 괴테가 말한 '눈물 젖은 빵'의 의미와 맞닿는다.


그렇다면 삶에서 우리가 자주 놓치는 질문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없지 않고 있는가?"


이 물음은 하이데거 이래 실존철학의 핵심이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거의 묻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신비임을 잊고 살아간다. 바쁘게 소유하고 소비하느라 존재의 의미를 성찰할 틈이 없다.


박신양은 같은 인터뷰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어떤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그리움이었다."


그는 러시아 유학 시절 친구들이 그리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3년 동안 200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허리 부상과 갑상선 항진증으로 하루에 30분밖에 서 있지 못하는 시간이 10년 넘게 이어졌지만,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탐구했다.


성시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걸 알지만 귀찮고 어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자신의 안쪽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을 피하지 않고 아주 오랜 시간 해오신 분."


존재의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으려면 고난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용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가능성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어둠의 깊이를 감당한 사람만이 빛의 두께를 알 수 있다.


박신양의 스승이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은 원망을 걷어내고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고통을 삶에서 제거해야 할 이물질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고통은 우리를 짓누르지 않게 된다.


에크하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고요한 마음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To the quiet mind all things are possible). 고통 앞에서 저항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그것을 온전히 마주할 때 내면의 자유가 열린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려 하는가, 아니면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빛에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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