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심'에 있고 싶고, '크기'와 '성장'을 동일시하는 어떤 이념은 뿌리가 깊다.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배울 때도 중앙집권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비로소 나라의 꼴을 갖추게 되었다는 글귀에서 어떤 안정감을 찾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대업을 이루었다는 말에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중심'과 '크기'에 대한 주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는 '발해의 꿈'을 찾고, 잃어버린 땅을 고토 수복하는 심정으로 이름 그대로의 '광개토대왕'같은 영웅을 바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 이 오래된 이념들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는지 변방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열악할수록 '중심'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지고, '더 큰 곳'에 속하려는 마음은 더 간절해진다. 일찌감치 면에서 읍으로 나오고, 조금 더 큰 학교에 보내려는 그 바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전으로, 서울로 조금 더 중심도시로 진격해야 하고, 조금 더 사람이 많은 큰물에서 놀아봐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 어떤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크기와 중심 이념에 대한 속박은 늘 변방과 소수자를 잉태하고, 내부 식민지를 구축한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며 이 일렬종대, 수직위계의 시스템은 최근 거의 정점을 찍고 있다.
개발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어느 새부터인가 '도시화'된다는 의미로 도식화되어 있다. 지역 농촌에서는 대기업, 해외 프랜차이즈가 하나둘 생길수록 아파트단지와 산업단지가 늘어날수록 지역이 발전되고 있다고 말들을 한다. 농촌과 중소도시, 광역도시, 대도시로 위계가 서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발전의 척도이다. 관광단지와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절대농지를 해지하고 논밭을 싹 다 갈아엎어야 이 열등감의 농촌에서 해방될 거라고 맘속에 있는 말을 공공연하게 꺼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역소멸'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어중간한 '중핵도시'라는 단어를 넘어 양극단의 '메가시티'란 말이 그 대안처럼 등장했다. 사지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카드를 선택하게 하는 주도면밀한 큰 그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균형발전'이라는 명분도 얻고 '지역소멸'이라는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고 지방을 더 크게 만들겠다는 데 어떤 이의가 있겠냐며 메가시티란 화두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만성 지역병을 치료하는, 징징거리는 농촌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대선에 가려 이슈가 밋밋했던 지방선거에 '메가시티'는 '우리도 서울이 될 수 있다'는 자극적인 환상을 불어넣고 있다. 서울과 지방으로 양분화되어 고착화되었던 그 개념의 벽을 넘어 중심을 다 잡고 확장을 하여 서울의 복제품을 여기저기 양산하겠다는 것이 먹힌 것이다.
정말 메가시티가 우리 삶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체제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분권과 자치에 대한 어떤 설계도 없이 거점 광역도시를 광역철도로 연결시켜 핵심 코어를 더 강화하겠다는 이 메가시티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묻는 것이다. 서울을 ‘복붙’하는 방식으로 자본의 흐름을 결집시켜 규모의 경제를 통해 발전시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뿌리 민주주의를 더 퇴보시킬 것이다. 누군가는 다극화하여 서울로만 몰리는 일극 현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지근거리의 자장이 확실히 커진 핵심코어가 만들어지면서 시군단위 인근 농촌은 생활권이 무너질 것이다. 메가시티를 만들면 거점 도시간 30분, 전 지역을 50분 내에 연결하는 3050생활권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던데, 이런 연결은 독립된 생활권을 예속시킬 것이다. 혹자는 대도시에 빠르게 연결되면 더 좋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지향과 방향의 문제이다. 이런 발전 방식은 변방의 자원을 더 강하게 끌어들이며 중심을 성장시키는 서울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행정구역 경계로 잠시 잠깐 멈춰있던 개발총량이 겉잡을 수 없이 풀릴 것이다. 외부 자원은 빨아들이고 혐오시설들은 다 바깥으로 더 크게 재배치될 것이다. 껍질을 벗겨 그 실상을 보면 더 수직적으로 더 위계적으로 관리하기 쉽게 설계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권 자치와 자급을 강화하며 기초 코뮌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면단위 농촌이 사정권 소거대상에 들어간 지는 오래고, 실제로 이를 강력하게 실행할 메가시티는 농촌공동체가 소멸되는 이슈를 잠식할 것이다. 어떤 한계치에 다다른 전환의 시기에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메가시티냐? 코뮌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는 앞으로 100년, 200년 넘는 우리 사회 체제의 지향을 가르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이에 대한 공론 자체가 소거되어 있다. 아무런 논쟁 없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슬그머니 메가시티 이슈는 실제가 되고 있다. 메가시티가 되면 그나마 있던 행정구역을 무너트리고 자본시장의 물결 속에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몸을 내맡기게 되는 꼴이다. 자본은 자치를, 자연을 몽땅 야금야금 먹어 치울 것이다. 메가시티의 대항지점은 코뮌과 코뮌의 자율연합, 연방제이다. 중심과 크기의 메가 성장이념을 탑재한 국가와 자본이 공모한 메가시티로 갈 것이냐? 자치와 자급, 순환과 공생의 연대로 기초 코뮌을 단단하게 하며 자율연합을 지향하는 연방제로 갈 것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국가와 시장, 사회를 생각한다. 국가에 치여, 자본에 휩쓸려 잃어버린 지역사회를 생각한다. 국가 권력에 오염된 정치, 자본에 농락당한 사회를 보면 우리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코뮌을 지키는 힘은 조직된 지역사회의 응집력이다. 양당체제의 정치놀음에 희석되는 꼭두각시 정치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선출직을 배출하여 집권하는 것 외의 방법이 거세된 우리 운동 방식일랑 접어치우자! 생활정치, 일상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뿌리내리고 꽃을 피울 것인지 땅바닥에서부터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민주주의는 언제나 가능하다. 지역마다 살아온 결에 따라 다양한 자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의 체계가 우리 삶의 관계를 잠식하지 않도록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제는 지역을 비하하고 부정하며 끝내는 배반하게 하는 국가와 자본적 세뇌를 끝내고 싶다. 사람을 서울로 보내지 않고, 꿈을 세계로 보내지 않으며 지역 안에서도 다양한 삶과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역마다 다른 결의 삶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천개의 지역학과 지역문화가 곳곳에서 만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메가시티냐 코뮌이냐는 비록 지금 시대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 정도로 상황이 열세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 삶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애국애족하지 말고, 애향애민하자. 같이 사유하고 함께 성찰하자. 그리고 직접 행동하자.
오일장이 무너지자, 자급의 거점이 흔들렸다
오일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급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사실상 무너졌다고 보면 된다. 굳이 읍내 갈 필요없이 직접 생산한 먹을거리 외에는 오일장마다 서로서로 모자란 것을 채우는 구매와 물물교환이 가능했다. 오일장은 단지 시장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여론이 모아졌다 흩어지는 광장의 역할을 했었고, 공동체성을 다지고 강화하는 관계가 축적이 되는 장소였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맛 볼 수 있는 자리였고 공동의 문화를 같이 겪었다는 동질감 또한 공통된 정서를 만들기도 했다. 시군 자치제로 인한 읍의 급격환 도시화와 면의 쇠락, 읍으로 뚫린 대중교통, 그리고 오일장의 사라짐, 또 읍 중형마트와 면 단위 농협 하나로마트의 등장은 자급의 거점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양질의 농산물은 인근 도시와 서울로 직행을 하였다. 내가 기른 친환경농산물 조차도 생협에서 다 모두어 가져갔다. 식탁은 원재료와 수입농산물을 원료로 다양한 화학첨가물들이 버무려진 가공식품이 즐비하게 차 들어가기 시작했다. 읍내에 없던 프랜차이즈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근 30년 간의 변화는 삶의 전부를 소용돌이치면서 농촌의 들녘과 식탁을 바꿔놓았다. 식량자급율은 국가의 식량자급율의 통계치로 나올 뿐 팍 와닿지 않았다. 지역은 생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식량자급율이 전혀 나아지기는 커녕 퇴보하는 것 같았다. 힘들여 지은 농산물을 도매금으로 싸게 서울로 가져갔다. 모든 길 뿐만 아니라 유통도 서울로 통했다. 거대한 유통체계는 자본의 흐름을 타고 고정화되었고 햇썹과 여러 자동화와 위생법 때문에 오일장에서 거래되는 것 자체가 원시적인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치와 자급은 한 몸통이다. 자급없이 자치가 존재할 수 없으면 자치 없이 자급 역시 존재할 수 없다. 한 몸뚱아리와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옥천에서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2000년대 초반부터 여러 운동을 통해서 농업발전위원회 조례, 학교급식제정지원조례, 옥천푸드지원조례 등이 만들어진 것은 사라지고 있는 자급을 지키기 위한 운동의 맥락으로 살피면 좋을 것 같다. 괴물에 대항하려면 같이 힘을 모아야 했던 것처럼 서울 중심의 아스팔트 투쟁의 구심은 구심대로 필요하였지만, 지역의 구심은 아무도 걱정해주지 않았다. 큰 괴물을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여겨졌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사업에 깃발을 들고 목소리를 외쳤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다. 농민의 수가 줄어들었고 농업, 농촌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어 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 큰 싸움은 큰 싸움대로 하되 지역의 구심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삶의 공간에서 우리 농산물의 기치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사실 그것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이중 나선형 구조로 베베 꼬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입 농산물만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 중심의 유통체계, 도시 소비자 중심의 대상화된 농정은 이중 삼중 착취구조로 되어 있었다. 어느새 농촌은 농산물의 생산기지화가 되어 있었다. 생산기지 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6차 산업을 거들먹거리면서 체험과 식가공, 펜션 등 여러가지 다양한 힐링 센터로의 역할도 겸해야 한다는 책무를 잔뜩 얹어주었다. 그렇게 해야 잘 팔린다고 자본주의 상술은 관료들과 함께 농촌을 생산기지 플러스 관광지, 힐링센터의 역할로 6차산업을 살길이라고 떠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컨설팅 업체들이 선진 사례를 발굴했고 그대로 복붙하려고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관행이든 친환경이든, 농협이든 생협이든, 모두 도시 소비자를 왕처럼 떠받들면서 그들의 돈을 풀어낼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가치는 브랜드화로 상품이 되었다. .여기서 지역 자급을 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도발적인 문제제기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미국에 비하면 한 주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땅덩이에서 무슨 로컬을 찾느냐며 한반도 전체가 로컬이라고 쏘아 붙였다. 자급은 로컬푸드란 이름을 타고 그 시대 트렌드처럼 유행처럼 번졌다. 로컬푸드가 단지 나무가판에 지역 농산물을 파는 표피적인 브랜드로 치부될 때 많은 지자체가 피같은 세금을 들여 그렇게 따라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지역 내에 다양한 농산물 수급을 조직화해내지 않으면 필패라는 것을 모르고 정말 나이브하게 유행 트렌드를 붙이고 흉내만 내면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수급이 안 되니 다른 지역 농산물도, 공산품도 끼워팔기 시작했고 로컬푸드란 말이 그렇게 희미해져 갔던 것이다. 지역내 식량자급율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지 않고서 단지 로컬푸드란 간판을 걸고 요행의 수익을 얻으려 했던 것들은 다 버티지 못했다.
옥천의 자급운동은 한꺼번에 한바탕 한큐에 짧고 굵게 휘몰아치는 운동은 아니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지며 펼쳐진 운동이었기에 정말 가늘고 길게 생명연장의 꿈을 꾸었다. 2007년 지역내 학교급식을 발판으로 지역내 친환경농산물 생산비율을 점차 넓혀 갔으며 생산자들을 조직화했다. 유통센터와 가공센터를 열고 가공식품도 하나둘 출시를 하며 학교 급식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이 옥천 자급운동의 실행점이었다. 어느 정도 물량을 확보해가며 끌고 갔던 자급운동은 로컬푸드직매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선보였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았던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각 읍면별로 생산자를 조직화하고 끊임없는 교육과 협력, 옥천살림 협동조합이라는 구심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역의 식량자급율이란 정책적 목표를 향하여 가려면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이다. 학교급식을 아직 완벽하게 커버하지 못하고 있고 로컬푸드 직매장의 가판도 아직 중형 마트에 비길바가 아니다. 그리고 아직 체계에 있는 먹을거리 정책이 완전히 지역농산물 자급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영양플러스와 노인장애인 밑밭찬, 학교밖 청소년 도시락 및 급식 지원 사업 등까지 여력이 닿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식당이 쓰는 원자재 또한 아직 도시 중심 유통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투 트랙으로 갈 필요가 있다. 기업이나 학교, 공공기관 등을 비교적 수요가 큰 급식체계에서 자력 공급율을 높이는 방향과 가족 소농들이 농산물이 직매장 가판대에 꾸준히 올라오고 꾸러미 등을 통해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는 방향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먹을거리는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다. 공공의 예산을 투입하여 지속성과 가격 안정화를 통해 거대유통망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내고 자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 식료품에 우리의 먹을거리를 잠식시켜서는 안 된다. 떡과 빵, 김치와 기름, 식용유, 고추장, 된장 등 이제 해외 수입이나 대기업 제품을 통해 더 이상 우리 밥상에 들여서는 곤란하다. 자급의 구심으로 자체 식량자급율을 높인다면 우리는 굉장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단지 물건을 대주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구 5만명 밖에 안 되는 옥천에서 식량자급율을 논하는 것은 ‘넌센스’ 아니냐고 누구는 일갈할 수 있다. 하지만, 옥천만 놓고 보는 게 아니라 대청호 같은 물을 먹고 있는 인근 대전과 청주, 세종 등을 놓고 보면 그리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먹을거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우린 자급의 힘으로 농의 힘으로 충분히 보여줄 때라고 생각한다.
도시-농촌 이분법적 도식 철폐, 이제 자립의 관점으로
농촌과 도시의 이분법적 구조는 이제 폐기할 때가 되었다. 자급의 관점에서 보면 물과, 전기, 농산물 등에서 도시는 낙제점이다. 에너지, 물, 식량 등 모든 부문에서 자립의 관점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지만, 자립의 가장 큰 부문인 ‘자급’과 관련해서는 요원하다. 아직까지도 중앙 집중의 방식, 대량의 방식에 익숙하다. 이는 효율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기업 방식을 답습화한 결과인데 집중보다 분산이 필요하다. ‘효율’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더 크게’를 강조한 결과 가장 중요한 ‘감수성’과 ‘자기제어’를 잃어버렸다. 국가의 식량자급이 실현되려면 각 지역의 식량자급이 되어야 한다.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수자원에도 이를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자급하지 않고 얻어 쓰기만 하면서도 너무도 당당했던 이 나라의 시스템은 혐오시설을 변두리로 내몰았다. 변방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송전탑이 만들어진 것도 댐과 저수지가 만들어진 것도 변방의 소외된 곳이다. 도시에서 전기도 많이 쓰고 물도 많이 쓰며 식량도 많이 먹는데 이것을 다 농촌에서 조달해서 쓰고 있다. 작금의 도시는 농촌을 희생시키면서 만든 산물이다. 댐을 만들어 마을을 수몰시키고, 모여진 수자원으로 식수와 공업용수를 해결하면서 도시는 성장했다. 인근 농촌의 인력마저 다 앗아가며 기형적인 괴물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이분법적인 구조를 탈피하여야 한다. 응당 도시는 이래야 하고, 농촌은 저래야 한다는 정형화된 인식들이 그 차이를 더 가중시켰다. 농촌, 농업, 농민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느껴야 한다. 존중과 배려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지근거리에서 알아야 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정책적으로 각 지역별 에너지, 식량, 물 자급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스스로 자급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목표설정을 해야 한다. 농촌은 생활편의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목표설정을 하면서, 필수요건들을 자급하고 자치하는 방향으로 도시의 정책을 바꿔야 한다. 농촌을 먹거리 생산기지로, 발전소나 댐을 만드는 곳으로 농지와 임야를 난개발의 대상지로 보는 시각은 이제 거둬야 한다. 스스로의 물과 전기, 먹거리는 스스로의 도시에서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공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지역자결주의가 필요하다. 생활권과 행정구역을 일치시키고 이를 자치와 자급의 공간으로 일궈야 한다. 도시에 논과 밭을 만들어 그들의 식량은 그들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농의 가치는 농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농의 가치를 어릴 때부터 심어보자. 독일에는 작은 정원이라는 뜻의 '클라인 가르텐'이 있다. 살펴보면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아이들이 많아 먹을거리가 늘 부족했다고 한다. 1830년 가난한 사람들의 작은정원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클라인 가르텐이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 후 클라인 가르텐을 재정립한다. 독일연방의 건축법 제5조에 지방자치단체는 지역 계획을 수립할 때 의무적으로 필요한 면적의 클라인 가르텐 부지를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에게 녹색 생태학적 관점에서 공업지구, 상업지구, 주거지역을 연계하도록 하는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클라인 가르텐 단지마다 정원동호인협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그 수가 약 1만5천개소이고 회원수는 약 1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토지임대료 평균 300제곱미터, 협회비, 전기료, 물 사용료, 보험료, 연간 합계 350유로 정도인데 이는 약 45만원 정도이니 저렴하다. 옥천도 군유지나 금강수계 매수토지 등을 활용해 이 작은 텃밭 사업을 농업기술센터와 연계해 함께 벌인다면 농의 가치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땅 한 평 없어 하천 옆 둑방에 농사를 짓고 계시는 독거 노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원주택과 이런 텃밭이 꿈이자 로망인 사람들도 큰 돈 필요없이 하고 싶은 꿈을 당장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할 것이다. 클라인가르텐이 마을과 집 안에서 농적가치를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학교 안에서 농업과 식생활 교육과 요리 교육이 필수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따로 분절되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연계되는 자립교육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학교 텃밭과 학교 논을 가꾸면서 같이 농사짓고 먹을거리 교육을 하며 원재료를 통해 직접 요리하는 방법들을 기른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귀한 자급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단순 일회성 수확체험 교육이 아니라 1년 과정의 긴 노작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두부만들기나 된장, 고추장 만들기 등 전통적으로 배우는 식가공교육도 같이 배워야 한다. 모든 과정들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먹을거리가 결국 나를 만든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갈수록 늘어나는 만성질환,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필요한 교육이다.
농사짓고 싶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고, 같이 협의하고 고민해서 기를 수 있는 주작목을 정하고, 잘 길러낸 농산물은 존중받으며 수확이 가능하다면 농촌은 살아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소농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1억원대 연봉의 농업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농업 하면서 아이티와 기술을 결합해 쉽게 농사지을 수 있는 신개념 힙한 농업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기계로 대량생산하는 대농을 키우는 게 대안이라고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자치와 자급, 순환과 공생으로 서로 살리고 모두 살리는 지역 농업에 대해 같이 고민해야 한다.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먹을거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미디어에 따라 어떤 농작물이 어떤 병에 특효더라는 이런 널띄기 하는 방송에 따라 작물의 재배 면적이나 유통량이 춤을 춘다면 모두에게 비극일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속에서 생활의 관계와 일상의 노동속에서 농업이 자리잡길 바라고 지역별 자급으로 협동하고 연대하여 곳곳에 농의 가치가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급은 비단 먹을거리만이 아닐 것이다. 한전에 도매금으로 묶여 있는 전기 에너지, 난방비용, 그리고 먹는 물과 쓰는 물의 자급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농촌은 사실 먹을거리 생산지이자 에너지 생산지이이다. 옥천만 놓고 봐도 충청권 550만의 식수원인 대청호 물그릇을 쥐고 있고 신옥천전력소가 세워져서 도시로 가는 송전탑이 군서면 등지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전기에너지와 수자원, 난방에너지 등을 어떻게 자립할 것인가도 지자체 차원에서도 고민해야 한다. 그냥 무작정 쓸게 아니라 지역 수자원 및 에너지 수급계획이 자급에 방점을 찍고 정책과 사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커지고 삶과 이격될 때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가 된다.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나는 편리하게 쓸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책임과 권한을 일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삶속에서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려면 작아져야 한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처리되는지 느끼고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 바뀐다. 내가 쓰는 하수가 어떻게 처리되는 지 알아야 한다. 단절되어 있으면 내 삶과 무관하게 되고 나는 비용을 내며 쓰는 소비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소비자를 넘어 주인된 시민으로 이 모든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교육이고, 지속가능하게 바꾸는 것이 삶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구호는 삶속에 체화되지 못하면 휘발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결코 학문의 문제나 뉴스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삶의 문제로 다가올 때 그 때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메가시티가 아니라 코뮌이다. 지금의 도시 규모보다 더 커진 메가시티는 개별의 삶을 더 대상화할 것이며 소비자로 규정지어낼 것이다. 더 커지기 때문에 개별의 삶은 더 쪼그라 들 것이며 우리의 생활세계는 잠식될 것이다. 정책이 삶속에 착근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동력을 얻는다. 우리의 목소리가 우리 삶을 규정짓고 우리의 실천이 삶을 바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가 자치와 자급의 힘을 갖게 될 때 스스로 사는 삶의 공간을 설계하기 시작할 때 그 다양성으로 삶은 지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역사'사'가 사람인에 입구를 걸친 것처럼 사람이 입으로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입은 말하는 데 쓰이고 먹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말하는 것은 관계를 만들어내며 사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먹는 것은 바로 생존이고 경제다. 내 육체적 삶은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말과 먹을거리를 시민의 힘으로 관장하고 제어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제도권 정치에 속하지 않고도 시민의 정치는 가능하다. 집권해서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권하지 않고도 바꿀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목소리가 또 공론장에 제대로 작동되어 주인된 목소리로 우리 삶을 관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으랴. 그런 점에서 미디어플랜이 필요한 것이다. 언론은 엄밀하게 자본도 권력도 가질 수 없는 시민의 발명품이고 소유물이다. 지역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듣고 새기는 일, 이것은 결국 자치와 연관되어 있다. 주민들의 충실한 매개와 그것 그대로 플랫폼이 되고, 어떤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는 것이 풀뿌리 언론의 사명이 될 것이다. 자치의 도구로서 미디어플랜이 강력하게 필요하다. 또 하나 우리 생존에 있어서 푸드플랜이 필요하다. 먹을거리는 경제의 가장 기본이다.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로서 경제의 밑바탕에서 공공성을 바탕으로 또아리 틀고 있을 때 우리 삶은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질 것이다. 자본의 경제가 아닌 공공의 사회적경제가 펼쳐질 때 지역은 비로소 더 건강해질 것이다. 자치와 자급은 고립의 항목이 아니라 자립의 요소이다. 그것은 결국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지역과 조화로운 협동과 연대를 기반으로 할 것이다.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지역의 연대, 그리고 자율연합은 그래서 필요하다. 같은 물을 먹는 식구로써 산과 강을 끼고 환경적 고민을 같이 하는 연대체로서 자율적인 지역 연합은 필요하다. 행정구역을 넘어서서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가 잦은 교류로 연대의 틀을 공고히 할 때 이 땅은 변화의 꿈틀거림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