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배타주의와 대종교의 길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지만,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단재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1925)
십자가와 초승달과 다윗의 별.
이 세 상징은 같은 신을 모시며 4000년 전 중동의 한 가정에서 시작된 한 뿌리 집안이다. 아브라함이라는 공통 조상을 둔 형제들이다. 그런데 이 '가족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쟁사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브라함이 유일신과 계약을 맺으면서 세 종교의 역사가 열렸다. 갈라짐은 그 안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아내 사라의 아들 이삭과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삭을, 이슬람은 이스마엘을 정통으로 본다. 물론 세 종교의 갈등이 단지 이 계보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정치와 제국의 이해관계, 그리고 각 시대마다 재구성된 신학이 층층이 쌓인 결과다.
그러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이 한 가정 이야기로 돌아온다. 한 아버지의 두 아들이 갈라진 것이 세 종교 갈등의 첫 씨앗이었다.
기독교의 탄생은 더 아이러니하다. 1세기, 예수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로 시작했지만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느냐를 두고 유대교 주류와 충돌했다. 이후 바울이 할례 등 유대교 율법 없이도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선언하며 기독교를 독립된 종교로 끌어냈다.
서기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자 유대교는 반성했고, 기독교는 이를 '유대인의 벌'이라 해석했다. 감정의 골은 그렇게 깊어졌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부활절 날짜를 유대 달력과 분리하는 등 기독교 안에 남은 유대교의 흔적을 국가 차원에서 지워버렸다. 집안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갈라졌다.
7세기에 등장한 막내 이슬람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계시가 왜곡되었다며 최종 정답을 들고 나왔다. 처음에 무함마드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유대인들이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자 624년경 예배 방향을 메카로 바꿨다. 그 방향 전환 하나에 독자적 정체성 선언이 담겨 있었다. 결국 세 종교는 "나만이 진짜"라는 배타적 진리 전쟁에 돌입했다.
그 갈등은 1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좁은 땅 예루살렘에서 폭발했다. 세 종교의 성지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겹쳐 있는 그 도시에서, 신학은 더 이상 추상이 아닌 살육의 명분이 되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 탈환을 선포하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성 안의 무슬림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반면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은 이슬람 장군 살라딘은 대규모 학살 없이 도시를 인수하며 기독교인들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같은 도시를 두고 벌어진 두 장면이 두 문명의 대비처럼 기록에 남았다.
근현대의 비극은 그 연장선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었다.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20세기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정점을 찍었고,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그 비극 끝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독립 선포 직후 아랍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졌고, 한 종교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형제가 다른 형제의 땅을 차지하며 빚어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됐다.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그 역사의 현재진행형이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예언자를 공유하며,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이 종교들이 왜 서로를 부정하며 싸워야 하는가. "내가 진짜"라는 확신이 타인의 존재를 지우는 폭력이 될 때, 그들이 믿는 신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 물음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신채호의 통탄처럼, 우리는 석가를 들여와 '조선의 석가'를 만들지 못했고, 공자를 들여와 '조선의 공자'를 세우지 못했다. 불교는 불교의 조선을, 유교는 유교의 조선을, 기독교는 기독교의 조선을 만들었다.
종교와 사상이 우리 삶 속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의 그늘 아래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지금 이 땅에서도 단군 동상이 훼손되고, 타종교를 향한 혐오가 버젓이 정당화된다. 종교 배타주의는 예루살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상의 수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자기화(自己化)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어떤 사상이든 민족의 삶과 역사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위에 군림하게 된다. 사상은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다른 길이 있었는가.
대종교는 그 길을 선택한 유일한 종교였다.
대종교가 중광된 1909년, 봉교함에 지켜야 할 규범인 봉교과규(奉敎課規)에는 이런 조항이 있었다.
"봉교인이 견문을 넓히고 슬기를 더하기 위하여 타교에 들어가 참여하여도 금하지 말 것. 또한, 타교에 이미 가입한 자가 본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곧 허가할 것. 한배검의 너그러우신 큰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아니함."
오늘날도 자기 신도가 타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공식으로 허용하는 종교가 얼마나 될까. 1909년에 이미 그것이 교단 규범으로 성문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이다.
7년 뒤인 1916년, 중광 교조 홍암 나철 대종사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를 앞두고 밀유(密諭)를 남겼다.
"물기시교외인(勿岐視敎外人) 물이론역외인(勿理論域外人)"
"다른 종교인을 구별하여 달리 보지 말라. 외국인이라 하여 따로 떼어 논하거나 차별하지 말라."
열여섯 글자다. 설명도 없고 수식도 없다. 공개 선언이었다면 더 길고 화려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가장 은밀하게 건넨 말이었기에 이렇게 짧고 단호하다.
타자(他者)를 처음부터 타자로 규정하지 말라는 것, 경계 자체를 해체하라는 것. 순교 직전에 남긴 유훈이 이것이었다.
같은 해 발표된 중광가(重光歌) 10장 도연원(道淵源)은 이 사유를 경전의 언어로 완성한다.
"찾아보라 가닥가닥 한배빛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 석가(釋迦)의 제석존숭(帝釋尊崇) 유씨(儒氏)의 상제임여(上帝臨汝) 야소(耶蘇)의 야화화(耶和華)와 회회(回回)의 천주신봉(天主信奉) 실상(實狀)은 한 한배님"
"찾아보라, 가닥가닥 살펴보면 한배님의 빛이 흐른다. 도교(선가)에서 받드는 천상의 신선 종조도, 불교에서 존숭하는 제석천도, 유교가 섬기는 '네게 임하시는 상제'도, 기독교(야소교)의 야훼도, 이슬람(회회)이 신봉하는 알라도 -그 실상은 모두 하나인 한배님이다."
도교·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 다섯 종교의 최고신을 이름으로 호명하고, 그것이 실상 하나라고 선언한 구절이다.
로마 가톨릭이 타종교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공식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였다. 서구 신학이 배타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대종교는 그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 논의가 아니라 규범으로, 유훈으로, 경전으로 그 답을 써넣었다.
봉교과규는 신자의 일상 행동을 규율하는 제도다. 밀유는 죽음 앞에서 가장 은밀하게 건넨 정신이다. 중광가는 세계 모든 종교의 신을 하나로 꿰는 세계관이다. 규범과 유훈과 경전, 세 층위 모두에 포용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대종교는 '불교의 조선'도, '유교의 조선'도, '기독교의 조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래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하늘 인식, 삶의 방식, 공동체의 도리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자기화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총본산이 될 수 있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고,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의 지휘부와 병사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서일·김좌진·박은식·신채호·김규식·이상룡·김동삼. 이 이름들은 단순한 독립운동가의 명단이 아니다. 정신이 하나였던 사람들이다.
일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종교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불법화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확한 진단이었다. 종교와 독립운동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간부 25명이 체포되고 10명이 고문으로 옥사하면서도 교단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종교 조직이기 이전에 민족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경계를 허문 종교가 가장 넓은 전선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세 아브라함 종교의 싸움은 오늘도 예루살렘의 좁은 골목에서 계속된다. "내가 진짜"라는 확신이 형제를 죽이는 이유가 된다. 그 비극의 뿌리는 간단하다. 자기 민족의 삶에서 피어난 정신이 아니라, 배타적 진리 독점의 무기가 된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선의 석가', '조선의 공자'를 만들지 못한 채 종교의 조선이 되기를 반복해온 동안, 대종교만은 달랐다.
홍익인간이라는 이념 안에는 어떤 외래 종교도 배척하지 않는 보편성이 있었다. 그 정신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다.
정신의 독립이 없는 독립은 이름만의 독립이다. 오늘 다시 대종교와 홍익인간을 말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신의 주인으로 서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