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빠야."라는 말의 여러 의미.
분홍색 난방 텐트가 쓰인 침대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랑 어린이집 사진을 보며 오늘 무얼 했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물어본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정신없이 지나온 하루. 새벽녘에 일어나 등원 준비를 하고. 지옥철을 타고 퇴근 후 하원을 하고 나면 8시가 넘는다. 간식을 챙겨주고 아이를 씻기고 나면 10시가 된다. 거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 이 순간이 아이와 진실되게 붙어 있는 시간이다. 거실에 있으면 설거지가 나를 부르고, 빨래가 나를 찾는다. 텐트 안은 오로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엄마는 어딨어?"
눈웃음 지으며 통통하고 짤막한 손가락이 나를 가리킨다. 이 순간이 행복하고 슬프다.
"아빠는?"
다시 나를 가리킨다. 귀여움을 참치 못해 뽀뽀 세례를 한다.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고민해봤자 지금은 눈웃음만 보일 뿐이다.
"엄마가 아빠야."
오늘도 이렇게 마무리한다.
싱글대디가 된 후에 처음으로 육아 카페에 가입했다. 예전에는 맘 카페라는 단어를 썼다. 몇 년 전 맘 카페는 남성 회원은 가입할 수 없다는 문구를 보고 당황했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방송에서 맘 카페가 구설수에 오르고 난 후 남성 회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카페는 육아를 처음 시작하는 새내기들과 이미 육아 고수들이 모여서 여러 정보를 공유한다. 육아 말고도 사는 얘기와 연예, 정치, 음식 등 많은 얘기가 활발히 교류되고 있었다. 이렇게 친밀하고 돈독한 커뮤니티가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나는 검색에 '싱글대디'라고 검색했다. 어떤 특정 작성자 글이 리스트에 반 이상 조회됐는데, 몇 년 전에 쓰인 글이 대부분이었다. 싱글대디로 지내는 삶이나 육아 정보를 얻는 글이 많았다. 나는 그분이 쓴 모든 글을 읽으면서 완전히 사로잡혔다. 나 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이 존경스러웠고, 슬픈 감정이 들 땐 같이 울기도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생했던 흔적들이 글에 남아있었다. 나는 위로받고 있었고, 자립하는데 필요한 힘을 얻었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부러워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엄마를 부러워하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저 문장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충분했다. 말 그대로 아이가 엄마를 부러워한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말이었다.지금도 저 문장을 책임지고 있을까? 1년 전 너무나 힘들었던 시기에 다짐했던 초심은 멀어져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될 수 없다. 아빠도 엄마가 될 수 없다. 엄마랑 아빠가 똑같을 수 없다. 이건 펙트다. 이 펙트를 아이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답은 "엄마가 아빠야." 속에 있을 것이다. "엄마가 아빠야."라는 말은 이미 책임을 다하지 못해 회피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빠, 나는 왜 엄마가 없어요?"
"아빠,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빠, 엄마는 어디 있어요?"
"아빠, 엄마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
사실 난 이 질문에 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갑자기 질문이 훅 들어온다면 당혹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채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랑 아빠는 서로를 많이 속상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은 같이 살지 않아."
그럼, 나중에는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 같다. 다시.
"엄마랑 아빠는 서로를 속상하게 해서. 같이 살고 있지 않아. 엄마는 아주 멀리 있어."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나는 아이의 표정이나 사소한 몸짓 하나 놓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고민의 시간이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다. "엄마가 아빠야."라는 말은 간접적으로 사실을 말해주려는 내 의지가 들어간 미끼다.
나는 속으로 '엄빠(엄마아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부모의 과업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육아카페와 인스타 활동으로 훌륭한 '엄빠'가 되었다는 걸 인정받고 싶었다. 이유식과 아이반찬 사진을 올리고 댓글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작은 쾌락을 느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모든 노력이 아이에게 온전히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이 될 무렵에 돌치레가 지독하게 왔었다. 해열제를 먹여도 체온계의 숫자는 39~40도 사이를 유지했다. (이 때는 교차 복용을 알지도 못했다) '열나요'라는 어플을 뒤늦게 알아 교차 복용을 알고 나서 체온이 내려갔지만 다음날 폐렴 판정을 받고 입원을 했다. 병동에서 아무도 나에게 아이 엄마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엄빠로서 육아에 서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놀아주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덩치가 제법 큰 나에게 병원 침대는 혼자 누워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가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아이랑 같이 자야 했다. 주사액이 관을 따라 아이에 손목 혈관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관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관은 수시로 아이의 몸을 휘감았다. 몸에 감긴 관을 풀어주고 주사액을 보충을 수시로 해줘야 했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호된 첫 입원생활을 마치고 나는 앓아누웠다. 설상가상으로 몇 주나 지났을까? 독감으로 또 입원을 했다. 그리고 또 몇 주 후 수족구로 입원했다. 너무 힘에 붇치고 힘들어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이 모든 과정을 인스타로 담지 못했다. 아니, 담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나와 아이 마음에 담겨있을 것이다. 기억의 조각들이 쌓이고 모이면 마음을 변화시키고 행동이 달라진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내가 생각하는 '엄빠'가 되어있을 것이다. 지독하게 외롭고 힘들다. 그러나 그만큼 소중하다.
같이 누워있으면 아이가 팔을 비집고 들어온다. 팔 베개를 해달라는 뜻이다. 31개월의 아이가 느끼기에 내 팔의 근육과 골격은 포근함 보다는 딱딱하고 거친 느낌이 강했을 것이다. 그래도 편한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볼 때면 신기하고 낯설다. 아이는 내 마음을 베고 자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엄마가 아빠"라는 말은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욕심이다.
사랑한다 아빠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