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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신문은 대상화하지 않는다

by 권단

#1.대상화한다는 것은 안에서 바깥을 보는 거다. 안에서 바깥은 주로 창을 통해 본다. 언론을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깥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창이 얼룩지면 잘 안 보이고 굴절되면 왜곡되어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이다. 잘 안보이는 것은 닦아서 보면 되지만, 애시당초 굴절된 유리가 끼어져 있으면 창 유리를 갈아야 온전히 볼 수 있다. 창은 창대로 중요하다. 지역신문, 마을신문을 똑같은 '창'이라 통칭하지 않고, '거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안과 밖이 벽으로 분리되어 창으로 관전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체계와 관계, 제도와 생활로 굳이 나누자고 한다면 전자는 체계안에서 그려진 삶을 재현해낸 형태이고 후자는 관계의 확장이다. 전자가 주로 국민으로 기능하고 국민성, 애국애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주민, 거주하는 주민, 주체적인 주민, 자치와 자급, 자립의 기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각 신문이 갖고 있는 이념의 지향과 무관하게 전국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역신문, 마을신문은 삶의 영역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의 구실이 강하다. 대상화하지 않는다. 그 자체의 삶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피드백이 더 격럴할 수 밖에 없다. 나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사 하나하나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더 신중하고 윤리적일 수 밖에 없다. 자칫 지역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과 마을신문, 더 삶과 밀착될수록 더 높은 윤리의식과 더 신중하고 진실된 글쓰기가 필요하지만, 모든 지역이 반드시 그런 경우는 아니다. 지역 내에 소권력과 소자본과 협잡하여 같이 뒹굴기 시작하면 사이비신문도 소 체계에 편입되어 군림하려 든다. 지들끼리 짬짜미하며 주거니 받거니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 광고로 생명연장의 꿈을 꾼다. 거울도 창처럼 충분히 오염될 수 있다. 먼지가 끼이고 왜곡된 거울이 들어서면 항상 삐둘어져 보이게 마련이다. 이는 종국에는 지역의 파멸까지 이어진다. 일반 저널리즘과 커뮤니티 저널리즘이 다르듯 창과 거울의 구실은 확연히 다르다.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기자로써 쓰는 삶이 공동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쉽게 만날 수 있고 누구든 언제든 쉬이 마주칠 수 있다. 기사를 잘못 쓰면 비판당하고 힐난당한다. 자칫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꽁동체성이 살아날 때의 이야기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기존 소권력 소자본과 함께 부패와 부조리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옥천신문이 기자를 뽑을 때 옥천에 꼭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유는 이 대상화의 관점을 불식시키기 위함이고 더 생활속에 밀착하기 위해서다. 가까운 대전에서 출퇴근한다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은 다르다. '대전 사람이 왜 옥천에서 취재를 해'하는 거부감이 생길 뿐더러 비판적인 보도가 나오더라도 '대전에 사는 사람이 맘대로 옥천을 비판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것보다 가장 큰 중요한 이유는 살아보면 달리 보인다. 내 삶이고 우리의 삶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관점과 시각이 달라진다. 공간적 구성력이 새롭게 조성되고 관계의 틀도 새롭게 마련된다.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라 인지하는 것과 잠시잠깐 일로서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가짐은 달라진다. 삶에서 우러나는 기사를 쓸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제보자이다. 인사하면서 말을 건네면서 물건을 사면서 한마디씩 건네는 것이 제보이고 민원일 수 있다. 그런 관계는 업무로서 만나는 관계와 사뭇 다르다. 이 때 지역신문과 마을신문 기자의 스탠스가 중요하다.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늘 경계에 서있다. 매몰되지 않고 불가근 불가원의 거리를 지키면서 긴장 관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면 매몰된다. 매몰되기 시작하면 관계의 사유화가 진행되고 본인도 모르게 곡필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공동체 안에서 때론 외로운 섬처럼, 소수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도처럼,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대처럼,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2.제대로 된 신문은 감히 권력과 자본이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돈없고 힘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말과 글이다. 말과 글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발화할 수 있다. 공론장마저, 언로마저 돈과 힘에 의해 뺏긴다면 시민적 주체성은 말살당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난 통치자라 하더라도 훌륭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언론까지 가질 수는 없다. 가지는 순간 독재의 발걸음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철저하게 언론은 주민들에 의해 귀속되어야 한다. 주민들이 출자하여 언론을 만들어야 하고, 주민이 참여하는 군민주, 협동조합 개념의 언론사가 많이 나와야 한다. 보통 지역 방송사는 광역으로만 존재하고 최근 유튜브와 공동체라디오 팟캐스트 등 다양한 방송매체가 나오고는 있지만, 예산지원을 받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란 지난하다.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것에도 한계를 지니고 제작에 들이는 품이 만만찮고 수익성을 찾을 수 있는 구조도 어렵다. 지역화 된 소재일 수록 인구가 적기 때문에 유튜브 구독자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구독자수를 늘려 광고까지 유치하려 한다면 인구가 많은 도시사람의 입맛에 맞게 지역의 소재들을 계속 변형 가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칫 옐로우로 변질될 가능성도 크다. 첫 시작은 그래서 전통적 저널리즘인 신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시골일수록 아직 종이신문이 먹힌다.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야 뉴 미디어가 창궐하지만, 조그만 농촌 시골은 아직까지도 종이신문 구독을 하고 신문을 통해 뉴스를 보고 있다. 구독료와 광고료를 병행하여 받을 수 있기때문에 신문사 재정에도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된 지역신문을 만들려면 훈련된 취재기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작은 지역신문이라 하더라도 상근기자 두명 이상은 확보할 필요가 있다. 세명이 가장 적정선이고 그 이상 재정형편에 따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취재한 것에 대해 심도깊은 논의와 숙의를 통해 기사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재해야 할 지, 무엇을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 편집국 회의가 사실상 신문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


#3.마을신문은 매우 중요하다. 마을이라 하면 보통 한개의 리, 동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진정한 마을의 의미는 생활권이라 생각한다. 보통 면, 또는 학구, 읍 권역, 동 등으로 행정구역과 일치하기도 하고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마을을 리로만 한정하면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 마을의 다른 이름을 아직 찾지 못해 마을로 그냥 통칭하게 되는 데 엄밀히 말하자면 옛날 초등학교 학구가 생활권에 더 근접하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면 소재지가 형성되고 또는 정서적 구심이 만들어진다. 이런 단위로 마을신문이 필요하다. 면소재지와 오일장이 섰던 곳에 관계가 중첩되고 공론이 형성된다. 지금은 대부분 행정구역을 따라가지만, 더 세밀해질 필요도 있고 그냥 거기에 조응하며 새로운 마을 개념을 만들 필요도 있다. 마을신문 하면 왠지 정감있고 알콩달콩한 소식들만 담아야 하나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 신문의 친밀감을 높이고 우리 신문이라는 일치성을 가질 필요는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주민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높이면서 주민들의 요구는 높아질 것이고 민원과 부조리 부패에 대한 제보,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그어 놓은 프레임에 가둬놓기 보다는 열어놓고 성장해야 한다. 언론 본연의 기능으로 정보제공, 소식전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과 자본, 지식인의 행태에 대한 비판, 감시, 견제이다. 마을신문과 지역신문을 작다고 폄하하며 그저 그런 자그만 소식을 담는 작은 매체라고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어디든 보편적인 언론의 역할이 존재하며 이에 지역의 특수성을 담아 더 밀착된 보도를 하며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4.공동체와 공공성은 한 짝이다. 옥천신문의 모토가 '지역의 공공성을 지키고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다는 풀뿌리 언론 옥천신문'이다. 그만큼 공공성은 중요하다. 공공성이 실종된 공동체는 지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역의 공공성을 지켜야 살맛나는 공동체가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구독의 기반이 탄탄하지 않으면 재정구조상 광고료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의 광고, 그리고 관계자본이 많은 인맥 중심의 광고가 무너질 경우 신문은 금방 무너질 수 있다. 금방 무너지지 않으려면 합리적인 구독료 가격 책정이 중요하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구독료 수입 또한 중요하다. 옥천신문은 1년 매출액 중 구독료 수입기 광고료 수입을 넘어선다. 구독료가 탄탄히 받쳐주기 때문에 의도를 가진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 광고, 기업 광고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외압에 의해 기사가 나오지 않거나 외압에 의해 기사가 나오는 경우는 없다. 저널리즘의 기본 윤리의식을 밑바닥에 깔고 기자와 편집국의 능력치에 따라 기사가 생성될 뿐, 다른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은 끊임없이 경계하며 차단한다.


지역에 살다보면 친소관계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것은 공공성이다. 관계와 사건을 유불리로 판단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사건의 맥락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에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친소관계에 따라 유불리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멀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져서도 안 된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지만, 해야한다. 내 이웃, 내 아이 친구의 부모,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기사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지역이 좁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얼마든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언론윤리법제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신문사 내에서 이에 대해 충분하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익명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누군가를 공론화의 지면에 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원색적으로 욕을 듣고 관계가 끊어지기도 하며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고충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언론이라는 것, 기자라는 일 때문에 썼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사감을 갖고 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이 신문이 정당하게 취재해서 팩트를 갖고 썼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화가 나서 전화를 하며 욕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외려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사람을 봐왔다. 상처가 안 날 수야 없겠지만 넘고 가야할 산이기도 하다. 신문에는 다양한 삶의 양태를 소개하고 만나게 하는 공동체적 기사와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고 견제 감시하는 공공성 기사가 황금분할로 절반정도로 균형을 갖춰야 한다. 신문에 비판적인 보도만 나면 너무 생경하고 보기 두렵고, 너무 알콩달콩한 소식들로만 채워지면 밋밋할 수 있다. 조화를 이루어야만 자랑스러운 '우리신문'이 될 수 있다.


#5.커뮤니티 저널리즘은 지역 뿐 아니라 마을, 학교, 상가, 교회 등 다양한 공동체와 결사체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언론을 의미한다. 지역 공동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결사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며 스스로의 비전을 만드는 것. 스스로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이는 커뮤니티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구실이다. 지역사회공동체의 재현이고, 여러 결사체의 구현된 모습이기도 하다.


#6. 모두가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건, 희소성있는 이야기들만 뉴스로 나오지만, 커뮤니티 저널리즘에서는 모두가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은 게 없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끄집어내는 것이 기자의 능력이다. 널린 게 기사거리다. 맛집만 탐방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 있는 상가를 모두 탐방하고, 지역의 모든 사람을 인터뷰한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쓴다. 사소한 것이란 없고 기사거리가 안 되는 것도 없다. 원하면 어떻게 든 넣어준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말이다. 황금미꾸라지를 발견했다는 것도 우리집 소가 쌍둥이를 났다는 것도, 우리 집 개가 새끼를 열두마리 낳았다는 것도 고구마에 꽃이 피었다는 것도, 행운목에 꽃이 피웠다는 소식도, 호랑이 발자국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도, 고추 농사를 잘 지었다는 것도 원하면 취재해준다. 어렵게 전화를 한 것을 그냥 기사거리가 안 된다고 끊는 것은 없다. 문턱을 최대한 낮추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들어주고 기사화해주면 자존감이 살아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며 한 주 동안 이야기거리가 만들어진다. 어렵게 전화했을 때 '이거 기사거리가 안 되요'라고 끊는다면 이 사람은 다시는 신문사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나 인터뷰 좀 해주세요'리고 전화오고 찾아오면 해주면 된다. 우리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한 사람 한사람의 목소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전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과 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말 없는 자들의 말, 글 모르는 자들의 글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러 찾아다녀야 한다. 지역 안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존재감 없는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일 수 있다. 맨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옥천에는 주민등록상 5만명 정도가 있지만, 지역신문 기자하면서 5만명을 다 만날 수 있을까. 지역이 좁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20년을 살아도 못 가본 곳이 허다하며 만나지 못한 사람이 정말 많다. 다 안다고 하지 말아라. 모르는 것 천지이다. 대전을 성심당으로, 여수를 밤바다로 아는 서울 사람들이 정말 무지한 것이다. 우리나라 몇 년 살았다고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고, 외국 관광지 몇번 다녀왔다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참 건방진 태도다. 늘 겸허하게 다가가고 정중하게 들어야 한다. 듣고 기록하는 직업은 늘 배운다. 그게 장점이다.


#7.지역신문 기자는 더 깊숙하게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좋은 사례와 정책, 대책을 찾으러 전국 방방골골,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지역신문이기 때문에 마을신문이기 때문에 그 마을과 지역에만 갇혀 기사를 생성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지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 너머 세상에도 늘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는다. 그것은 연대의 끈이고 단초가 된다. 신문 기사로 사례가 공론화되면 그것을 계기로 와서 강의도 할 수 있고 탐방도 할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지역안에서 의제설정을 하고 행위로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지역신문기자로서 참 가치있는 일이다.


#8.지역신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솔루션 저널리즘을 해왔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민원 해결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학교 앞 횡단보도와 인도, 골목 쓰레기문제부터, 작은도서관 운영비 지원 등 결코 작지 않은 문제들을 헤아릴 수 없이 풀어왔다. 지역신문의 효용성을 이미 극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효용성이 충분이 있다. 제보가 오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어떤 것은 단박에 해결되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십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만 알고 있던 문제를 공론화하는 순간, 기록하고 공유되는 순간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공론화된 문제는 언제든 재거론하며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제보가 온다. 5만명에 취재기자 10명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끊이지 않는 제보를 처리하려면 20명도 부족하다. 지역의 산적한 문제를 깊이있게 취재하고 쓰려면 30명도 부족하다.


#9.풀뿌리 지역신문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초석이고 마지막 보루이다. 1초짜리 민주주의에서 뽑아준 의원들과 군수를 우리는 제대로 감시하고 있는가. 군단위 같은 경우, 지역신문이 없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가 없다.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로 거점도시나 광역에 위치한 방송국들에서는 이들까지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신문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의회가 열릴 때마다 의원간담회가 있을 때마다, 계수조정을 할 때마다 항상 지역신문 기자가 배석을 한다. 말 한마디 거론되는 이야기들 모두를 지면에 게재한다. 옥천신문을 구독하면 뽑아준 의원과 군수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발언을 했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이 효능감 하나만으로도 지역신문의 존재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방청석에 한번 가봐라. 한명도 없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쁜데 시간 쪼개어 방청석에 앉아있을 시간도 여유도 없다. 지역신문 기자라도 없었더라면 그곳은 의원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농담하는 자리가 될 개연성이 충분하다. 옭고 그름이 아닌 유불리로 예산을 통과시킬 개연성이 농후하다. 옥천만해도 1년 예산이 5천억원에 달하는데 어떤 정치적 행위로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는 것이 대체 말이 되는가. 지역신문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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