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곡, 두 사람, 하나의 뿌리
국경일에는 노래가 있다.
삼일절에는 삼일절 노래, 광복절에는 광복절 노래.
달력에 빨간 날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듣거나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어떤 마음으로 가사를 썼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이 노래들이 법적으로 제정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없다.
1949년 정부는 국경일을 제정한 직후 관보와 신문에 기념 노래 가사 현상공모 광고를 냈다. 마감까지 439편이 응모됐다. 그러나 심사위원회는 끝내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전문가에게 직접 작사를 위촉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대종교인 위당 정인보였다.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새해의 노래, 다섯 곡의 가사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한글날 노래는 외솔 최현배가 작사했는데, 그 역시 대종교인이다.
다섯 곡, 두 사람. 이건 우연이 아니다. 정인보와 최현배는 모두 대종교 사상으로 평생을 산 사람들이었다. 민족의 뿌리가 있고, 그 뿌리에서 힘이 나온다는 믿음.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저항이고, 언어를 지키는 것이 생존이라는 것. 그 믿음이 가사 한 줄 한 줄에 배어 있다.
삼일절 노래 -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1919년 3월 1일 정오. 정인보는 그 시각을 정확히 박아 넣었다. "터지자 밀물 같은"은 오래 눌렸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간이다.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에서 의(義)는 옳음, 생명은 존재 이유, 교훈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다. 3·1운동이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원칙이라는 선언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강물과 산은 멈추지 않았다는 말이다. 빼앗겼어도 땅은 우리 것이었고, 그 땅이 증인이라는 뜻이다. "선열하"의 '-하'는 존칭 체언에 붙는 옛 조사다. 오늘날의 말로는 '선열이시여'가 된다. 먼저 간 이들을 향한 보고이자,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다짐이다.
제헌절 노래 - 정인보 작사, 박태준 작곡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정인보 특유의 고전적 문체가 가장 짙게 배어 있다.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환웅을 가리킨다. 풍백·우사·운사, 바람·비·구름을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렸다는 단군 신화의 표현이다. 정인보는 헌법 제정의 정신적 출발점을 여기에 연결했다.
"옛길에 새걸음으로"가 이 노래의 핵심이다. 전통의 뿌리 위에서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이다. 단절이 아니라 계승. 대종교 사상에서 단군의 줄기는 끊어진 적이 없다는 믿음이 이 가사 안에 있다.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헌법은 한 시대의 문서가 아니라 이 나라가 서 있는 바닥이라는 선언이다.
광복절 노래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룬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함께 힘써 나가세 함께 힘써 나가세
다섯 곡 중 감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올라오는 노래다.
"흙 다시 만져보자."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내 것이 됐다는 실감을 몸으로 확인하려는 동작이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룬님 벗님 어찌하리." 광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사람들이다. 기쁨 속에 슬픔이 함께 있다. 정인보는 감격만 쓰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의 복잡한 마음을 한 줄에 담았다.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피가 '엉겼다'는 표현이 생생하다. 흘렸다가 아니라 엉겼다. 오래 쌓인 것이다. "길이길이 지키세"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개천절 노래 -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가장 짧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새암"은 샘이다. 물은 어딘가에서 솟아난다. 나무는 땅속에 뿌리를 내린다. 눈에 보이는 것 아래에 보이지 않는 원천이 있다는 말이다.
"한아바님"은 큰 할아버지, 시조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단군을 한자식 표현 없이 우리말로 불렀다. 대종교 사상의 핵심이 이 두 줄 안에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이 가사 전체를 이끈다. 같은 가사가 두 번 반복된다.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한글날 노래 - 최현배 작사, 박태현 작곡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 노래는 다른 경로로 탄생했다. 정부 주도가 아니라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가 작사한 한글 노래가 있었으나, 이극로가 1948년 월북한 이후 새 노래가 필요해졌다. 그 가사를 최현배가 썼다.
최현배의 문체는 정인보와 다르다. 더 직접적이고 선명하다. 그러나 뿌리는 같다. 대종교 사상에서 언어는 민족 정신의 그릇이다. "새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 창제를 빛의 출현으로 봤다.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최현배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광복이 돼서야 풀려났다. 글자를 연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 이 가사는 학문적 결론이 아니라 삶 전체로 도달한 말이었다.
이 노래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노래 자체는 법적으로 제정된 적이 없다. 국경일은 1949년 법률로 공포됐지만, 그 날을 기념하는 노래는 어떤 법령에도 근거가 없다. 공모는 실패했고, 전문가에게 위촉됐으며, 행정적 공포 절차 없이 신문에 발표되고 기념식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단군에서 출발한 사상이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고, 그 사람들이 새 나라의 국경일 노래를 만들었다. 우리가 매년 듣는 그 노래들은 의례가 아니다. 나라를 잃지 않으려 버텼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사 안에 살아있다. 모르고 부르는 것과 알고 부르는 것은 다르다. 같은 노래가 전혀 다른 노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