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Edited by iid the HRer]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편하게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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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챗 자리에서 한 HR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근 회사에서 인력 축소가 있었어요. 다들 불안해하고, 분위기도 어수선하네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정감을 주고 싶어요. 직원 만족도 조사를 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말만 들으면 참 좋은 제안이다. 구성원의 불안을 덜고, 조직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진심이 담겨 있다. HR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봤을 ‘좋은 의도’다. 그런데 HR의 세계에서는 이 ‘좋은 의도’라는 게 언제나 함정이 된다. 선의는 타이밍을 타고 망한다. 마음은 진심인데, 현실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HR의 현실은 늘 감정과 리스크 사이에 걸쳐 있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인데, 지금 해도 될까?’라는 고민은 HR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삼켜본 질문일 것이다.
HR의 진짜 역량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언제 하느냐’에서 갈린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HR의 판단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공기 읽는 기술에 가깝다. 책상 위의 데이터보다 회의실의 온도, 복도에서 오가는 표정, 단체방의 말투가 훨씬 더 많은 걸 알려준다. 숫자보다 눈빛, 계획보다 분위기가 HR의 나침반이 된다. 그래서 HR의 일은 결국 ‘판단의 직업’이다. 논리보다 현장, 원칙보다 타이밍, 정답보다 공기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문제는 그 공기가 늘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날은 구성원이 웃고 있어도 공기가 무겁고, 또 어떤 날은 아무 말이 없어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돈다. HR은 그 미묘한 기류를 읽어야 하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감정과 리스크 사이의 경계를 관리하는 사람에 가깝다. 표면 아래 흐르는 정서, 리더의 신호, 구성원의 피로, 시장의 불안까지 한꺼번에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은 무엇을 할 때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결국 HR의 세계는 늘 불완전하고 모호하다. 제도와 사람, 전략과 감정, 이상과 현실이 늘 한 줄 차이로 엇갈린다. 그렇기에 HR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지금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지금 해도 될까?’다. 좋은 HR은 실행보다 감지에 능하고, 행동보다 멈춤의 이유를 잘 읽는다. HR의 통찰은 종종 그 ‘멈춤의 순간’에서 나온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망설임이야말로 HR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그 불안한 상황, 정말 다 정리된 건가요? 경영진은 안정화에 의지가 있나요?” 이 질문은 ‘조사를 해야 하나’보다 훨씬 다른 질문이다. 지금 그 질문을 던질 때인가를 묻는 것이다. 만족도 조사는 단순한 ‘의견 수집’이 아니라 기대의 문을 여는 일이다. HR이 묻는 순간, 구성원은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믿음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배신이 된다. 문제는 ‘좋은 의도’일수록 속도가 빠르다는 데 있다. 마음이 앞서면 판단이 흐려진다. HR은 사람의 감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기에, 불안을 덜고 싶은 본능이 생긴다. 하지만 HR의 역할은 감정의 위로자가 아니라 상황의 번역자다. 구성원이 느끼는 불안을 그대로 리더에게 옮기는 것도, 반대로 리더의 불안을 구성원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위험하다. HR이 해야 할 일은 그 두 감정의 파동을 조율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지금은 듣기보다 버텨야 하는 시기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묻는다’는 건 이미 관계를 맺는 일이다. 한 번 관계가 맺어지면, 그다음엔 반드시 기대가 생긴다. 그리고 그 기대를 외면하면 냉소로 돌아온다. “이 회사는 들을 마음이 없는 곳이구나.” HR의 신뢰는 무너질 때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특히 조직의 신뢰는 한 번 금이 가면, 그것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평균 여섯 달 이상 걸린다. 그러니까 한 번의 만족도 조사가 HR의 신뢰를 쌓는 게 아니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듣는 시점이 어긋나면, 좋은 질문조차 공격으로 들린다. HR의 행동은 언제나 호의와 책임이 세트로 붙어 있다.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인데’라는 말은 HR 세계에서 거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행동은 기대를 낳고, 기대는 곧 책임으로 돌아온다. 마치 준비 없이 반려동물을 입양했다가 다시 보내는 것처럼, HR의 실행도 누군가의 감정을 남긴다. ‘좋은 일’을 하고도 “괜히 건드렸나…” 하는 후회가 남는 이유다. 특히 HR이 만든 변화는 당장 보상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결과보다 ‘기분’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HR의 실행은 늘 짧은 시간 안에 평가받고, 그 후폭풍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HR이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리더의 ‘준비도’다. 이건 기술보다 심리의 문제다. 리더의 의지를 읽는 건 늘 어렵다. “의지는 있는데, 여력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HR은 이 차이를 간과한다. 리더가 “좋아요, 해보죠”라고 말했더라도, 그것이 실제로는 “지금은 그냥 넘기고 싶어요”의 완곡한 표현일 때가 많다. 리더가 불안한데 HR이 먼저 나서면, 결국 감당은 HR 몫이다. 이럴 때 HR은 종종 오해한다. ‘리더가 나를 믿으니까, 내가 먼저 움직여야지.’ 하지만 믿음과 위임은 다르다. 리더의 신호를 너무 앞질러 읽으면, 그건 실행이 아니라 ‘조급함’이 된다. HR은 언제나 ‘앞서가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박자 늦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슷한 실수는 제도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HR이 제일 쉽게 빠지는 착각은 “좋은 제도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조직의 타이밍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제도는 아무리 완벽해도 실패한다. 구조조정 직후에 평가제도를 새로 도입하거나 급여밴드를 손보는 건, 불난 집에 페인트칠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럴 땐 ‘제도를 고친다’는 명분이 구성원에게 ‘우릴 재단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HR의 언어와 구성원의 언어는 종종 다르기 때문이다. 제도의 완성도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걸 받아들일 체력이 있느냐다. 때로는 제도가 너무 잘 만들어져도 문제다. 스타트업의 업무 구조가 아직 불안정한데 복잡한 직무체계를 도입하면, 사람보다 제도가 먼저 움직인다. HR이 밤새 만든 구조가 오히려 조직의 속도를 늦춘다. 작동하지 않는 제도는 공정이 아니라 비용이다. HR은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조직의 ‘소화력’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조직이 소화할 수 없으면 독이 된다. 그래서 좋은 HR은 ‘만들 실력’보다 ‘멈출 용기’가 더 필요하다. HR은 제도를 통해 조직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제도를 매개로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다.
문화 이벤트나 캠페인도 마찬가지다. 불안한 시기에 리프레시 데이, 칭찬 캠페인, 감정 공유 워크숍을 열면 구성원은 말한다. “이 와중에 분위기 전환?” “사람을 내보내놓고 무슨 행복 워크숍이야?” 이건 단순한 냉소가 아니다. 현실 감정과 HR의 의도 사이의 온도 차다. HR의 진심이 아무리 따뜻해도, 구성원의 현실이 차가우면 그 온도 차는 오히려 상처가 된다. 그래서 HR이 해야 할 일은 ‘행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온도를 맞추는 일이다. 결국 HR의 타이밍은 기획력보다 감각에서 나온다. 경험이 쌓일수록 HR은 ‘좋은 일’을 할 때 더 조심스러워진다. 행동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는 타이밍에 달려 있다. HR은 사람을 다루는 직무가 아니라, 조직의 온도를 유지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좋은 HR은 제도를 설계하기보다, 타이밍을 관리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읽는 감각은, 결국 수많은 실패와 후회 끝에 얻는 일종의 ‘직업적 직감’이다.
HR의 일에는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많다. 감정과 리스크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하니까. 감정을 외면할 수도, 휘둘릴 수도 없다. 분위기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오히려 HR을 덫에 가두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HR의 실력은 ‘손보다 눈이 빠른 사람’에게 있다. 손이 먼저 움직이면 감정이 앞서고, 눈이 먼저 움직이면 타이밍이 보인다. 때로는 ‘아직 아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가장 용감한 결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전략이다. 그건 무책임이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살을 붙이면 흉터만 남는다.
조직은 오래 기억한다. HR의 한마디, 제도 하나, 이벤트 하나가 누군가에겐 신뢰의 근거가 되고 누군가에겐 배신의 증거가 된다. HR의 실행은 결국 감정과 리스크의 균형 위에 선 줄타기다. 그래서 진짜 HR은 ‘좋은 일’을 실행하기 전에 스스로 묻는다. “지금은 그럴 때인가?” “이게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읽힐까?” “하고 난 뒤, 정말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거다.
가끔 리더들은 묻는다. “왜 가만히 있어요?” 그럴 때 HR은 속으로 답한다. “지금은 가만히 있을 때라서요.” 좋은 HR은 문제를 덮는 대신 타이밍을 기다린다. 보여주기보다 버티기를, 실행보다 감내를 택한다. 가만히 있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다. HR의 본질은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버텨주는 사람’이니까. HR은 언제나 ‘무엇을 할까’보다 ‘언제, 왜, 지금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 절제는 무능이 아니라 감각의 결과이며, 그 망설임은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결국 HR의 판단력은 ‘좋은 일을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있는 HR은 흔들리지 않는다. 혼란기에도 조직의 균형을 잡는 진짜 버팀목은, 바로 그 ‘멈춤’을 아는 사람이다. 판단력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HR의 전문성은 복잡한 제도를 아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조직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결국 HR의 현실 감각은, 좋은 의도를 끝까지 책임지는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