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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1. 2024

작고 다양한 공동체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인구수와 경제성만 초점을 맞춘 도시측정지표, 이제 자립율과 환경오염지수로

 도시와 농촌의 구분 폐기하고, 모두가 자립하는 고을로 거듭나야


 20년 동안 지켜오던 옥천 인구 5만명선이 무너졌다. 아등바등 공무원, 공공기관 주민등록이전까지 독려하며 지켜오던 5만 명 선이 무너지면서 인구는 급격하게 줄지 않을까 예상한다.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에 주민등록만 이전 했던 인구는 서서히 빠지고 실거주 인구수로 확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감소하고 있는 이 추세와 인구의 구조적 문제이다. 읍 집중 현상과 아울러 급격하게 감소하는 면 지역 인구의 지역별 불균형과 인구 고령화와 맞물리면서 있는 청년, 청소년 인구가 여전히 빠져나가 세대별 불균형이 맞지 않은 농촌인구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 외부적으로는 '지역 소멸'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걱정하는 척 하면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다른 편에서는 중핵도시를 넘어 메가시티론에 한창 군불을 때고 있다. 광역전철을 연결을 기회로 지방선거 이후 당장이라도 추진할 기세이다. 매가시티란 사실 좀 인구가 되는 광역 거점도시들 간의 코어 결합일 뿐 군 단위 농촌지자체는 그야말로 '겉절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큰 우산 귀퉁이에서 온갖 혐오시설과 배후시설을 본격적으로 옮겨 놓으려고 아마 채비를 할 것이다. 일단 땅이 넒고 인구밀도가 작아 상대적 저항이 덜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은 이처럼 약한 곳을 교묘하게 파고 든다. 이미 농촌은 도시의 배후로 그렇게 활용되고 있다.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 쓰레기 등 마치 도시를 위해 농촌이 존재하는 것 마냥 그렇게 설정하고 있다. 메가시티가 되면 이런 움직임들이 더 격화될 거란 거다. 인구가 작은 곳에 '소멸'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대규모 집단 인간은 바람직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지만 소규모 집단은 부적절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당신들에게 비용을 쓰고 싶지 않다라는 것은 국민들 중 어떤 사람을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지방회생, 야마시타 유스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역소멸을 이야기하는 <마스다 보고서>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가 바로 이 도시의 정의인 것이다. 게다가 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도시 생활이 인간 집단에게 이성적이며 그래서 사회는 이러한 집단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지방회생, 야마시타 유스케)

 이런 흐름으로 농촌을 벼랑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구수'로만 도시를 평가하지 말고, 자치와 자급율을 포함한 자립지수로 환경오염지수로 각 도시의 건강성을 측정해야 할 것이다.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 등을 스스로 자급하고 있는지를 따지면 도시는 낙제점이다. 낙후된 인구수와 벌어들이는 매출액으로만 단차원적으로 도시를 평가하는 지표로 삼지 말고 도시가 스스로 얼마나 자립하고 있는지, 환경오염을 얼마나 시키는 지에 대해 평가하여 지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방식은 인구수 증가가 절대적 명제로 자리 잡고 모두가 도시국가를 지향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먹을거리는 스마트팜과 수입농산물로, 에너지는 핵발전으로, 물은 댐을 만들어 상수원으로 하면 그들에게 농촌은 굳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와 농촌을 가르면서 옥죄는 것이 아니라 자립지수를 부여하여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고 한다면 모든 땅을 콘크리트로 덮어 건물을 짓지 않을 것이다. 각 도시마다 스스로 생산하여 먹을 수 있는 논과 밭을 만들어 식량자급을 높이고 마실 수 있는 수원과 에너지원을 갖추려고 한다면 정책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무뎌졌던 감수성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내가 버리는 쓰레기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내가 마시는 물이 어디서 오고, 내가 쓰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내 가 먹는 먹을거리는 어떻게 생산되어 오는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 파국을 피할 수 있다. 분절된 삶, 단절된 관계들 사이에서 이간계를 통해 자본과 권력은 점점 더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인구수와 관계없이 보장되는 코뮌들의 광활한 자치를 보장해야 한다. '자코뱅들이 꿈꿔 온 단일국가를 상호주의자들이 설파하던 자유로운 코뮌과 느슨한 지역연합으로 대체하려 한' 프루동은 '코뮌의 절대적인 자치를 각 코뮌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이자 시민,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보장함으로서 프랑스의 모든 지방으로 확대된다. 코뮌의 자치권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다른 모든 코뮌들의 평등한 자치권에 의해서만 제한될 것이다. 즉 코뮌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해방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수에 매몰되어 그들이 생각하는 적정한 인구수대로 칼부림을 하며 농촌을 잘라서 여기저기에 같다 붙이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이를 읽고 성찰하길 바란다. 관계가 살아있는 작은 공동체는 면대면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어 있고 지역 자급율이 어느 도시보다 높을 뿐더러 환경오염지수도 낮다. 크기와 수에 집착하는 도시를 택할 것인가? 작은 공동체의 관계성과 각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 지역과 지구를 살리는 자치와 자급율, 환경오염지수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면 답은 명확하다. 머레이 북친은 말했다. '정치활동의 물리적 공간은 언제나 도시나 마을, 즉 지역자치제였다. 정치가 가능하려면 도시의 규모가 적당해야 한다. 도시가 너무 클 경우 면대면 토론이 불가능하고, 시민들사이의 친밀한 관계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은 둘로 나뉘어 자유로운 자치제와 국민국가 사이에 공개적인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서로 다른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하게 될 것이고 다양성이야 말로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 이제 더 이상 '돈의 지수'가 아닌 '삶의 지수'로 도시를 평가하는 지표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다. 

 옥천은 금강 상류지역 농촌으로 지역 주민들이 원하지 않던 댐으로 인해 많은 마을이 수몰되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으며, 매년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옥천운동의 특이점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해왔다는 것이다. 특출 난 사람이 부각되기보다 유유히 심해에서 흐르는 물결처럼 주민들의 생활운동으로 흘러왔다. 자치의 관점에서 볼 때, 1989년 주민들이 돈과 마음을 모아 [옥천신문]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커뮤니티 저널리즘이 지역의 공론장을 어떻게 재건하고 의제를 설정하며 지역의 공공성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를 봐왔다. 자급의 관점에서 볼 때 1990년 옥천군 농민회가 만들어지면서 분화되어 다른 결로 지역 농민들이 지역 농정과 로컬푸드, 친환경농업이란 화두를 놓지 않고 [옥천살림 협동조합]이란 결사체를 만들면서 지역 자급의 거점을 일구는 현장에 살고 있다.  각각 자치와 자급의 부문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흘러 단단하게 땅을 다져왔으며 지역의 방향과 비전에 대해 고민해왔다. 환경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데 도시의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연합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과 생태가 같이 살 수 있는 대청호주민연대를 만들어 공존공생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졌다. 대청환경농민연대와 금강유역환경회의까지 같이 만들어 참여하면서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 행정구역을 넘어서서 같이 연대하는 지역의 모델을 만들었다. 충청남북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금강 유역 공동체의 씨앗을 일궈낸 것이다. 옥천운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선거에 참여해 권력을 쟁취하며 만들어내는 운동 방식이 아닌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요구하며 만들어낸 주체적인 방식은 기존의 운동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집권하지 않고 권력을 깨뜨리고 눕히면서 민(民)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진행했다. 옥천의 작지만 단단한 운동방식이 이 글을 풀어내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고, 실제 실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다양한 지역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길 희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풀뿌리 지역 곳곳에서 안간힘을 쓰며 지역을 지키려고 하는 농민과 주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대 담론에 굴하지 않고  더이상 빼앗기지 않는 삶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사는 지역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있기에 지역이 있다. 지역의 이름으로 뜨겁게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는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도무지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메가시티보다 우리의 작은 공동체에 주목하자. 메가시티가 아니라 코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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