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책이 있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자주 인용이 된다. 여기서 인용되는 마을은 마치 포근하고 안락하며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 만 같은 만병통치약 같은 이미지다. 정이 흘러넘치고, 품앗이와 두레를 통해 서로 도우며, 떡 하나라도 나눠먹는 그런 곳처럼 여겨진다.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또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치열한 헤게모니의 격전장이고, 예민한 이해관계가 충돌되는 불편한 곳일 수 있다. 전선은 여기저기서 그어진다. 이사 온 사람들끼리 투닥거리기도 하고, 귀농귀촌인과 토박이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토박이들끼리 해묵은 갈등도 존재한다. 이게 둘만의 싸움이 아니라 확전이 되어버리면 겉잡을 수 없다. 내용증명과 송사로 이어지고, 패거리가 형성되어 이장선거까지 연결되면 마을은 좀처럼 회복될 수 없는 상흔을 겪게 된다. 사실 평화로운 전원마을이 끔찍한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산과 들과 도랑, 나무 등 자연으로 감싸 안은 마을이 평화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속살을 보기 전이다. 잠깐 둘러보고 가는 정도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롭다. 하지만, 거기서 몸을 부대끼고 산다고 하면 또 다른 문제이다. 지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 만큼 관계를 맺고 같이 사는 사람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시와 달리 농촌에서는 자주 보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게 되는데 첫 인상이 중요하고 일상의 모습이 중하다. 또, 관계망과 역학관계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의 논의구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웃과의 관계가 어떤지 사회적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직도 대부분의 마을은 집성촌이 유지되고 있고 다 연결되어 있다. 면 소재지에서 벗어난 마을일수록 그러하다. 그리고 마을 안에서 모든 것을 만들고 해결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마을’의 의미가 참 다양하게 쓰이는데, 흔히 농촌에서 마을이라 하면 행정리동 그리고 더 작게는 자연마을을 칭한다. 여러 마을들이 면을 이룬다. 독자적인 마을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면을 통해 구현했다. 면소재지 마을에 면사무소와 학교, 파출소, 보건지소, 지역농협, 공판장, 식당, 오일장 등이 있어 마을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면을 통해 해결했다. 그렇게 마을은 연결되어 있다. 각 마을들이 씨줄의 관계망이라면, 면의 공공기관과, 가령 면민협의회, 번영회, 자율방범대, 의용소방대, 새마을부녀회, 지도자협의회, 풍물단, 체육회, 적십자 등 여러 단체들을 통해 날줄의 관계망이 형성된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등 이런 문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마을 단위 사업을 아주 집중적으로 했던 정부와 시민사회는 사실 그 맥락과 진의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마을 단위 사업에 몇 십억, 중복되어 몇 백억이 투자된 사례도 있었는데, 그 마을이 아무리 훌륭하고 사업을 잘 해도 과잉투자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하다. 이는 마을의 분란과 갈등을 촉발시키는 기제가 될 수밖에 없다. 마을별 사업과 또 여러 마을을 엮어서 하는 권역별 사업은 대표적으로 마을과 마을의 격차를 조장하여 외려 공동체성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는데 일정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이 아니라 생활권을 봐야 하며 경쟁이 아닌 협동을 고민해야 하며, 어떻게 연대하여 행복한 생활권을 만들 것인가 너른 눈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을에만 매몰되지 않고 같은 생활권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연대와 협동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 여러 사람의 필요를 읽어내고 지향과 비전을 갖고 함께 꿈을 꾸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온전히 마을만을 뚝 떼어놓고 조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관계망은 마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형을 좇아가다 보면 자주 왕래하는 그 길목과 중첩되어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확장되고 연결된다. 마을 조사를 한다는 것은 최소 면단위의 주요 시설과 기관, 단체 등이 마을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까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생활권 속의 마을이 온전히 보이고, 마을에만 매몰되지 않고 객관화하며 숲을 볼 수 있는 눈이 만들어진다.
마을 조사를 한다는 것
조사를 한다는 것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러 차례 편안하게 듣는 것이다. 마감에 쫓겨 기사를 쓰는 것과 다르다. 한정된 시간에 뭔가 주목할 거리를 뽑아내어 적절한 콘텐츠를 생산해 내야 하는 기사와는 다르다. 말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다채롭게 폭넓게 삶의 양태와 구전되는 이야를 가지 껏 뽑아내는 것이다.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또 듣고 복기할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야기는 앎과 관계의 깊이와 비례하게 되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공간을 입체적으로 탐색하여 옛날의 가상 공간을 구현해내는 것과 같다. 한 공간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퍼즐을 최대한 끄집어내어 공통된 조각으로 그 가상공간을 그대로 머릿속에 재현해내는 것이다. 나쁜 기억은 왜곡 포장되거나 휘발되고 좋은 기억은 조금씩 더 좋게 변형되어 있다. 그래서 공통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골짝마다 이름이 있고 바위마다 별칭이 있다. 한 두집 사는 자연마을이라도 지명이 있고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과 이야기가 있다. 매년 연례행사로 진행되는 마을 잔치와 제가 있고, 어떤 농사를 짓고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답을 얻을 수 있다. 하나하나 이름을 호명하며 적어내는 것들, 최면을 걸 듯이 옛날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침잠해있었던 과거까지 끄집어내야 한다. 이미 자료 조사가 된 콘텐츠를 확보한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더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지지대가 되기 때문이다. 토속적인 말투는 단박에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래도 몇 번 되묻고 글자로 써서 정확한 단어를 알아내야 한다. 지금 세대가 사라지면 다 없어질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캐낸다고 생각하면 흥미진진해진다. 5,60년 전 과거 여행을 하는 것이다. 고샅고샅 다 훑어낸다는 생각으로 이야기의 꼬리를 좇다보면 빠져들게 되어 있다. 기억의 언어를 기록의 언어로 만든다는 것은 그 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 그리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마을의 미시사를 통해 지역 역사의 구슬을 꿰는 작업이다.
논의구조를 봐야 한다
마을의 조직과 재산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논의가 이뤄지고 결정되는 지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 마을에는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새마을부녀회장, 그리고 개발위원, 노인회장 등이 있는데 사실 개발위원들이 힘이 세다. 개발위원들은 대부분 노인회보다 연령대가 약간 낮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차지하는데 과거에 이장을 했던 사람들이나, 뭔 자리를 꿰찼던 사람들이 많다. 마을 내 입김이 세다. 이장 선거를 어떻게 하는지, 마을총회를 어떻게 하는지 논의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장이 혼자 대부분 결정하는 일인체제인지, 개발위원들이 목소리를 주로 내고 논의를 이끄는 과두정 체제인지, 아니면 마을 전체가 논의 속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지가 중요하다.
마을의 재산이 많거나 한전이나 수자원공사, 금강유역환경청 등 여기저기서 주민지원사업비가 많이 들어오는 지역일수록 논의구조에 참여해 기실 목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 마을에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관성과 관행이 있고 대체적으로 그렇게 구현이 되는데 여기에 딴지를 걸거나 다른 의견을 내면 낙인찍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어떤 논의과정을 통해 결정하는 지가 그래서 중요하다. 사업비가 많이 내려오는 마을일수록 민주적 과정 절차가 생략되고 돈이 쓴 내역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고소고발이 남발하고 경찰서 출입이 잦으며 이장이 자주 바뀌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마을에 들어온 돈으로 어떤 사업을 한다는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여러차례 회의를 통해 이를 결정해야 하는데 논의하는 훈련과 연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목소리 큰 사람 위주로 결정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불만이 쌓이게 되어 있다. 최근 몇 년새 마을 사업으로 무엇을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이장 혼자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마을 주민 모두의 공통생각인지 이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마을이장 선거에 대하여
연말연시만 되면 이장 선거로 마을이 몸살을 앓는다. 변두리 마을은 할 사람이 없어 서로 안 하려고 사람 구하기도 힘들지만, 사람 수가 제법 많은 소재지 마을들은 치열하다. 귀농귀촌인과 토박이간의 세대결, 아니면 분파된 마을 세력과의 재대결, 신구세대의 대결,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귀결은 늘 말끔하게 봉합되는 것이 아니다. 선거는 차오른 갈등과 분열의 기폭제로 작동한다. 위장전입을 했네 안 했네, 불법 선거네 아니네 등 그 휴유증이 생각보다 크다. 선거가 끝난 후 진행되는 후폭풍은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짙은 안개와 같다. 최근 들어 법적 소송까지 이어지는 것이 빈번해졌다. 제보와 소송으로 점철되는 끄트머리는 결국 상처뿐이다. 논의와 숙의, 토론 문화는 적대적 관계 속에서 간단히 생략되어 있고 바로 소송 전으로 치닫는다. 경찰서에 몇번 불려가고 나면 적개심은 더 불타고 영혼은 탈탈 털려 혐오와 환멸, 허무가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사는 곳이 지옥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경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파랗고 푸르게 보이는 것들이 골목골목, 고샅고샅 보이는 집들이 다 원망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아마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도 다반사, 그래서 누군가는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매듭지어지면 다행이련만, 복수의 칼을 갈면서 복수혈전을 다시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일상은 늘 감시와 내용증명, 고소와 고발로 그득 차 있다.
관계의 완충 공간이 사라진 곳에 날선 칼날들이 서로 부대낀다. 행정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자치'라는 고상한 가치를 방패삼아, '스스로 해결할 일이에요'라고 말문을 닫는다. 괜히 중재나 조정을 해보려고 했다가 '너 누구 편이냐'고 묻는 서로의 말들에 '피 본' 선배 공무원들이 여럿 되기에 마을 다툼과 같등은 끼지 않는게 불문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럼 이장은 왜 행정이 임명하는 데, 필요할 때는 써 먹고, 골치 아플 때는 나몰라라 한다. 사실 이장 선거부터가 오래전 부터 내려온 관습에 의존하는 데 이래저래 개차반인 동네가 많다. 헌법에 보장되는 1인 1표가 당연한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치외법권인지, 아직도 세대주별로 한표씩 가부장적인 못된 습성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마을이 태반이다. 마을에서 투표하려면 돈을 일정정도 내어야 하는 곳도 있다. 명목상 마을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기 위한 거라지만, 돈을 내고 투표권을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득하지 않은가. 폐쇄적이고 고립된 마을일 수록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난다. 무얼 생각하든 상상이상일 수 있다. 이런 것도 행정에서 자치란 명목으로 바로잡을 생각은 1도 없다. 물론 사실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원안이겠으나 새로운 변화가 아니라 이미 상식처럼 굳어진 것들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은 썩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끼같은 마을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왜 이장이 되려고 그렇게 혈안이 될까. 이권 개입할 수 있는 여지와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마을사업 뿐만 아니라 각종 공모사업, 피해지원사업 하다못해 기부금, 후원금 등 모든 것들이 행정을 통해 이장으로 전파된다. 이장이 맘 먹고 안 알리면 알 수가 없는 구조이다. 사업관련 업체를 선정할 때 받을 수 있는 리베이트 또한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늘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가는 마을일 수록 탈이 난다. 그나마 남아있는 마을 공동체가 산산히 부서지게 되는 것은 마을이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이것을 논의로 결정하기 힘든 구조일 때 파국은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장이 되면 이장협의회 등을 통해 한단계 높은 면에서 입김을 자연스레 행사할 수 있다. 면단위 이장협의회장이 되면 농협 조합장이나 군의원 정도는 노려볼 만하다. 군 이장협의회장까지 되면 읍 소재지 농협 조합장이나 문화원장, 군의원, 도의원까지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들은 잠재적 경쟁군이 된다. 면 이장협의회장에서 군 이장협의회장이 되면 이게 어째튼 임의조직이긴 하나 파워가 나름 있다. 각종 위원회에 위원으로 초빙되기도 하고 목소리의 무게와 영향력이 달라진다. 이 때문에 권력과 금력,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어떤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장에 목을 메는 경우가 제법 많다. 그런데 되고 나서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엉망인 체계, 분파되어 있는 관계 이 속에서 불협화음은 늘 살아있다. 어떤 마을은 이장을 40년 가까이 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실상 독재나 아니면 군주정과 같다. 대통령이 몇번이나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장인 그대로인 마을은 사실 안타까운 마을이기도 하다. 역할을 여럿이 나눔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농촌의 가장 기본단위였던 면이 구심을 갖고 공론장을 통해 마을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이보다도 더 좋을 수는 없다. 민간 위원회를 통해 이를 조율하고 중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는 녹록치 않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면은 급속히 쇠락하고 있다. 면 소재지는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고 있다. 면 단위 오일장은 사라진지 벌써 몇 십년이 되었고 도시화된 읍에 의해 하나둘 무너지고 있다. 읍과 가까운 면일수록 면소재지의 약화는 두드러지고 그만큼 구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면장과 이장협의회가 면단위 공론장을 대체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기관단체협의회 정도가 어디서나 만들어지고 있긴 한데 각자의 마을은 건드리지 않는 불문율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괜한 갈등 국면에 끼어들어 본전도 못 찾을까봐 언감생심 끼어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잘 해봐야 본전이고 잘못 끼이면 양쪽에서 욕을 먹을까봐 뒷담화만 조심스레 할 뿐 공식적인 논의는 아예 하지 않는다. 이런 빈약한 공론의 문화다 보니 마을의 일은 각자 피 터지게 해결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툭하면 고소고발이다. 군단위 변호사들의 일용할 먹을거리를 대 주는 것이다.
면단위 사라진 공론장과 잃어버린 장터(시장)를 다시 세우는 노력들이 필요한데 이미 그에 대한 사망선고는 내려진 지 오래같고, 박물관의 유물처럼만 회자될 뿐이다. '면'은 물리적인 산과 강, 고개로 같은 학교와 면 소재지를 같이 공유하면서 이뤄진 정서적인 것 때문에 다른 면과 경계가 분명하고 이질감이 있다. 그것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지만, 지금은 면의 기능이 사라지고 마을의 문제가 바로 군으로, 법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서적 공동체를 포괄하는 면의 공론장과 행정기능이 약화되면서 마을은 포박되고 있다. 방치와 방임 속에 관계로 풀어낼 수 있는 일을 행정체계로 조정, 조율될 수 있는 일을 바로 송사로 직행하면서 여러가지 시간, 감정, 금전 낭비로 이어지고 탈진상태까지 이르는 것이다. 행정의 개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을 열어주는 역할, 스스로 공론장을 열고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마중물의 역할, 이는 개입과는 다르다. 관계의 완충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 마음을 덜어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게 거의 없다. 언론보도도 양쪽 얘기를 전달하며 갈등을 키워내는 것은 정말 쉽다. 그게 아니라 구조와 체계를 보면서 맥락을 읽어야 한다. 단일 사안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문제가 도처에 발생하는지 우리는 그 이면을 봐야 한다. 인심 좋은 시골이라는 말은 도시에서 붙인 딱지에 불과하다. 이제 더 치열해졌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뭐. 갈등은 어디 든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정상이다. 문제는 조율과 조정, 해결이다. 그런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농촌에서 이장 선거 때마다 치고박고 송사까지 이어지는 제보는 정말 허다하다. 물론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군분투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마을도 적지 않다. 그런 마을들 때문에 농촌이 생명력을 이어간다.
학구가 갖는 의미
학구는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추억들은 여러모로 관계와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어릴 때 같이 커가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친밀감이 크고, 같은 시공간을 보냈기 때문에 정서적 동질감이 만들어진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중,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관계의 영역이 더 확장되고 기억의 영역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을 지내면서 같이 붙어있다 보면 애증이 교차하면서 관계가 만들어진다. 서로 잘 맞으면 정말 그것처럼 복이 없지만, 서로 안 맞으면 그것만큼 불편한 게 없다. 대부분 시골학교는 한 학년이 한 반이라 전학을 가거나 다른 학교로 진학하지 않는 이상 자칫하면 12년을 같이 가야 한다. 관계의 완충지대와 분리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옛날에는 학생 수가 많아서 학교가 한 면에도 여러 곳이었다. 옥천은 지방자치가 다시 시작된 1991년부터 폐교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91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7개 초등학교와 1개의 중학교, 1개의 고등학교가 폐교됐다.
군북면에는 추소초(1959~1991), 군북초(1934-1994)가 폐교됐고 증약초만 남게 됐다. 안내면에는 대동초(1968~1993), 용촌초(1965~1995)가 폐교됐고 안내초만 남았다. 안남면에는 삼화초(1969~1999)가 폐교되고 안남초만 남았고, 옥천읍에는 군동초(1966~1998)이 폐교되고 삼양초, 군남초, 죽향초가 남았다. 청산면에는 폐교된 학교 수가 좀 많은데 신서초(1966~1995), 예곡초(1943~1995), 대월초(1968~1995), 청동초(1969~1999) 등 무려 4개 학교가 90년대에 모두 폐교되고 청산초만 남았다. 청성면도 폐교수가 많은데, 화성초(1946~1999), 묘금초(1944~2000), 능월초(1945~2009) 등 3개 학교가 폐교되고 청성초만 남았다. 동이면에는 청마초(1941~1994)가 폐교되고 동이초만 남았고 이원면에는 지탄초(1943~2012), 대성초(1946~2014)가 폐교되고 이원초만 남았다. 중학교로는 동이면의 동이중(1971~1998)도 폐교되고, 고등학교는 옥천공고가 1999년 3월1일자로 폐교됐다. 옥천공고는 폐교되면서 300여 명의 공고 진학생들이 대전이나 영동, 보은으로 유출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나마 있던 인구도 유출을 시킨 것이다.
학구는 생활권과 대동소이하다. 예전의 학교와 보건진료소는 면사무소보다 많았지만, 이제 비슷해지고 있다. 지근거리 생활권이 무너지고 면 중심 생활권으로 재편되는 시기가 90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것이다. 지금은 옥천읍을 제외하고 나머지 8개 면은 1면 1교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청성초가 전교생 20명이 간당간당하면서 1면 1교 체제도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농촌은 지키지 않으면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1면에 한 개 밖에 없는 시장서비스가 문을 닫아버리면 겪는 불편은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문을 닫아버리는 시장 서비스를 공공에서 그냥 보고만 있으면 지역을 떠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빨리 공공에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를 마련하지 않으면 지역은 곧 소거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목욕탕이나 미용실, 어린이집, 도서관, 약국이 없는 면 지역도 많다.
학교와 면지역 각종 서비스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 마을조사는 협소하게 끝나버린다. 삶을 양태를 봐야 한다. 나고 자라면서 지역에 정주하면서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유일하게 남은 지역의 서비스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가령 이런 거다. 청산면 교평리에 있던 청산면에 유일한 사설 목욕탕이 2006년 1월7일자로 문을 닫았다. 목화파크에 있던 목욕탕인데 나도 청산 살 때 자주 이용하던 목욕탕이었다. 요즘에는 집마다 샤워시설이 잘 갖춰져서 굳이 목욕탕 갈일이 없다지만, 시골 노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실이다. 홀몸노인들집에 가면 샤워시설은 언감생심이다. 뜨거운 물이라도 나오면 다행이고 그 물도 아껴 쓰려고 얼굴과 손발만 닦는 수준이다. 주로 노인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 당시 한번 목욕할 때 3천500원, 이 마저도 오를 때마다 민심이 요동쳤다. 한달에 한번 온 몸에 있던 때를 벗기면 다시 한달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욕탕은 인구가 줄어들고 이용하는 사람이 점차 적어지면서 손익분기점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문제는 이런 불편이 가뜩이나 어려운 사회적 약자에게 비용이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데 있다. 목욕을 거르거나 아니면 버스를 두번 타고 인근 영동읍이나 보은읍에 있는 목욕탕으로 목욕 원정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비용과 시간의 부담은 고스란히 이용자들에게 부담이 됐다.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었지만, 존재 자체가 유일했기 때문에 공공성을 담보하고 있던 목욕탕이었다. 그러면 공공영역에서 기존 시설을 활용해 살릴 방안을 같이 고민하거나 아니면 새롭게 공공목욕탕을 지어서 운영하는 방안을 문닫기 전부터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걸 고민하길 바라는 것은 지금의 행정체계, 아니 지방자치에서 조차 헛된 바람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목소리도 작은 사회적 약자이고 그 목소리를 귀기울일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악순환이다. 본인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니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돈 없는 노인들은 추가 비용을 더 부담하는 등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 어떻게 생활하는지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가 필요하다. 당시 옥천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이를 보도했다. 하나뿐인 청산면 목욕탕 사라지나 라고 말이다. 그리고 군의 대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목욕탕이 설치되지 않고 있다.
옥천읍내 시가지에 있는 자전거포 하나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전언에 의하면 삼양초등학교 앞에 있는 유일한 자전거포 사장님이 나이도 연로한데다 디스크가 있어서 오래 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개인이 운영하는 목욕탕, 자전거포가 문 닫는게 뭐 그리 큰 뉴스라며 호들갑 떤다고 이야기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목욕탕이 유일하게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이며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정말 뼈아픈 뉴스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나 노인들은 자전거가 고장나거나 바람이 빠질 때 가까운 곳에 가서 고칠 수 있는 편의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하나뿐인 자전거포가 문을 닫는다면 자전거 고치러 군북면 이백리까지 가야 하는데 그 거리는 상당하고 거기까지 자전거 도로가 있지 않기 때문에 위험천만하다.
군북면 이백리에는 삼천리 자전거 포가 하나 있긴 하지만, 차로 이동하지 않고서는 접근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읍내 자전거 포 하나 사라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뉴스인 것이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비롯해 자전거 이용 활성화는 옥천읍내의 교통체증과 배기가스가 많은 옥천읍내를 더 쾌적하게 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자고 입말로 캠페인으로만 하지 말고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가장 기본이다. 그런데 행정에서는 읍내 자전거포가 하나뿐이라는 것, 이 곳이 곧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수리를 한 적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포가 문을 닫으면 자전거 수리가 더 불편해져 자전거 타는 이용자들이 확 줄어들 것이다. 유일한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는 사회적 약자들은 이동권을 더 침해받는 것이다.
도시는 전혀 걱정하지 않을 규모의 경제가 받쳐주니 절로 서비스가 생기면서 채워주는 것들이 농촌에서는 결핍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점포가 유지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어느정도 공공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인상되거나 점포가 문을 닫게 되면 가정 경제도 덩달아 휘청인다. 시장과 자본이 퇴각한 자리에 아니 퇴각하기 전에 공공에서 어떤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던 오일장
3일, 8일이던 안남면 배바우장은 1980년 대청댐 수몰이 되고 나서 사라졌고, 안내면 장은 4일과 9일 오일장을 유지하다가 1989년까지 한명의 장꾼만 남아 유지하다가 90년대 들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걸로 보인다. 이원면 오일장은 대흥리에서 신흥리로 옮겨 5일, 10일로 계속되다가 1960년 당시 2일7일 이었던 옥천장날이 5일, 10일로 옮기면서 한바탕 지역감정이 안 좋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인구가 많은 지역의 힘과 상권에 맥을 못 추면서 이원장이 거꾸로 2일,7일로 장을 옮기다가 2009년을 넘어서면서 장이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동이면 장은 잠깐 유지하다 이름만 남기고 없어졌고 청산장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지만, 당장 없어진다 하더라고 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쇠락해져 있는 상황이다. 근 40-30년 동안 학교와 오일장이 사라지면서 면의 구심은 더할 나위 없이 약화됐다. 오일장이 쇠락이 시작된 것은 면 중심의 생활권이 약화된 단초였고 이에 반대급부로 시군자치제가 외려 읍의 상권과 공공기관을 강화시키고 읍 중심으로 모든 도로가 개설되고 그 도로 따라 대중교통이 만들어지면서 면은 급격하게 쇠락을 맞게 된다. 배바우장은 3일 8일 1980년 대청댐 수몰되고 나서 없어졌다. 대청댐으로 수몰되기전 안남 배바우장터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3일·8일 5일장이 열릴 때마다 안남면에는 연주리 마을회관 인근에 극장이 섰고 소방대 근처에는 우시장이 섰으며 면사무소 광장 앞 둥구나무에는 막걸리집, 풀빵장사, 고무신 때우는 곳, 돼지전, 닭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인구 1만명을 넘던 시절 안남 농산물 질이 좋다는 소문을 타고 인근 청산, 보은, 상주, 옥천 사람들도 안남장을 찾았더랬다. 옥천신문 기사를 찾아서 인용된 멘트를 보자. 안남면 유동옥(79, 청정리) 노인회장은 "30년 전 배바우장은 그야말로 대단해 상주, 보은, 대전에서도 안남장을 찾을 정도로 컸다"라며 "우시장은 물론 돼지, 닭전이 따로 설 정도로 규모가 크고 물건도 다양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렇게 다시 장이 열리니 정말 흥이 난다"고 덧붙였다. 지수리에서 온 김덕상(67)씨는 "백중이나 단오 때는 배바우장터에서 씨름대회도 개최할 정도로 장터가 열리는 날은 안남면의 축제였다"며 "장이 다시 열려 기쁘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15일) 그 뒤로 안남면은 주민자치의 힘으로 매주 토요일, 매월 한번씩 토요장터를 열려고 했으나 이 마저도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흐지브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안내면 오일장은 1989년에 거의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현리 삼거리에서는 매 4일과 9일이면 장이 섰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 안내에서 열리던 장은 우시장과 함께 옥천에서 알아줄 만큼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 속에 이 곳 주민들은 옥천, 보은, 대전 등지로 장을 보러 다닌다. 당시 낫, 삽, 곡괭이, 톱 그리고 멍에를 팔던 김병희(54)씨가 마지만 홀로 남았던 안내 장꾼이었다. (1989년 12월16일 옥천신문) 지금은 유난히 도로가 넓다는 것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무럴 것도 없는 현리 삼거리엔 80년대 초반까지 오일장이 섰다. 대청댐 수몰 후 3∼4년 정도 힘겹게 장이 섰지만 결국 상황의 변화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 때는 정말 대단했지. 우시장은 더했어. 원남, 안남에서는 물론이고 맥기나 동정리 일부에서도 장을 보러 왔으니까. 그 때는 여기저기서 싸움판이 벌어져야 장이 끝났어.""시네마스코프라도 들어오면 진짜 재미있었는데. 동네 애들이 빠방(천막에 구멍을 내는 것을 이렇게 얘기했다)뚫고 들어가서 보다가 걸려 혼나고 말이야." "그 때 본 영화가 빨간마후라, 지옥문, 팔도강산 같은 거였구. 김희갑, 박노식, 신영균, 황해 같은 배우들이 날렸지." "재밌었어. 먹고살기가 그 때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았지. 담배 수매장이 정방리 쪽에 있어서 수매 때면 북적거리고 인포리 앞쪽 논은 또 얼마나 좋은 옥답이었어. 지금은 다 잠겼지만." (2006년4월21일 옥천신문 마을탐방)
이원면 오일장은 오래된 우시장을 비롯하여 장날마다 인근 동이, 금산, 심천, 양산 등지의 상인들이 몰리던 큰 장터였다. 교통이 발달하고 주민들의 의식이 변화하면서 이원장은 급속히 몰락해갔다. 버스 한번 타면 옥천읍까지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옥천읍에서 장을 보는 주민들의 수도 늘었다. 이원 장터는 해방될 당시까지만 해도 대흥리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신흥리는 논밭으로 집조차 몇 채 되지 않았으나 1947년 병술년 수해가 대흥리 장터를 쓸어버린 후 장터 이전 논의에 의해 1950년 초 신흥리로 장이 옮겨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흥리와 신흥리간 서로 장을 뺏기지 않으려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옥천읍과 장날 문제로 더 큰 싸움을 벌인 것은 그로부터 10년 쯤 후인 자유당 말기, 당시 2일, 7일 장이던 옥천읍에서는 장날을 5,10일로 옮겼고 이원면민들은 장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민주당 정권 하에서 옥천읍으로 나와 시위를 하는 등 실력행사를 했다. 1-2년간 옥천읍과 똑같은 5,10일장으로 버티던 이원면에서는 하는 수 없이 2,7일장으로 날짜를 바꾸게 되었고 그 때부터 옥천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원장이 쇠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교통발달로 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94.7월30일 옥천신문 이원면 신흥1리 마을탐방 중).
동이면은 면사무소와 보건지소, 농협등이 위치한 평촌리에 1964년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시장터를 닦기 시작한 것이 이 마을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들미 현재 성주이씨 사당터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 곳으로 이전하고 시장터를 닦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옥천장과 이원장, 보은장 등에 밀려 몇 개월 시장이 운영되다 지금은 시장터란 이름만 남겨지게 되었다. (2001년, 1월 13일 동이면 평촌리 신마을탐방) "사람들이 조금씩 물건을 내와서 팔기도 하고, 집안에 있는 물건으로 물물교환하고 그랬어요. 근데 옥천읍이나 이원장이 가깝다보니까 장사꾼들이 들어오지 않고 또 장보러 오는 사람들도 없어서 사라졌어요. 이름만 남게 된거죠"(이병렬)
1970-80년대만 해도 1만명을 넘던 청산면 인구는 최근 2천명 대로 추락했다. 청산장은 더 쇠락했다. 교통이 편리해져 옥천읍이나 영동, 보은, 대전으로 장을 보러 가는 주민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도로포장이 안 돼 상가 창문은 항상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지전리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지요. 당연히 장사가 잘 되니까 가게 크기가 한 평 반(4.9~5.0m²)만 되도 가게를 차렸어요. 장날이 되면 새벽 5시부터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가게 문을 두드렸고 밤 10시는 돼야 장이 끝났어요. 지금이야 오후만 되도 사람이 없지만 그때는 사람도 많고 일자리도 많으니까 청산 사람들이 지전리로 몰려들었죠. 저는 보은에서 태어났는데도 지전리로 왔을 정도니까요."(이윤희),[2013년 4월12일 옥천신문 마을탐방]\
“몇 년 전만 해도 장터 주위의 식당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손님들로 가득 찼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장날보다 평상시 이용고객이 더 많을 때도 있어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왁자지껄 대단했지. 한집에 열무를 일곱단씩 그렇게 사갔다니까.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열무김치, 배추 김치 담궈서 마을 두릉박샘에다 달아매서 담궈놓았다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니까. 온 가족이 보리밥에다 비벼서 쓱쓱 먹으면 별미였지. 파도 하루에 200단까지 팔아서 허리도 못 필정도였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시원찮아.""영동 사람, 보은 사람 다 모여서 만나고 먹고 놀고 그랬지. 썩은 생선은 여기서 다 먹는다고 했지. 장을 늦게까지 하니 싱싱한 생선이 축 쳐질 것 아녀, 그것 싸게 사서 다 먹었지. 물명태는 싱싱한게 별 맛이 없거든 물이 약간 가야 맛이 나. 그렇게 먹고 했다니까"(최명식)[2015년6월19일 옥천신문 장터사람들]. 당시 오일장은 굳이 읍에 나가지 않아도 인근 도시에 가지 않아도 자급적인 생활여건의 상징이었다. 시장과 광장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했고 다양한 문화와 관계가 만들어져 절로 지역사회가 형성되었다. 그 흔적이 불과 30-40년 전까지 남아있었다. 하지만 권력과 자본의 체계는 각 면지역 공동체의 생활세계를 잠식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약육강식으로 약한 지역의 자본과 사람을 사실상 착취하였고 그 지역의 공동체를 무너뜨렸다. 크기와 힘에 대한 강박, 개발에 대한 강력한 욕구 등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던 면지역의 자치와 자급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열악한 지역으로 낙인을 찍었다. 인구가 줄어들자 당장 돈이 안 돌았고 그 규모로 영위할 수 없는 시장 상권의 서비스는 하나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병원이나 약국이 있는 면은 청산면과 이원면 뿐이며 그나마 청산면에 있는 하나뿐인 약국도 오후 5시면 문을 닫아 주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목욕탕도 없어졌다. 경찰서도 농협 등 공공서비스도 인근 큰 면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철수한 시장 서비스들에 대해 민감하게 인지하고 공공의 영역이나 공동체의 영역에서 해결했어야 했으나 공공은 이런 인식 자체가 부재했고 공동체는 힘이 미약했다. 면 지역 생활권의 공동체를 어떻게든 살리는 방향으로 머리를 맞대어야 했으나 당시 2010년대 들어서 활황을 맞았던 마을 사업은 개별 마을에 국한했고 일부 마을을 엮어낸 권역별 사업은 생활권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개별마을과 권역사업이 활성화되면 될 수록 면 지역 안에 갈등과 불화가 상존했으며 마을간 격차와 권역 안과 밖의 정서적 소외와 배제는 공동체에 악영향을 주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유교사상과 크기와 중심을 강박적으로 선호하는 미디어, 교육이 결국 천박한 문화를 만들어냈고, 다수결 원칙과 비례제가 아닌 다수제의 선거 문화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모자라고 결핍된 부분을 보충해주면서 공동체의 자율성과 자치성을 살리려는 보충성의 원칙보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라지도록 겁박하는 약육강식분위기를 조성했다고 보면 된다.
점점 더 열악해지는 지역 공공의료
"벌 쏘여서 보건지소 가면 읍내 병원 가보라고 해요. 몇 번 병고치러 갔다가 자꾸 뭐가 안 된다고 하고 읍내 병원 가보라고 하면 안 가죠. 거기 가면 시간만 낭비할 텐데 또 뭐하러 가나. 차라리 그냥 읍내 병원 가고 말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아이들 약은 아예 없어요. 물론 면 에는 아이들이 많이 없지요. 애들 아프면 소아과 약은 없다고 아이들 진료는 안 한다고 읍내 나가보라고 해요. 애들 약 가져다 놓으면 잘 안쓰고 방치되고 유통기한이 지나니까 아예 안 갖다 놓는다고 그래요. 면에 급하게 아파서 약국이라도 갈라치면 약국이 어디 있나요? 편의점도 없고. 어디 상비약을 마땅이 구할 만한 데가 없어요. 그래서 아프면 차 타고 30분 가량 의례 읍내 병원 가야되는 걸로 알고 있죠"
"보건지소야! 뭐 할머니들 당뇨약, 혈압약 챙겨주는 거 정도, 그리고 가끔 물리치료, 한방의 와서 침 맞는 정도인데 그것마저도 점점 없어져요. 옛날에는 치과진료도 했는데 그것도 슬그머니 빠지더니 이제 물리치료실도 다 빠져 보건소에서 통합 운영된다고 하대요. 면사무소 옆에 보건지소가 있는데 있으면 뭐해요. 할머니들, 당뇨, 혈압약 챙겨주는 것 그 이상으로 발전이 없어요. 그런 할머니들도 장날 읍내 구경한다고 겸사겸사 읍내 병원 많이 출입하시니 보건지소의 존재감이 별루 없어요."
"농사일 하다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외과진료도 필요한데 외과진료는 안 하거든요. 엑스레이도 없고 읍내 일반가정의학과 만치도 못해요. 더도말고 덜도 말고 그냥 만성질환 앓는 할머니들 가는데가 딱 보건지소에요."
"뉴스에서 지역에 공공의료를 확충한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지금까지 공공의료를 제대로 하기나 했나. 예산 없다고 줄이고 감축하고, 없애고 하는게 전부인데. 옥천에 오지에 있는 보건진료소 20여 개 있었는데 5-6개 없앤게 옥천군이에요. 보건진료소 없앤다고 했을 때 주민 반발이 얼마나 많았어요. 데모하고 찾아가서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더라구요."
지근거리에 병원이 없다는 게 상상이나 되는가 버스 타고 30분 가량 가야 병원과 약국을 접할 수 있다는게 믿겨지는 가. 시골 농촌은 그렇다. 보건소는 알아도 보건지소, 보건진료소의 개념은 잘 모를 것이다.
농촌의 면에는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있지만, 사실 시늉만 내고 있었다. 일찌감치 사지말단까지 뿌리내린 보건진료소 하나둘 없애더니 보건지소만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형국, 보건지소에 있던 물리치료실도 올해 1월부터 군 보건소로 다 통합하면서 한의사 돌리면서 공백을 채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예산을 핑계로 효율을 이유로, 가장 약한 곳부터 툭툭 건드리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소수자들 의견이야 가볍게 뭉게면서 사람 없는 곳에 투자 대비 효율이 없다는 등 자본의 논리를 들이 밀며 함부로 통합시킨다. 그것이 바로 공공성이 약화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뿌리내리며 교통했던 관계의 끈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체계의 말단으로 기능하게 하면 그 필요성은 더 약화된다. 약화되면 또 하나둘 끊어버리는 것이다. 가령 이원면 현리 보건진료소와 지탄보건진료소를 없애면서 그 중간에 원동보건진료소를 설치했다. 양극단 보건진료소의 지리적 중간 쯤 설치한다는 건데 탁상에서 보면 이는 그럴 듯해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악마의 통합'이다. 지탄에서 원동보건진료소를 이용하려면 차가 쌩쌩 달리는 4번국도를 가로 질러야 한다. 포동과 지탄 사람들이 걸어서 원동보건진료소를 이용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그렇다고 버스 타고 원동보건진료소까지 나오기도 애매하다. 그럴바엔 옥천오일장 열릴 때 읍내 병원 가고 말지. 그러면 이용율이 저조할 수 밖에 없고 자주 마실가듯 이용했던 보건진료성의 관계성이 툭툭 끊어지고 나중에 통폐합 대상에 또 그 이름이 오를 것이다.
열두가산이 고개를 빙글빙글 돌아 넘어가야 했던 용촌보건진료소를 없애면서 동대보건진료소와 합쳤다. 안내면에 사는 사람들은 안다. 용촌리와 동대리가 얼마나 먼데, 같은 면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합병한 것을 보면 정말 탁상행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용촌, 답양리는 동대보건진료소 관할 구역에 들어갔지만, 차라리 안내보건지소가 더 가깝고, 읍내 병원 가고 말지, 동대보건진료소 가기는 힘든 것이다. 물론 보건진료원이 돌아다니면서 방문은 하고 있지만, 이는 기존 관할 구역에도 피해를 주는 일이다. 거기 한번 방문할라치면 보건진료소가 비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성을 끊어버리면 체계는 조직을 자율적으로 통폐합하기 용이하다. 주민과 접촉면이 줄어들면 반발도 적을 것이며 그렇게 줄여나가는 것이다. 아마 간호사 한명만 파견되어 있는 보건진료소는 이제 학교 폐교와 마찬가지로 점점 줄어들 것이다. 교통이 편리해졌기 때문에 굳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버스 한번 타면 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과연 그러한가. 버스를 타는 시간과 비용은 과연 누구의 몫으로 남는가.
저상버스도 아닌 승차감 제로인 덜컹거리는 농촌버스 타다가 멀쩡한 관절도 아작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원 가다가 병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다 먼저 출발하는 버스, 손잡이만 잘못 잡으면 그대로 삐끗이다. 높은 과속방지턱 하나 넘을 때마다 쿵쿵, 뼈마디 관절이 쑤신다. 구불구불 덜커덜컹 멀미를 동반한 40분-50분 버스타기는 사실 고난의 행군이다. 몇 번 갈아타야 될 때 제 시간에 버스가 안 오면 비가림도 없는 정류장에, 의자 하나 변변찮은 정류장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보건진료소는 이전 체제만 유지한다면 최상이었지요. 보건진료소 옆에 사택이 있어 보건진료원들이 아예 거주를 해야 했고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가 15명 정도로 구성되어 진료소 운영에 전적으로 주민들의 의견과 합의가 바탕이 되어야 했거든요. 물건 하나 살때도 약품 하나 구입할 때도 주민인 운영협의회장의 결제를 득해야 했지요.얼마나 민주적입니까. 그런데 이런 민주적인 절차도 하나씩 허물어집디다." 간호사인 보건진료원을 뽑을 때는 보건진료소내에 거주를 해야하고 그 지역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물론 뽑힐 때 그런 법규와 규정으로 뽑았지만, 진료원들은 어떻게든 이 규정을 없애려고 했다. 도시에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육, 문화 환경이 도시에 비해 열악했던 시골에 근무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지 이들은 지속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이 규정을 폐지하도록 움직였고 2007년 즈음인가 이 규정은 없어졌다. 옛날에 지역에 살았을 때는 의사만 아니었지 그 지역의 건강 주치의나 다름이 없었다. 그 지역 주민으로 살면서 지역 상황을 소상히 알아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마을에서는 부부싸움이 나도 괜한 소문이 날까 하소연 할 때가 없었는데 보건진료소에 와서 시시콜콜한 이야기 다 하면서 풀기도 했다. 익명이 없는 그런 공간에서 보건진료소는 면사무소보다 가까운 완충지대였던 셈이다. 약 타러 마실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지역의 이야기들이 풀리기도 했다. 가슴이 따뜻했던 보건진료원들은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을 모르게 챙겨주기도 했다. 실거주 하지 않아도 되고 타 지역보건진료소로 전근시기가 짧아지면서 두터웠던 관계도 엷어져 갔다. 또한 주민들로 구성된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도 의사결정 기구에서 이제 자문기구로 전락했다. 분기별로 모이긴 모이지만, 의견만 내는 정도였다. 하나로 모아졌던 관계성과 공동체성이 순식간에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로 변모되었다. 옛날에 보건진료원은 주민과 마을 속에 건강주치의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된 것이다. 이런 변질되는 방식은 나름 전문성, 효율성을 근거로 둔다. 전문성과 효율성만이 알멩이인줄 착각하는 탁상 전문가들이 많다. 그 알멩이를 둘러싸고 있는 외피와 알멩이속의 씨앗들은 전혀 보지 않고 말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의 공공의료체계의 그림이 그려진다. 사지말단으로 면지역 오지거점까지 침투한 보건진료소의 싹을 잘라버리고 아마도 보건지소도 통합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관계형 의료를 제거하고 체계형 서비스를 대신하는 쪽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크다.
"보건진료소는 운영협의회라고 있고 주민들과 분기별이라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라도 하지. 보건지소는 그런 것도 없어요. 군복무하는 공보의 1년, 2년, 3년 있다가 발령나고 군복무 마치면 사라지는 초보 의사들이 지소장하고 떡하니 앉아있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공식적인 체계도 절차도 위원회도 없어요. 그냥 있다가는 거지. 이게 무슨 민주적인 공공의료라 할 수 있나요?" 보건지소는 운영위원회 자체가 없었다. 간호사와 공보의로 구성된 것이 전부. 그 사람들이 그냥 오는 사람 받는 것이다. 보건지소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민의를 수렴하는 절차가 아예 생략되어 있다. 이쯤에서 보면 그냥 주민들 반발 무마하려고 대충 만들어놓은 것이다. 보건지소의 비전이나 방향 자체가 없다. 그냥 정말 최소한으로 해놓은 것이다. 이런 지소에 누가 자주 많이 가겠는가.
이처럼 공공의료는 방치되어 있고 읍내 병원은 노인환자들 때문에 돈을 많이 번다. 장날이 아니라도 아침부터 줄 서 있는 노인들은 그들에게 다 '돈'이다. 지역 의사들은 거의 90% 지역에 살지 않는다. 인근 대전에서 다 출퇴근한다.
보건진료소와 보건지소가 의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방치한 그 틈새로 시골 의료시장이 열렸다. 그들은 물론 열심히 한다. 공보의도 간호사도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 많이들 칭찬도 하신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단단히 잘못 되었다. 어떤 지향도 비전도 없다.
보건진료소는 정말 면사무소보다 더 주민들 가까이에 있는 공공기관이다. 간호사 한명이 그 공간에 들어가면서 할 수 있는 공익적 효과는 정말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거주제한이 풀리기 전부터 공공연히 출퇴근하는 진료원이 많았다. 물론 공고와 규정을 숙지하고 응시하고 합격했지만, 젊은 사람이 더구나 전문직 종사자가 시골 농촌에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규정이 빨리 삭제되길 간절히 원했다. 당시 취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기자님은 면지역 시골에 살아본 적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요? 교육과 문화, 생활 편의시설이 얼마나 열악한지 아느냐구요? 살아보고서 이야기를 하세요. 면 소재지도 아니고 오지 거점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하소연하면서 날이 서 있는 그런 말들이 슬펐다. 이제까지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누구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못 견디게 떠나고 싶도록 농촌을 만든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농촌은 사실 지금도 떠나고 있다. 엑소더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소리없는 절규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계속 유지만 되기를 바라는 주민들은 여전히 있다. 할머니들이 그렇다. "지소에 오는 게 가깝고 편리하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가격도 싸고 당뇨약, 혈압약, 기침 할 때 오는데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게 어디여. 좋지. 암만 꼭 있어야 돼"
"우리 진료소 있으니까 얼마나 편한대요. 체조도 하고, 건강상담도 하고, 약도 챙겨주고 진료소 없으면 안 되요. 할머니들한테 꼭 필요한 곳이에요. 더 이상 진료소가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지금 있는 서비스도 감지덕지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아직까지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남아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한줌의 이유로 면지역 농촌 공공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농촌에도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공의료는 민주성과 관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무리 전문적 지식이 없고 의료에 무식한 주민이라도 운영위원회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성은 그런 보편적인 주민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민주성이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주민들을 이해시킬 책무가 있고 여러 주민들은 합리적인 결정을 위해 의견을 모아야 한다. 이 과정들이 생략되면 모든 일들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겠으나 민주주의는 아닌 것이다. 생활권이 같은 공동체 속에 공공의료가 자리잡는 것이 적합하다. 그런 공동체 속에 공공의료가 싹이 트길 바란다.
민주주의는 번거롭고 까다롭고 힘들다. 늘 갈등이 수반되고 다툼도 종종 일어난다. 민주주의는 그런 갈등을 먹고 자란다.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는 죽은 민주주의다. 부글부글 끓어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전문 엘리트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다. 이 사회의 가장 약한 자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민주성도 덩어리가 커지면 민주성이 희박해진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만큼의 커뮤니티 구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적절한 공동체에서 민주주의의 효능감은 커진다. 공공의료는 이런 민주성과 관계성 기반 위에 자리잡혀야 한다. 옛 보건진료소가 그렇게 운영되었듯이 사지말단까지 민주적인 공동체 공공의료가 뿌리내리길 바라는 바이다.