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1
제주에서 먹고 살기 2 _ 코로나 시대
제주의 불경기가 지속되던 어느 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했어요. 제주에 살다 보면 시큰둥해지는 사건들이 있어요. 아무래도 물리적인 거리가 멀다 보니 북한 관련 뉴스 같은 게 터지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주까지 영향을 미치겠나, 이런 안일한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도 그랬어요. 중국에서 감염자가 나오고, 우리나라에 확진자가 생겼을 때만 해도 이러다 말겠지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대구발 감염자가 늘어나면서 코로나는 슬슬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동선을 최소화했고, 재택근무를 시작하는 곳도 늘어갔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저 역시 제주임에도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어요. 모두 임시휴무에 들어갔죠. 기약 없는 아이들과의 일상이 시작됐어요.
카페는 손님이 거의 오지 않았어요. 문을 닫진 않았지만 제주에 오는 사람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 여파가 지속됐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해요. 커피를 배우면서 망가진 손목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더 약해졌고, 아이와 온종일 같이 하는 생활이 몇 달 지속되자 이제는 사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무릎도 좋지 않았죠.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내가 살아야겠기에 다시 아이들을 긴급보육으로 기관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긴급보육을 신청하는 아이들이 늘어갔고 다시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활기를 띄게 돼요. 다행인 건 제주다보니 기관의 규모가 작아 계속 아이들을 이전처럼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아이들도 마스크를 온종일 끼는 생활에 익숙해져 갔죠.
제주의 불황은 계속 됐고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관광지 장사의 패턴을 좀 익혔다 싶었는데 감염병 국면을 맞아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었죠.(관광지 장사는 주말과 공휴일에 사활을 걸어야 해요. 명절이나 황금연휴가 있으면 그 기간 앞뒤로는 사람이 없어요. 그 기간에만 사람이 많죠. 이런 패턴을 익히면서부터는 공휴일이 언제인지 꼭 확인하고 대비하곤 했어요.) 그러다 점점 날이 풀리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제주로 몰려오기 시작해요. 해외여행이 활발하다 어느 순간 막혀버렸죠. 코로나가 몇 달이면 끝나겠지 했던 사람들은 한동안 몸을 사렸어요. 그러다 코로나는 금방 종식될 수 없는 바이러스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사람들은 국내여행이라도 다니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다시 제주는 활기를 띄기 시작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죠.
이 활기는 좀 불안했어요. 언제든 확진자가 폭증하면 관광객 숫자가 확 줄어들었고, 다시 감소하면 슬슬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죠. 이런 패턴이 한동안 계속 됐어요. 관광산업만큼 경기를 많이 타는 업종이 없어요. 사람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일단 여행 같은 여가활동을 줄이죠. 그걸 육 년 동안 깨달았는데도 코로나라는 전대미문 바이러스에 속절없이 저희는 휘청거렸어요. 작년 11월 셋째주를 기점으로 다시 제주는 오랜 불황에 들어가요. 코로나 확진자수가 폭증하기도 했고, 날도 추워졌죠. 그러다 올해 구정을 지나면서 다시 경기는 좋아지기 시작해요.
올 여름에는 피크를 찍었죠. 저희 카페도 잘 나가던 2, 3년차 때 매출을 올 여름에 오랜만에 기록했어요.(카페는 문 열고 2, 3년차가 가장 잘 된다는 말이 있어요. 첫 1년은 알리는 시기이고, 3년이 넘어가면 신상카페에 치여 다시 장사가 힘들어진다고 해요. 저희도 이런 패턴을 겪었죠.) 다시 먹고 살만해진 거죠. 사람들은 가을이 되도 줄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공휴일에만 사람들이 몰렸다면, 코로나로 인해 일상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어요. 이전에도 이런 경향이 보였었는데 코로나로 더 뚜렷해졌죠. 주말은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리고, 평일에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어요. 제주에 계신 많은 분들은 장사를 접었다가도 다시 열심히 장사를 시작했어요. 숙소도 꽉 차고 음식점, 카페에도 사람이 늘었죠. 이는 아마 강원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국내 관광지는 코로나로 갑자기 호황을 맞았어요. 예상치 못했던 일이죠.
일상 여행이 늘긴 했지만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는 일 년 중 가장 비수기예요. 지금이 딱 그렇죠. 제주에는 여전히 관광객이 제법 있지만 여름, 가을 만큼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얼룩소에 글을 매일 쓰죠.) 해외여행이 조금씩 시작되나 싶지만 오미크론으로 이마저도 불투명해졌어요. 한동안 제주의 경기는 괜찮을 것 같아요. 코로나로 장사를 접으시는 분들이 많은 이때에 한쪽에서는 또 사정이 나아진 사람들이 있으니 알 수 없는 세상이죠. 육지도 다시 경기가 회복되고 있죠. 올 가을부터는 확진자수가 폭증해도 딱히 관광객수가 줄어들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위드코로나 삶을 시작했어요.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지만 사실 코로나가 끝나는 게 좀 두려워요. 사드 이후 닥친 몇 년에 걸친 극심한 불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코로나 이후 해외여행이 본격화되면 과연 제주 경기는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살아남고 누가 그만 두게 될지 걱정이 앞서요. 올해 매출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거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장사예요. 코로나 시국이라 변수가 좀더 많아졌죠. 팔 년 동안 카페에 있으면서 손님의 연령, 성향, 오가는 패턴들을 계속 분석했어요. 어떻게 하면 대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시작한 것이죠. 그렇게 분석해 나름 결론을 손에 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급변하고 장사는 알 수가 없네요.
장사를 시작하면서, 십 년을 버티자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장사든 한 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십 년 하면 성공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모아둔 돈이 있든 없든 자리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내는 말 같아요. 그 말이 제게는 바이블 같았어요. 어떻게든 버텨보자. 십 년.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찌어찌 팔 년이 되어가요. 이제 이 년 남았는데, 여전히 저는 안갯속 같아요.
팔 년을 버틴 원천
어떻게 버텼는지를 곱씹어 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은 저희 카페 시그니처 메뉴 때문이었어요. 그 메뉴가 전에는 세상에 없던 거라 손님들이 많이 흥미로워 하셨어요.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면서 맛 보러 오시는 분들도 늘었죠. 제주에서의 장사는 단골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단골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일 년에 한 번만 찾아와도 저희에게는 단골이 돼요. 관광지라 그렇죠. 한 번 맛보신 분들 중에 제주에 올 때마다 들르는 분들이 생겼어요. 이거 맛보러 제주에 온다는 분들도 계셨고요.
메뉴보다는 첫 인상 때문에 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혼자 여행 왔다가 다녀갔는데 좋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다시 함께 오고, 부부가 되어 또 오고, 아이가 생겨 다시 함께 오는 경우를 여러 번 봤어요. 자주 보는 게 아니라 얼굴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손님들을 만날 때면 정말 감사해요. 손님들도 번화가도 아니고 유명 관광지도 아닌 곳에서 버티고 있는 저희가 신기하신가봐요. 오랜만에 오신 분들 중에 주인이 혹시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저희와 비슷한 시기에 장사를 시작한 가게 중에 많은 경우가 주인이 바뀌거나 장사를 접었으니까요. 그래서 들어오시면서 물어요. 제가 여기 2014년도에 왔었는데 주인분이 그대로이신가요. 네 다행이 그대로예요. 어떻게 버티고 있어요. 손님이 나가시면서 또 말씀하세요. 버텨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버텨주세요. 가끔 이런 말을 들으면 눈물이 핑 돌아요. 감사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해서. 멋진 신상 카페가 여기저기 많은데도 누추한 저희 카페를 잊지 않고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지금까지 버틴 원천 중 하나는 저희 부부가 게으르고 별 재능이 없다는데 있기도 해요. 욕심이 별로 없는 것도 그렇고요. 적게 벌고 적게 쓰자. 대신 아이들과 더 오랜 시간 함께 하자. 이런 생각을 둘다 갖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부모의 손을 덜 탈 때는 좀더 열심히 벌더라도,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둘다 재테크도 잘 못하고, 다른 재능도 딱히 없다 보니 더 나은 벌이를 위한 이런저런 일을 계획하지 못했어요. 여윳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요. 그 때문에 버틴 것 같아요. 무기는 성실뿐이란 생각을 종종 해요.
제주살이가 힘든 진짜 이유
먹고 사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네요. 아무래도 밥벌이가 어디서든 가장 중요하다 보니까요. 사실 제주에서 장사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어요. 이따금 찾아오는 답답함이에요. 제주는 섬이죠. 배나 비행기를 타야만 벗어날 수 있는 섬이에요. 고립돼 있다고 볼 수 있죠. 밤중에라도 원하면 차를 끌고 나가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모든 면이 바다이다 보니 가끔 그 바다가 감옥 창살처럼 느껴져요. 한 번씩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이 몰려와요. 입도하고부터 계속 이어온 증상이에요. 주로 손님이 끊기는 늦가을부터 이런 증상을 겪어요. 저희 부부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이주민들도 겪는 일이에요.
제주의 겨울은 혹독해요. 육지의 날씨와 제주의 날씨가 다를 것 같지만 연결되어 있어요. 육지에 한파가 오면 제주엔 준태풍급 바람이 불어요. 겨울의 날씨를 삼한사온이라고 부르죠. 제주도도 마찬가지예요. 제주의 추위는 곧 바람이에요. 겨울이면 일주일에 사나흘은 이런 바람이 불어요. 이런 날엔 오름도 바다도 가지 못해요. 서울처럼 여기저기 쇼핑몰이 있지도 않아요. 그렇다 보니 막상 나가고 싶어도 다닐 데가 없어요. 그래서 보통 이 시즌에 육지로 여행을 가요. 오랜만에 가족들도 만나고, 필요한 물건들도 좀 사고(제주는 쇼핑하기에 불편해요.), 가고 싶었던 곳을 방문하기도 하죠. 그렇게 잠시라도 육지를 다녀오면 증상은 완화돼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분들은 그렇지 않은데, 이주해온 사람들만 이런 증상을 겪어요. 계절마다 찾아오는 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결국 육지로 다시 이사 간 분들도 있어요. 육지와 제주를 자주 오가며 일하는 분들은 그렇진 않아요. 제주에서만 지내거나, 제주에서 아이가 생겨 이동이 쉽지 않은 경우 이런 답답함을 더 크게 느끼더라고요.
남편과 저도 그 답답함 때문에 제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동안 많이 했어요. 경기에 따라 출렁이는 장사가 지긋지긋하기도 했고요. 실제로 집을 내놓고 어디로 이사를 갈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막막하더라고요. 제주는 그래도 장사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인데, 육지는 달랐어요. 수도권으로 가자니 저희가 가진 돈으로는 집도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요. 남편과 저의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그럼 육지에서도 카페를 열어야 하는데, 집을 구하고 나면 카페까지 얻을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침체된 제주 부동산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처음 이주민이 몰려올 때는 집이 없다고 난리였는데, 어느 순간 이주의 발길이 뜸해졌죠. 이미 여기저기에는 갑자기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고요. 얼마 안 가 이제는 집이 남아돈다고 난리였어요. 섬 생활에 지친 이주민들 중에 상당수가 이때 제주를 떠나려고 했어요. 삼사 년 전이에요. 땅값은 올랐지만 실제 거래를 하려면 금액을 많이 낮춰야 가능했어요. 이때 떠난 분들이 많아요. 집이 팔린 사람은 떠났고 안 팔린 사람은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육지의 삶 역시 보장할 수 없었던 저희는 결국 제주에 남았어요. 큰 고비가 지나갔죠.
애증의 섬, 제주
그 무렵 제주를 담은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어요. 그 프로그램을 보고 저는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어요. 당시 저는 제주에 대해 복잡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남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어린 아이들을 키우느라 몸은 늘 녹초가 됐고, 카페 장사는 예전 같지 않았죠. 미래는 불투명했고요. 제주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은 더 얼어붙었어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아무데나 쏘다닐 수도 없으니 답답함은 더 심해졌죠. 그토록 살고 싶었던 제주였는데, 이제는 제가 제주를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알쓸신잡을 보았죠. 제가 당시 아이들을 재우고나면 가장 즐겨 보던 프로그램이었어요.
방송에서는 늘 제주를 아름답게만 그리는 것 같아요. 알쓸신잡 역시 아름다운 제주의 곳곳을 보여주며 방송을 시작했어요. 달라지기 시작한 건 멤버들의 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였어요. 방송에서는 제주의 역사를 조명했죠.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날 방송을 보면서 제주의 깊은 상처를 더 많이 알게 됐어요.
많이 아시다시피 제주는 오랜 시간 유배지였어요. 죄를 지어야 가는 곳이었죠. 늘 낭만적인 관광지는 아니었던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도피처였죠. 육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을 온 사람들도 많았죠. 제주 사람들이 텃세를 부리는 건 바로 이 역사에서 기인해요. 육지 사람들은 대부분 와서 정착하는 게 아니라 기회만 되면 다시 육지로 돌아갔죠. 처음 이주민들이 몰려왔을 때는 이런 텃세가 더 심했어요. 경험이 있으니까 믿을 수 없었던 거죠. 실제 최근 십 년 동안 제주에 온 이주민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많았죠.
제주는 늘 삶이 고달팠던 곳이었어요. 한정적인 자원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살자니 늘 힘들었죠. 그에 비해 진상해야 하는 물품은 많았어요. 귤, 전복 등이 그랬죠. 이전에 귤은 정말 귀한 과일이었고, 하나하나 숫자를 셀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다고 해요. 지나친 진상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의 삶은 피폐해졌죠. 급기야 제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해요. 조선 중기 제주에는 급기야 출륙금지령이 내려져요. 섬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거죠. 제주는 차별과 배제의 땅이었던 거예요. 유배, 소외, 차단, 억압, 고립의 땅이었던 것이죠. 그 땅에서 또 한 번의 비극이 벌어져요. 4.3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