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쥔 자만 살아남는다

하메네이 사살 이후, 김정은이 읽고 있는 세계

민주평통 상임위원의 시각에서 하메네이 사망 이후, 김정은이 읽고 있는 세계를 추측해 본다.

2026년 2월 28일 새벽,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미국-이스라엘 합동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란 국영방송이 공식 확인한 건 3월 1일이었지만, 세계는 그 전날 밤 이미 알고 있었다.


평양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13년 친중 실세 장성택을 처형하고,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에서 푸틴 옆자리를 차지했으며, 트럼프와 친서를 주고받던 그 김정은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했을지는 기준에서는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그가 보기에 이란은 교훈을 준다.

나쁜 방향으로 말이다.


하메네이 사망 직전, 북한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2월 19일부터 25일까지 노동당 제9차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5년 만의 최고 권력 기구 회의. 대외적으로 김정은은 두 가지 상반된 메시지를 동시에 내놨다.


"세상이 통째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핵포기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국가의 현 지위를 존중하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_ 김정은, 노동당 제9차 대회 사업총화보고, 2026년 2월 26일


한국을 향해선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할 것'이라며 등을 돌리고, 미국을 향해선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좋게 지낼 수 있다'며 손을 내민다. 이 이중성은 모순이 아니다. 전략이다.


더 주목할 점이 있다. 이번 열병식에서 북한은 ICBM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과거 화성-17, 화성-19 같은 최신 무기를 과시하던 것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하메네이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미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던 것이다.


부시가 2002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세 나라는 이라크, 이란, 북한이고 이 중 미국의 직접 군사 공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북한뿐이다. 이라크는 2003년 침공으로 후세인이 처형됐고, 이란은 2026년 하메네이가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김정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바로 '핵'이다.


이란은 핵 개발 협상 중에 공격받았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라가 결국 제거됐다. 2월 26일 제네바에서 3차 핵 협상이 결렬됐고, 트럼프는 불과 48시간 만에 공습 명령을 내렸다. 북한 입장에서 이건 배신이나 다름없는 선례다. 협상이 이란의 경계심을 낮추는 연막이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동국대 김용현 교수는 "이란과 달리 북한은 핵무기가 완성된 상태"라며, "현재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은 한반도 전쟁과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굉장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라고 짚었다.


통일연구원 홍민 선임연구위원도 "미국은 북한을 이란과 같은 제거 대상이 아닌 관리 대상으로 보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미 북한을 여러 차례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라고 불렀다. 비핵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론 관리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뜻이다. 김정은은 이걸 안다. 그러니 협상보다 핵 고도화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미 대화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니다. 실제로 김정은의 9차 당대회 메시지와 백악관의 반응은 같은 날 나왔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전제조건 없이 김정은과 대화하는 데 열려 있다"라고 밝혔다. 외교가에서는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로 잡힌 트럼프의 방중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1기 트럼프 행정부 시절 이미 친서를 주고받았고,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김정은과 잘 지낸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다만 근본적인 간극은 그대로다. 김정은이 원하는 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뒤의 협상'이고, 미국이 허용할 수 있는 건 '비핵화를 전제로 한 협상'이다.


아산정책연구원은 2025년 분석에서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더욱 정교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직거래하면서 한국을 배제하는 방식이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위협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된 회담 거부에 따른 군사적 공세에 대한 부담이 있다는 의미다."

_박원곤 이화여대 교수, 서울신문 (2026.3.2)


즉, 북한이 조용한 건 대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이란 꼴 날까 봐 조심하는 것에 가깝다.


북중 관계를 '든든한 혈맹'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중국이 티베트와 위구르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950년 티베트를 강제 병합하고, 이후 신장 위구르에 대규모 한족 이주와 언어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유엔 인권 전문가들이 '문화적 말살'로 규정한 방식이다. 북한이 무너지거나 취약해진다면 비슷한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 있다는 우려는 대북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래된 이야기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한 게 2013년 12월이다. 공식적으로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가 죄목이었지만, 본질은 달랐다. 장성택은 북한 내 대중국 경제협력의 실질적 창구였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전 백악관 NSC 아시아담당 국장)는 당시 "장성택 없이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이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게 바로 김정은이 노린 것이었다. 장성택과 함께 일하던 친중 성향 간부들이 줄줄이 숙청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중국이 경제 레버리지와 인맥을 통해 북한 내부 권력을 움직이는 통로를 차단한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개 강대국 중에 북한 국내정치에 간섭할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국뿐이다. 중국은 친중파를 통해 북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김정은 정권에 도전하는 세력까지 키울 수 있다. 때문에 김정은은 중국과 지나치게 가까운 간부들에게 의심스러운 분자라는 딱지를 붙인다."_안드레이 란코프 (RFA 칼럼, 2014.1.30)


물론 중국이 북한을 위구르처럼 직접 지배하려 한다는 건 지나친 단순화다. 중국은 북한이 붕괴하는 것도, 친미로 돌아서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미국과의 완충지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묶어두되 흡수는 하지 않는 전략을 취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묶어두기'의 방법이다. 경제적 의존을 유지하고, 내부에 친중 세력을 키우고, 외교적 고립을 활용하는 방식은 서서히 자율성을 갉아먹는다. 김정은이 그걸 모를 리 없다.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확대, 우크라이나 파병,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등 이 모든 것이 중국 일변도의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다각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2024년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대중 관계였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미국의 계산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왜 북한과 싸우려 하지 않는가.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현실적인 것은 하나다. 북한이 핵을 가졌고, 그 핵이 한반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억지력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전략적인 관점이 있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고, 5년마다 정권이 바뀐다. 언제 어떤 정부가 들어설지 미국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실제로 한국 내부에서는 대중 경제 의존도를 두고, 한미 동맹의 무게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이 반복된다. 만약 한국이 결정적으로 친중 방향으로 기울어진다면, 동북아 지정학의 균형은 미국에 불리하게 재편된다.


반면 북한은 김 씨 3대 세습 체제다. 지도자가 자주 바뀌지 않는다. 김일성이 1994년까지, 김정일이 2011년까지, 김정은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북한은 예측 가능한 상대다. 적이지만 계산할 수 있는 적이다.


북극항로 이슈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기후변화로 북극해가 열리면서, 러시아 북부 해안을 따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의 전략적 가치가 급상승하고 있다.


현재 북극항로의 동아시아 기점은 주로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극동항구지만, 지형상 북위 39도에 위치한 원산만은 부산(북위 35도)보다 북극 방향으로 더 가까운 동해안 거점이다.


남북이 통일되거나 북한이 항구를 개방한다면, 원산은 북극항로 전략의 핵심 기점이 될 수 있다. 정부가 북극항로 특별법을 제정하고 5500억 원 예산을 편성하며 부산항 중심의 전략을 추진하고 있지만, 북한이 협력에 나선다면 전략의 판 자체가 달라진다. 미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볼 이유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정은이 이재명 정부를 '기만극'이라 부르며 '한국을 동족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선언한 건 단순한 수사적 강경 발언이 아니다.


북한의 계산은 이렇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받으면서 핵보유국 지위도 인정받는 구조는, 미국이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은 방정식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 카드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정부가 2025년 APEC 경주 정상회담에서 핵추진 잠수함 도입에 합의하고 한미동맹에 더 깊이 편입된 건, 북한 입장에서 한국이 '우리 편'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더 강화하는 요인이다. 한국이 미국 안보 체계에 깊이 편입될수록, 북한이 한국을 우회해 미국과 직거래하는 통미봉남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진다.


하메네이가 죽고 나서 평양이 처음 한 말은 '미국의 불량배적이며 야수적 본성을 규탄한다'는 성명이었다. 강하게 비난했지만 구체적 행동은 없었다. 마두로 체포 때도 비슷한 성명이 나왔다. 입으로는 규탄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지금 김정은의 태도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핵무장을 계속 고도화하고, 트럼프의 러브콜을 바라보며 타이밍을 재고 있다. 9차 당대회의 핵심 메시지는 결국 하나였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3월 말 트럼프의 방중, 이란 정세의 후폭풍, 그리고 김정은이 언제 트럼프의 전화를 받기로 결심하는가. 이 세 가지가 올해 한반도 정세를 가를 변수다.


핵을 가진 자는 협상에 나설 수 있다. 핵을 가지지 못한 나라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처리의 대상이 된다. 하메네이의 죽음이 그 논리를 한 번 더 증명했다. 김정은은 그 교훈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성택을 처형하던 2013년 겨울부터.

작가의 이전글전쟁의 이름은 이란, 진짜 표적은 베이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