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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1. 2024

지역을 지키는 풀뿌리 언론, 어떻게 해야 할까

#1.보통 지역신문이라 하면 광역단위보다 시군단위 지역이 조금 더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광역에는 일간신문이 있는데 주로 도청이나 광역시청이 있는 거점도시 소식을 주로 다루고 각 시군에 주재기자를 파견하여 그냥 기사들을 추수한다. 구색을 맞추고 일간형식으로 발행하는데 다른 시도는 모르겠지만, 충청도에서는 거의 구독을 하지 않는다. 관공서 아니면 돈을 주고 사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네이버 뉴스 검색을 해봐서도 알겠지만, 네이버나 구글, 다음에 '옥천'을 치고 뉴스 검색을 해보면 똑같은 뉴스들이 줄 나래비로 10여개씩 매체 이름과 기자이름을 달리 한채 묶음으로 나온다. 100% 관공서 보도자료라고 보면 된다. 군 홍보팀 보도자료 담당이 각 부서의 일을 취합해 매일 3-4개씩 보도자료를 생산하면 제목과 리드, 문장만 약간 다듬어 본인 이름으로 출고한다. 얼마나 편한 직업이냐. 지금도 당장 확인할 수 있다. 군청에서 보내는 보도자료와 거의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지역주간신문은 주재기자실에 안 들어간다. 거기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주재기자실의 기자 대장이 들어오는 것을 심사한다. 옥천신문은 안 들어가고 기자실의 폐해를 여러차례 지면으로 지적한 바 있다. 


#2.보통 풀뿌리 신문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지역 주간신문이 보편적이다. 여러가지 재정과 인력상황 때문에 지면으로 못 내보내고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신문사도 있고 격주간, 혹은 한달에 한번 지면 신문이 나오는 곳이 있다. 지역주간지와 지역 일간지와는 지역을 대하는 방식이 정서적으로 다르다. 일간지는 대상화하여 멀리서 조망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주간지는 그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지역주민과 밀착된 취재가 가능하다. 물론 주간지 중에도 사이비 신문이 즐비하다. 언론사 간판 걸어놓고 정치놀음하려고 하는 신문도 참 많다. 우후죽순 사이비신문이 창궐하는 지역보다 차라리 없는게 나을 수도 있다. 말과 글을 왜곡하는 것은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은 과잉과 결핍으로 고통받는다. 어떤 곳은 사이비신문의 범람으로, 어떤 곳은 지역신문이 하나도 없어 언론의 사막화로 권력이 전횡을 휘두르면서 힘들다. 지역신문은 취재기자 하나하나가 일당백이고 힘이다. 보통 옥천, 보은, 영동군 세지역을 연합뉴스 기자 하나가 커버한다. 그런데 옥천 한 지역을 옥천신문 기자 10명이 커버한다. 연합뉴스 기자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따라올 수가 없다. 저인망으로 쫙 기사를 아래로부터 훑기 때문에 기사의 깊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지역신문의 재정 형편이 나아지면 취재인력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 살길이다. 만나는 사람과 커버하는 지역이 달라지고 이는 뉴스의 질에 단박에 영향을 미친다. 다다익선이다. 주재기자들은 정보를 알고도 못 쓰는 기자들을 옥천신문은 쓴다. 비교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옥천신문은 일부러 옥천 출신 기자를 안 뽑는 게 아니지만, 기자 구성을 보면 전국 팔도에서 다 올라왔다. 혈연, 학연, 지연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만일 내가 옥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면 기자생활하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친구, 학교 선배, 지역 선배 등의 청탁과 등쌀에 내가 과연 기자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아득하다. 지역출신이면서 정론직필을 하는 기자들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3.기초 시군단위 지역신문은 일간은 무리이고 주간이 딱 적당하다. 격주간은 너무 멀고 월간은 잡지의 영역에 들어선다. 적어도 주간은 나와야 한다. 기자 2명이면 대판 12p가 적당하고 취재기가 3명이면 16p가 적당하다. 물론 더 많은 기자들이 밀도있게 신문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신문의 질 못지 않게 페이지 수, 크기 등 양의 측면에서 구독료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질이다. 적절하게 타협을 해야 한다. 지역신문은 운동적 성격이 강하지만, 시장에서 또한 지속가능하게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생존은 중요하다. 기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지혜롭게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구독과 광고의 선순환이 이어져야 하는데 이 선순환이 제대로 자리잡을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초심은 아름다웠지만, 재정에 허덕이면서 변질되는 신문이 많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장 뗏거리도 안 생기는데 기자들한테 헌신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독료는 찔금찔금 나오니 비교적 덩어리가 큰 광고에 신경을 쓰게 되어있고 기자한테 광고를 해오라고 하는 순간 이 신문은 사망선고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독 그래프를 그린다거나 창간기념일에 광고 수주를 기자한테 떠미는 신문사는 망조가 들린 것이다. 그런 신문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 가더라도 지역에 그저그런 신문으로 생명연장만 길게 할 뿐이다. 



#4.창간을 하려면 사람을 모아야 한다. 창간준비위원회를 발족해 적어도 1-2년 정도 버틸 수 있는 총알을 마련해야 한다. 일단 기자 한명을 상근직으로 채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최소 5천만원에서 1억원 정도의 자본금을 모아야 한다. 군민주 형태나 협동조합으로 지역신문의 꼴을 갖추고 사회적기업 신청을 하는게 좋다. 지역신문처럼 사회적 목적과 필요가 분명한게 어디 있으랴. 그럼 인건비 지원과 사업개발비 등 버틸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만들어진다. 제도적 지원이 끝날 때까지 자립 기반을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 시작하는 신문은 월 만원의 구독료를 권장하고 싶다. 왠만한 시민단체 후원도 만원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역신문은 대판 12페이지를 내고 구독료 월 5천원을 받는게 일반적이다. 이 정도로는 답이 안 나온다. 물론 구독료 문턱을 낮추고 더 많은 구독을 하기 위해 5천원의 구독료를 유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참 지난한 길이다. 기존 구독료를 올리려면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아예 월 만원으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지로는 없애라. 괜히 두번 일만 만든다. 자동이체나 씨엠에스로 받는 것이 좋다. 무가지는 하나도 뿌리지 않는게 좋다. 그래서 초창기 월 만원짜리 구독자 300명만 확보한다면 출발이 좋은 거다. 당장 월 300만원이 생기는 것 아닌가. 창간준비위원회나 군민주, 협동조합원들의 관계망을 통해서 월 300독자는 확보를 하는 것이 좋다. 그 밑천으로 이제는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줄 때이다. 매주 나오는 지면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야 한다. 독자들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구독자가 늘어날 수록 취재기자를 확보하는데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구독이 많아지면 광고는 따라붙게 되어 있으나 초창기에는 대표나 이사, 운영위원 중심으로 광고 영업도 해야 한다. 광고는 보통 1면 66만원, 칼라 속면 55만원, 흑백 33만원, 줄광고는 한 줄에 5천원 정도 내외로 적정한 광고 가격을 매겨 매뉴얼화하는 게 좋다. 광고단가가 들쑥 날쑥하면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구독료 외에 들어오는 광고를 덤으로 여기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탄탄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면 보통 취재기자 3명(편집국장 포함)이 되면 비교적 기사의 질을 담보하는 지역신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문사 운영은 뭐 다른게 없다. 구독료와 광고료로 번 돈을 인건비와 운영비로 쓰는 것이다. 운영비는 되도록 단촐하게 해야 인건비로 많이 지급할 수 있다. 결국 신문사는 능력있는 취재기자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시골-농촌-지역 이야기


#1.지역은 혈연, 지연, 학연이 교차하고 중첩되는 공간이다. 특히 농촌지역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고 정착인구가 유입인구보다 많다보니 이것들이 더 도드라지게 보인다. 마을마다 대표 성씨가 있어 어떤 마을은 무슨씨라고 호명될 정도로 아직도 씨족 사회는 건재하다. 서로 친인척 관계다보니 아무래도 끈적하고 각성바지에게 배타적인 것도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가 반드시 통용되진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치단결하여 반대편 의견을 묵살하고 밀어내는 데 쓰인다. 그것은 같은 씨족이면서 오랫동안 교류해온 축적된 경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남이가'라는 것이 작동되는 것이다. 마을을 넘어 면으로 나오면 혈연과 함께 지역, 학연이 또한 교차-중첩된다. 읍에 떨어진 오지 면일수록, 오지 학교일수록 향우회나 동창회가 활성화된다. 시골에서 고생한 경험이 많을 수록 그 공감대가 깊이있게 형성될 수록 마음은 더 끈적하게 접합한다. 


#2.옥천도 인구가 5만명에 가깝지만, 지연, 혈연, 학연 등의 연결된 관계로 인하여 한다리 건너 하나둘 꿰어 맞춰보면 누군지 다 나온다. 평판과 관계망들이 순식간에 드러나는 것이다. 누구한테서 말을 듣느냐에 따라 평판이 달라지긴 하나 서너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공통된 의견이 나오면 그의 평판으로 자리잡기 쉽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모르는 사람은 당하기 마련이다. 새로 들어온 사람도 지역사회 활동을 하면 첫인상이 중요하고, 활동의 일관성 등으로 그 평판이 조성된다. 마을에서 잘못 찍히면, 지역에서 잘못 이미지화 되면 오랫동안 활동하는 데 힘들어지는 게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한번 정해진 선입견과 자리잡은 편견은 바꾸기가 참 힘들다. 


#3.지역은 특히 말조심과 행동거지 조심을 해야한다. 사방에 '움직이는 씨씨티비'가 있고, 여기저기 '내 귀의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으며  곳곳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 매설되어 있다. 이 말인 즉슨 안 보는 거 같으면서도 모든 사람이 보고 있고, 말이 안 새어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낮말도 밤말도 다 듣는 움직이는 도청장치가 있고 보고 듣고 난 것들이 모아져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지뢰로 터지기도 한다.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마치 붉은 적외선에 걸린 것처럼 함부로 지나가다가는 보이지 않는 경보음이 이미 울리고 있다. 식당에서 누구에 대한 험담이나 평판을 하면 그 대상과 혈연, 학연, 지연으로 이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커지고, 시내를 활보하다보면 누군가의 눈에는 반드시 띄게 되어 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게 누군가 나를 주시하고 있고 나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지역은 마치 투명한 유리상자 같기도 하다. 입을 함부로 놀리고, 행동거지를 잘못하면 어디선가 돌아돌아 현타로 오게 된다. 


#4.소문이 빠르게 돈다. 소문은 사실인 경우도 있으나 유언비어처럼 날조되는 경우가 많다. 부풀리거나 왜곡되어 사실과 다르게 퍼져 사건을 극대화시키거나 사람을 매장시키기도 한다. 이런 소문들의 대부분은 정작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 확산되면서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한다. 유언비어가 판을 치는 세상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그래서 정론이 중요하다.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취재해 알려주면 소문은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진다. 말이 말을 낳고 또 낳아 거짓말이 되면서 횡행하는 것은 지역사회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준다. 정론직필로 한방에 거짓 소문들을 잠재울 수 있다. 이건 풀뿌리 신문의 보이지 않는 상당한 미덕이다. 


#5.오피니언 리더가 있다. 여론을 만들어 재생산하는. 봉사단체나 관변단체의 장을 맡은 사람들은 인맥이 화려하며 관계자본들이 풍성하다. 돈도 많고 힘도 있고 그나마 배웠다고 많이 추켜세워주게 되면 사람이 따라붙게 되어 있다. 정론을 뒤집을 수 있는 힘도 이들에게 있을 수 있다. 이 때 언론의 신뢰도가 참 중요하다. 언론도 사람이 만드는 지라 기자들의 평판, 대표, 편집국장의 평판 등을 다 모아 흠집내는 사람들도 있다. 오피니언리더들의 여론이 정론을 압도한다는 것은 그들의 조직적 힘이 매우 강하거나 언론이 그만큼의 신뢰를 쌓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렵고 지난한 싸움이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군수 정도 되면 조직책이 방대하고 깊다. 선거를 한번 치루려면 면책과 리책까지 다 사람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해진 루트와 선으로 자금이 공급되고 서로 일을 봐주기 때문에 한없이 돈독해진다. 이들의 끈끈해진 관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실이다. 진실과 정의로 이 단단한 벽돌을 깰 수 있다. 


#6.지청이 있는 군도 있고 없는 군도 있다. 보통 지역의 권력기관이라 하면 지청, 지원, 경찰서, 교육지원청, 군청 등이다. 물론 가장 쪽수가 많고 예산이 많은 군청 힘이 세긴 하지만, 경찰서나 지청과 간혹 힘겨루기 할 때도 있다. 수장을 잡아가면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하고, 수장을 지키려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기도 한다. 언론보도가 되더라도 여론이 어떻게 확산되느냐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한다. 어떤 보도는 그래서 그냥 묻히기도 한다. 그리고 묻어버리려고 조작하기도 한다. 


#7.대부분 군단위에는 주재기자실이 있고 이들은 주로 보도자료를 담당하고 간혹 기사를 쓰기도 한다. 광고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군단위 지역주간신문에서 아무리 좋은 기사를 써도 주재기자실을 입막음하면 확산된 보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걸로 '딜'을 하기도 한다. 방송국들은 주로 거점도시에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는 왠만하면 행차를 안 하신다. 가끔 큰 축제가 있을 때 축제 예산을 따먹으려고 행차를 한다. 방송사를 끼고 하면 축제에 가수들 부르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축제 예산의 절반은 그래서 방송사로 나가게 된다. 정말 좋은 비판 기사를 지역주간신문이 낸다 할지라도 모든 언론이 입을 싹 닫게 되면 그것은 확산성이 떨어지고 묻힐 수 밖에 없다. 한번 보도가 되면 검경, 감사원 등 사정기관에서 움직여주고 여타 언론이 계속 파며 서로 특종 경쟁을 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권력과 권력이, 언론이, 자본이 결탁해버리면 좋은 기사라도 묻히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구나 군단위에는 시민단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도된 것을 가지고 누군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서로 견제 감시를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군의회는 공천을 주는 국회의원 품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조종당한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옳은 목소리를 내려고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도박과도 같은 일이다. 다음에 공천을 못 받는 다고 생각해야 한다. 


#8.이전에 군수가 자기 선거운동원들을 공고를 내지 않고 알음알음 무기계약직이나 청경으로 채용된 사례를 취재하며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에 부군수 비서가 바뀌었길래 이거 공고를 낸 건가 하고 살펴보니 공고도 없더라. 어디 부면장 딸이 천거 받아 무기계약직 비서가 되었는데 이 것을 파봤다. 묻고 물으면서 여기저기 모아봤더니 주렁주렁 공고를 내지 않고 채용된 이들이 참 숱하게 많더라. 이 당시 취재과정에서 이를 덮으려고 엄청 애를 쓰더라. 군수, 부군수도 신문사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고 국회의원도 숱하게 전화하면서 보도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는 나갔고 반향은 있었다. 기사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기사를 안 내보내면 혹 약하게 내보내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이들이 기사가 나감과 동시에 태도를 바꾸며 옥천신문이 군수를 흠집내려고 이런 보도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 다른 지자체도 관행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오직 옥천신문만 유독 걸고 넘어진다고. 이 기사가 나갔을 때 어떤 언론도 이와 관련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여론전을 감행하면서 신문사를 도매금으로 군수 안티세력으로 몰아붙이려 했다. 그나마 몇개 사회단체가 연대하여 감사원 감사 청구도 하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가 없었다. 그렇게 찻잔속의 태풍으로 잠재워지던 이슈가 다시 수면위로 드러난 것은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토착비리 검거하면 상을 주겠다는 지침이 일선 경찰서까지 하달됐기 때문이다. 상을 받으려고 예전 신문을 다시 꺼내 조사를 해보니 뇌물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 당시 군수는 관사에 있다가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갔다. 하나의 보도가 성과를 내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서려 하지 않고 관망한다. 손에 피묻히기 싫으니까 남 하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보는 것이다. 당시 기사를 썼던 입장에서 후속으로 무언가 터져주지 않으니까 멘탈 붕괴에 다다랐는데 그 당시 힘을 준 것은 주민들이었다. 팩스로 옥천신문 힘내라고 응원을 했고, 길을 걸어가다 마주친 주민들이 옥천신문 잘하고 있다고 힘내라고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런 힘으로 버텨온 것이다.


커뮤니티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1.대상화한다는 것은 안에서 바깥을 보는 거다. 안에서 바깥은 주로 창을 통해 본다. 언론을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깥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창이 얼룩지면 잘 안 보이고 굴절되면 왜곡되어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이다. 잘 안보이는 것은 닦아서 보면 되지만, 애시당초 굴절된 유리가 끼어져 있으면 창 유리를 갈아야 온전히 볼 수 있다. 창은 창대로 중요하다. 지역신문, 마을신문을 똑같은 '창'이라 통칭하지 않고, '거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안과 밖이 벽으로 분리되어 창으로 관전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체계와 관계, 제도와 생활로 굳이 나누자고 한다면 전자는 체계안에서 그려진 삶을 재현해낸 형태이고 후자는 관계의 확장이다. 전자가 주로 국민으로 기능하고 국민성, 애국애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주민, 거주하는 주민, 주체적인 주민, 자치와 자급, 자립의 기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각 신문이 갖고 있는 이념의 지향과 무관하게 전국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역신문, 마을신문은 삶의 영역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의 구실이 강하다. 대상화하지 않는다. 그 자체의 삶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피드백이 더 격럴할 수 밖에 없다. 나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사 하나하나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더 신중하고 윤리적일 수 밖에 없다. 자칫 지역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과 마을신문, 더 삶과 밀착될수록 더 높은 윤리의식과 더 신중하고 진실된 글쓰기가 필요하지만, 모든 지역이 반드시 그런 경우는 아니다. 지역 내에 소권력과 소자본과 협잡하여 같이 뒹굴기 시작하면 사이비신문도 소 체계에 편입되어 군림하려 든다. 지들끼리 짬짜미하며 주거니 받거니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 광고로 생명연장의 꿈을 꾼다. 거울도 창처럼 충분히 오염될 수 있다. 먼지가 끼이고 왜곡된 거울이 들어서면 항상 삐둘어져 보이게 마련이다. 이는 종국에는 지역의 파멸까지 이어진다. 일반 저널리즘과 커뮤니티 저널리즘이 다르듯 창과 거울의 구실은 확연히 다르다.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기자로써 쓰는 삶이 공동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쉽게 만날 수 있고 누구든 언제든 쉬이 마주칠 수 있다. 기사를 잘못 쓰면 비판당하고 힐난당한다. 자칫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꽁동체성이 살아날 때의 이야기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기존 소권력 소자본과 함께 부패와 부조리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옥천신문이 기자를 뽑을 때 옥천에 꼭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유는 이 대상화의 관점을 불식시키기 위함이고 더 생활속에 밀착하기 위해서다. 가까운 대전에서 출퇴근한다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은 다르다. '대전 사람이 왜 옥천에서 취재를 해'하는 거부감이 생길 뿐더러 비판적인 보도가 나오더라도 '대전에 사는 사람이 맘대로 옥천을 비판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것보다 가장 큰 중요한 이유는 살아보면 달리 보인다. 내 삶이고 우리의 삶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관점과 시각이 달라진다. 공간적 구성력이 새롭게 조성되고 관계의 틀도 새롭게 마련된다.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라 인지하는 것과  잠시잠깐 일로서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가짐은 달라진다. 삶에서 우러나는 기사를 쓸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제보자이다. 인사하면서 말을 건네면서 물건을 사면서 한마디씩 건네는 것이 제보이고 민원일 수 있다. 그런 관계는 업무로서 만나는 관계와 사뭇 다르다. 이 때 지역신문과 마을신문 기자의 스탠스가 중요하다.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늘 경계에 서있다. 매몰되지 않고 불가근 불가원의 거리를 지키면서 긴장 관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면 매몰된다. 매몰되기 시작하면 관계의 사유화가 진행되고 본인도 모르게 곡필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공동체 안에서 때론 외로운 섬처럼, 소수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도처럼,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대처럼,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2.제대로 된 신문은 감히 권력과 자본이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돈없고 힘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말과 글이다. 말과 글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발화할 수 있다. 공론장마저, 언로마저 돈과 힘에 의해 뺏긴다면 시민적 주체성은 말살당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난 통치자라 하더라도 훌륭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언론까지 가질 수는 없다. 가지는 순간 독재의 발걸음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철저하게 언론은 주민들에 의해 귀속되어야 한다. 주민들이 출자하여 언론을 만들어야 하고, 주민이 참여하는 군민주, 협동조합 개념의 언론사가 많이 나와야 한다. 보통 지역 방송사는 광역으로만 존재하고 최근 유튜브와 공동체라디오 팟캐스트 등 다양한 방송매체가 나오고는 있지만, 예산지원을 받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란 지난하다.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것에도 한계를 지니고 제작에 들이는 품이 만만찮고 수익성을 찾을 수 있는 구조도 어렵다. 지역화 된 소재일 수록 인구가 적기 때문에  유튜브 구독자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구독자수를 늘려 광고까지 유치하려 한다면 인구가 많은 도시사람의 입맛에 맞게 지역의 소재들을 계속 변형 가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칫 옐로우로 변질될 가능성도 크다. 첫 시작은 그래서 전통적 저널리즘인 신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시골일수록 아직 종이신문이 먹힌다.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야 뉴 미디어가 창궐하지만, 조그만 농촌 시골은 아직까지도 종이신문 구독을 하고 신문을 통해 뉴스를 보고 있다. 구독료와 광고료를 병행하여 받을 수 있기때문에 신문사 재정에도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된 지역신문을 만들려면 훈련된 취재기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작은 지역신문이라 하더라도 상근기자 두명 이상은 확보할 필요가 있다. 세명이 가장 적정선이고 그 이상 재정형편에 따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취재한 것에 대해 심도깊은 논의와 숙의를 통해 기사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재해야 할 지, 무엇을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 편집국 회의가 사실상 신문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 


#3.마을신문은 매우 중요하다. 마을이라 하면 보통 한개의 리, 동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진정한 마을의 의미는 생활권이라 생각한다. 보통 면, 또는 학구, 읍 권역, 동 등으로 행정구역과 일치하기도 하고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마을을 리로만 한정하면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 마을의 다른 이름을 아직 찾지 못해 마을로 그냥 통칭하게 되는 데 엄밀히 말하자면 옛날 초등학교 학구가 생활권에 더 근접하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면 소재지가 형성되고 또는 정서적 구심이 만들어진다. 이런 단위로 마을신문이 필요하다. 면소재지와 오일장이 섰던 곳에 관계가 중첩되고 공론이 형성된다. 지금은 대부분 행정구역을 따라가지만, 더 세밀해질 필요도 있고 그냥 거기에 조응하며 새로운 마을 개념을 만들 필요도 있다. 마을신문 하면 왠지 정감있고 알콩달콩한 소식들만 담아야 하나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 신문의 친밀감을 높이고 우리 신문이라는 일치성을 가질 필요는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주민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높이면서 주민들의 요구는 높아질 것이고 민원과 부조리 부패에 대한 제보,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그어 놓은 프레임에 가둬놓기 보다는 열어놓고 성장해야 한다. 언론 본연의 기능으로 정보제공, 소식전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과 자본, 지식인의 행태에 대한 비판, 감시, 견제이다. 마을신문과 지역신문을 작다고 폄하하며 그저 그런 자그만 소식을 담는 작은 매체라고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어디든 보편적인 언론의 역할이 존재하며 이에 지역의 특수성을 담아 더 밀착된 보도를 하며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4.공동체와 공공성은 한 짝이다. 옥천신문의 모토가 '지역의 공공성을 지키고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다는 풀뿌리 언론 옥천신문'이다. 그만큼 공공성은 중요하다. 공공성이 실종된 공동체는 지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역의 공공성을 지켜야 살맛나는 공동체가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구독의 기반이 탄탄하지 않으면 재정구조상 광고료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의 광고, 그리고 관계자본이 많은 인맥 중심의 광고가 무너질 경우 신문은 금방 무너질 수 있다. 금방 무너지지 않으려면 합리적인 구독료 가격 책정이 중요하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구독료 수입 또한 중요하다. 옥천신문은 1년 매출액 중 구독료 수입기 광고료 수입을 넘어선다. 구독료가 탄탄히 받쳐주기 때문에 의도를 가진 관급광고와 지역 유지 광고, 기업 광고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외압에 의해 기사가 나오지 않거나 외압에 의해 기사가 나오는 경우는 없다. 저널리즘의 기본 윤리의식을 밑바닥에 깔고 기자와 편집국의 능력치에 따라 기사가 생성될 뿐, 다른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은 끊임없이 경계하며 차단한다. 

지역에 살다보면 친소관계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것은 공공성이다. 관계와 사건을 유불리로 판단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사건의 맥락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에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친소관계에 따라 유불리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멀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져서도 안 된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지만, 해야한다. 내  이웃, 내 아이 친구의 부모,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기사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지역이 좁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얼마든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언론윤리법제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신문사 내에서 이에 대해 충분하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익명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누군가를 공론화의 지면에 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원색적으로 욕을 듣고 관계가 끊어지기도 하며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고충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언론이라는 것, 기자라는 일 때문에 썼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사감을 갖고 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이 신문이 정당하게 취재해서 팩트를 갖고 썼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화가 나서 전화를 하며 욕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외려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사람을 봐왔다. 상처가 안 날 수야 없겠지만 넘고 가야할 산이기도 하다. 신문에는 다양한 삶의 양태를 소개하고 만나게 하는 공동체적 기사와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고 견제 감시하는 공공성 기사가 황금분할로 절반정도로 균형을 갖춰야 한다. 신문에 비판적인 보도만 나면 너무 생경하고 보기 두렵고, 너무 알콩달콩한 소식들로만 채워지면 밋밋할 수 있다. 조화를 이루어야만 자랑스러운 '우리신문'이 될 수 있다. 


#5.커뮤니티 저널리즘은 지역 뿐 아니라 마을, 학교, 상가, 교회 등 다양한 공동체와 결사체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언론을 의미한다. 지역 공동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결사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며 스스로의 비전을 만드는 것. 스스로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이는 커뮤니티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구실이다. 지역사회공동체의 재현이고, 여러 결사체의 구현된 모습이기도 하다. 


#6. 모두가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건, 희소성있는 이야기들만 뉴스로 나오지만, 커뮤니티 저널리즘에서는 모두가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은 게 없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끄집어내는 것이 기자의 능력이다. 널린 게 기사거리다. 맛집만 탐방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 있는 상가를 모두 탐방하고, 지역의 모든 사람을 인터뷰한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쓴다. 사소한 것이란 없고 기사거리가 안 되는 것도 없다. 원하면 어떻게 든 넣어준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말이다. 황금미꾸라지를 발견했다는 것도 우리집 소가 쌍둥이를 났다는 것도, 우리 집 개가 새끼를 열두마리 낳았다는 것도 고구마에 꽃이 피었다는 것도, 행운목에 꽃이 피웠다는 소식도, 호랑이 발자국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도, 고추 농사를 잘 지었다는 것도 원하면 취재해준다. 어렵게 전화를 한 것을 그냥 기사거리가 안 된다고 끊는 것은 없다. 문턱을 최대한 낮추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들어주고 기사화해주면 자존감이 살아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며 한 주 동안 이야기거리가 만들어진다. 어렵게 전화했을 때 '이거 기사거리가 안 되요'라고 끊는다면 이 사람은 다시는 신문사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나 인터뷰 좀 해주세요'리고 전화오고 찾아오면 해주면 된다. 우리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한 사람 한사람의 목소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전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과 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말 없는 자들의 말, 글 모르는 자들의 글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러 찾아다녀야 한다. 지역 안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존재감 없는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일 수 있다. 맨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옥천에는 주민등록상 5만명 정도가 있지만, 지역신문 기자하면서 5만명을 다 만날 수 있을까. 지역이 좁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20년을 살아도 못 가본 곳이 허다하며 만나지 못한 사람이 정말 많다. 다 안다고 하지 말아라. 모르는 것 천지이다. 대전을 성심당으로, 여수를 밤바다로 아는 서울 사람들이 정말 무지한 것이다. 우리나라 몇 년 살았다고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고, 외국 관광지 몇번 다녀왔다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참 건방진 태도다. 늘 겸허하게 다가가고 정중하게 들어야 한다. 듣고 기록하는 직업은 늘 배운다. 그게 장점이다.    


#7.지역신문 기자는 더 깊숙하게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좋은 사례와 정책, 대책을 찾으러 전국 방방골골,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지역신문이기 때문에 마을신문이기 때문에 그 마을과 지역에만 갇혀 기사를 생성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지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 너머 세상에도 늘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는다. 그것은 연대의 끈이고 단초가 된다. 신문 기사로 사례가 공론화되면 그것을 계기로 와서 강의도 할 수 있고 탐방도 할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지역안에서 의제설정을 하고 행위로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지역신문기자로서 참 가치있는 일이다. 


#8.지역신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솔루션 저널리즘을 해왔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민원 해결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학교 앞 횡단보도와 인도, 골목 쓰레기문제부터, 작은도서관 운영비 지원 등 결코 작지 않은 문제들을 헤아릴 수 없이 풀어왔다. 지역신문의 효용성을 이미 극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효용성이 충분이 있다. 제보가 오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어떤 것은 단박에 해결되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십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만 알고 있던 문제를 공론화하는 순간, 기록하고 공유되는 순간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공론화된 문제는 언제든 재거론하며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제보가 온다. 5만명에 취재기자 10명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끊이지 않는 제보를 처리하려면 20명도 부족하다. 지역의 산적한 문제를 깊이있게 취재하고 쓰려면 30명도 부족하다. 


#9.풀뿌리 지역신문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초석이고 마지막 보루이다. 1초짜리 민주주의에서 뽑아준 의원들과 군수를 우리는 제대로 감시하고 있는가. 군단위 같은 경우, 지역신문이 없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가 없다.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로 거점도시나 광역에 위치한 방송국들에서는 이들까지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신문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의회가 열릴 때마다 의원간담회가 있을 때마다, 계수조정을 할 때마다 항상 지역신문 기자가 배석을 한다. 말 한마디 거론되는 이야기들 모두를 지면에 게재한다. 옥천신문을 구독하면 뽑아준 의원과 군수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발언을 했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이 효능감 하나만으로도 지역신문의 존재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방청석에 한번 가봐라. 한명도 없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쁜데 시간 쪼개어 방청석에 앉아있을 시간도 여유도 없다. 지역신문 기자라도 없었더라면 그곳은 의원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농담하는 자리가 될 개연성이 충분하다.  옭고 그름이 아닌 유불리로 예산을 통과시킬 개연성이 농후하다. 옥천만해도 1년 예산이 5천억원에 달하는데 어떤 정치적 행위로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는 것이 대체 말이 되는가. 지역신문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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