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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Jun 20. 2024

나의 이유로 선택하는 공부

평생교육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상의 자세

배움은 즐거운 것이다. 배우려는 자에게 열망이 있는 한해서 말이다. 열망 없는 배움은 고문이다. 몸에 좋다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집어넣어야 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분명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해하는 건 학교에 있지 않았다. 자라면서 받아야 하는 '교육'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늘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궁금해해야 했다. 사회에 나가서 적절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수준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다.


공부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즐겁게 했던 때가 있었고 그러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배움은 열심히 했으나 안다는 것의 지표가 되는 성적이 좋지 못했을 때가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과목을 잘하지 못했을 뿐이고 관심 있는 몇 과목만 성적이 좋은 게 문제였을 뿐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 노력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배워나가며 성취감을 쌓는 사람들, 거기다가 부분도 아닌 전체를 그런 노력으로 잘 해내는 경지에 이르는 사람들. 그건 대단한 노력이고 응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분명 공부를 잘하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을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인내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 아닌, 현재 재미를 느껴야 몰입할 수 있는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은 아무래도 힘든 영역이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잘 바뀌는데 그것 따라 노력의 여부가 달라지니 허탕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혹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라도 우리에게 '왜 나는 공부하는가?'에 대해 심층 질문을 하는 시간을 공식적으로 주었다면 좋았겠다. 자꾸 본질이 빠지고 행위만 남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습관 때문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헤매는 기분이다. 나의 이유로 내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여한 없이 노력하는 삶. 그리고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지는 삶. 그게 삶의 주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일 텐데. 이제야 그런 것들을 스스로 익히려 하니 다 커서 삶이라는 걸음마를 배우는 기분이다.


얼마 전 작은아버지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전쟁 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분들이 그 시대를 살아왔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것이 일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 못했다. 생각해 본다 한들 겪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도 안 될 테고.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세상을 원망할 수 없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전부이고, 배곯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시대를 거쳐 지금에 왔다. 그런데 그게 아주아주 오래된 옛날도 아니라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발전한 건 기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심히 살아낸 민족의 미래 모습. 그것이 지금이라는 현실이다. 분명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대를 벗어나 부유한 사람들이 된 것이 분명하다. 살아내야 해서 열심히 살고, 공부해야 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 말이다.




그런데 왠지 처절하게 살아낸 삶만 남고 사람은 빠진 기분이다. 일단 살아내야 사람도 있으니, 무엇이 맞고 틀린 건지는 모르겠다. 다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분명히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어디로 도망을 간 것만 같다. 열심히 살아서 지금에 왔는데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여기저기 외롭고 마음이 공허한 사람이 많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이제는 나라가 아닌 무엇을 되찾아야 할까.


평생 공부에 대한 객체로 살아온 내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는 늘 어려운 숙제다. 배움은 평생 되어야 하는 것이고 공부는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이 배웠으면 좋겠는데 세상의 속도는 너무도 빨라 자꾸 한량 같은 엄마가 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불안한 미래를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넓혀가는 공부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면 밥 굶기 딱 좋은 스타일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밥 굶는 사람은 없는데 상대적 빈곤자가 되겠지) 내가 선택한 행복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핑계로 선택했지만, 그 한량 엄마 노릇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할까 두렵다. 아이들을 망치는 건 아닐까, 이렇게 사는 게 아이들을 도태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유일한 믿음이라면 나의 교육방식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분명 자신의 결대로 잘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다. 내가 할 일은 남편과 함께 배움을 놓지 않는 것. 부모인 우리가 삶에서 배움을 꾸준히 실천하는것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면 된다. 스스로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배워가는 것이 공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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