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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혹은 사명

by 박순우

생일이다. 아침에 눈을 뜬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아침 인사 대신 "엄마 생일 축하해."라고 말한다. 그제야 생일이구나 깨닫는다.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날.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홀로 조용히 보내는 시간들. 아침부터 있었던 두통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타이레놀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편두통이 있을 때면 늘 타이레놀부터 찾는다. 점점 약이 먹기 싫어 버텨보려 하는데 결국 두통이 내 의지를 이겼다. 그래도 생일인데 맑지 않은 정신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 생일은 언제부턴가 핼러윈으로 불린다. 나이가 들면서 생일에 대한 기대나 감각도 흐려졌기에 핼러윈이든 아니든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는다. 하지만 3년 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내 생일은 이제 참사로 기억된다. '왜 하필...... 왜 하필.......' 그 해 내내 우울감을 껴안고 생일을 흘려보낸 나는 왜 하필 내 생일 즈음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하늘을 원망하고 정치권을 욕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억울함 속에서 한참 허우적댄 뒤에야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이미 겪었으리라는 것.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그날 마침 생일이었던 누군가는 나처럼 웅얼거렸을 것이다. '왜 하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의 억울함은 조금 가라앉았다.


생일 같지 않은 날이 되어버렸지만, 생일이라고 마냥 기쁘게만 지낼 수 없는 날이 되었지만, 그날 이후 매년 생일이면 그날의 이태원이 떠올라 착잡한 마음이 나를 휘감지만, 나 혼자만 이런 건 아니기에.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나의 생일을 묵묵히 건넌다.


누군가에게 기쁨인 날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다. 누군가에게는 황홀한 탄생의 날이 누군가에게는 예기치 못한 죽음이다. 오래도록 글자로만 알았던 삶의 명암을 나는 이제 내 생일 때마다 또렷하게 피부로 느낀다. 그러니 담담해지려 한다. 나이가 들며 생일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게 이럴 땐 참 다행이다.


그런데도 이 즈음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시기다. 남편과 나의 생일은 하루 차이이니. 어젯밤 첫째가 갑자기 지갑에서 6만 원을 꺼내와 남편과 내 손에 각각 3만 원씩을 쥐어주었다. 동생과 함께 돈을 합치고 싶었지만 동생이 요지부동이자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 안 되겠다며, 선물로 현금을 꺼내온 것이다.


처음 자식으로부터 돈을 받고는 남편도 나도 어리둥절했다. 이 아이에게 6만 원은 얼마나 큰돈인가. 추석에 받은 용돈의 일부를 지갑에 고이 넣어두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 돈을 꺼내어 부모에게 쥐어주는 아이의 속깊은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남편과 나는 1만 원씩만 받겠다 하고 아이에게 4만 원을 도로 돌려주었다. 아이는 남은 돈으로 외식을 하자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첫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돈을 모아 부모님께 드리자고 제안한 형을 거절했던 동생도 마찬가지. 우리에게 돈을 건넨 첫째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소화하지 못하는 둘째도 품에 꼭 안아주었다. 너희들은 내게 존재 자체로 선물인데, 무슨 선물이 더 필요할까. 선물을 주든 주지 않든,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너희들은 그 자체로 내게는 찬란함이다. 내게 너무나 크고 순수한 사랑을 주는 아이들.


두통이 좀 나아졌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읽을 수도 쓸 수도. 언제부턴가 내게는 매일매일 맑은 정신을 갖는 게 무척 중요해졌다. 커피나 약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내 노력으로 맑은 하루를 보내는 것. 웬만하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이유도, 자기 전에 되도록 휴대폰 대신 책을 보려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커피 대신 녹차를 우려 입가로 가져간다. 한 모금에 많은 것들이 깃들여 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 보드라운 연둣빛 잎사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빗물과 검붉은 화산토로 뻗어나간 뿌리까지.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질수록 또렷해진다. 나의 갈망이, 나의 시선이 닿는 곳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지만 결국 또렷이 응시하고 마는 지점이.


살기 위해, 나를 구하기 위해 써왔던 에세이가 얼마나 힘든 글인지를 나는 이제야 조금 안다. 우두커니 새소리와 음악소리만 들려오는 공간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며 지난날의 나를 떠올린다. 힘든지도 모르고 그저 쓰고 또 썼던 날들. 이제야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돈다.


김윤아 <꿈> 中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거운 짐이 되지

괴로워도 벗어 둘 수 없는 굴레

너의 꿈은 때로 비길 데 없는 위안

외로워도 다시 걷게 해주는

때로 다 버리고 다 털어버리고

다 지우고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서운 거울이라

초라한 널 건조하게 비추지

너의 꿈은 때로 마지막 기대어 울 곳

가진 것 없는 너를 안아주는

간절히 원하는 건 이뤄진다고

이룬 이들은 웃으며 말하지

마치 너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나는 왜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일까. 마흔네 번째 생일을 지나면서도, 나는 왜 아직도 꿈을 붙들고 있는가. 그 꿈은 내 꿈이 맞나. 스스로 짊어진 짐은 아닌가. 사실 크게 소망하는 것도 크게 이루고픈 것도 없으면서, 여전히 나는 왜 꿈 주위를 맴돌까.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내가 나 자신에게 채운 족쇄 때문일까, 아니면 내게 남은 사명 때문일까.


일상이 불안할수록 잡음은 커지고 나는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다. 이것 또한 핑계인지도.


그래도 오늘은 핑계를 걷어내고 몇 자 적는다. 생일을 핑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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