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영원히 재생되고 있다.
어릴 적, 우리 가족 취미 중 하나는 노래방에 가는 것이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아빠라서 얼큰하게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시면 어김없이 노래방 출동을 외치셨다. 노래목록을 뒤적거리며 이 노래 저 노래를 두 시간 정도 부르고 나오면 가게 사장님은 늘 선물 하나를 주셨다. 바로 노래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였다. 그 노래방만 그랬던 건지 모든 노래방이 그런 서비스를 하던 시절이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별도의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가질 수 있다는 건 귀한 선물이었다.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영원히 허락될 줄 알았다. 흔하고 평범한 날이 간절히 그리운 날이 될 줄 몰랐다. 갑작스럽게 암 환자가 된 엄마는 삼 년 정도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갓 중학생이 되어 겨우 교복에 적응하려고 하던 여름날이었다. 선명한 컬러 영화가 캄캄한 흑백 영화로 바뀌는 듯했고 우리 가족의 취미생활도 영원히 종료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가 보던 책과 필사 노트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오래 보관하고 있던 물건 중에서는 그 노래방 녹음테이프도 있었다. 서랍 한 편에 보물처럼 두었다. 듣지는 않지만,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다는 걸 알기에 영원히 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느 날 지인과 대화하다가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컴퓨터 파일로 변환해 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바로 집에 있던 노래방 테이프가 떠올랐다. 혹여나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손상될까 봐 마음 편히 들어볼 생각도 못 했는데 이번 기회에 맡겨봐야겠다 싶었다. 파일 변환 전에 테이프에 어떤 것들이 녹음되어 있는지 들어보려고 오디오를 구입했다. '광안노래방'이라고 적힌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탈칵!
삼십 년 전 우리 가족의 행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초등학생 특유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둘리 주제가를 목청껏 부르는 나와 동생의 목소리. 술에 취해 자주 들려주셨던 애창곡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이젠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엄마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장면과 감정이 고스란히 재생되었다. 요즘은 휴대전화 덕분에 사진 찍는 것도 쉽고 영상 촬영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90년대 중반이었던 그때는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 몇 장 말고는 추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이 테이프가 유일하게 엄마의 흔적이 살아 움직이게 해주는 것이었다.
녹음테이프의 끝자락에는 가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가 흘러나왔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한 소절씩 채우고 있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걸쇠를 걸어 잠그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오열했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모든 것을 주고 갔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곁에 없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추억이 내게 있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추억을 모아주고 있다. 오늘의 이 추억도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를 일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일상이 내일 또 경험할 수 있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미치도록 그리운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가슴 속에서 영원히 재생 될 오늘의 장면을 부지런히 저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